시시포스는 끝없는 형벌을 받는 와중에도
일상의 작은 새로움과 행복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형벌로 시작되었던 그의 운명은 그러나,
그가 일상 속의 새로운 발견을 반복함으로써
더 이상 형벌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시시포스가 신을 이긴 것입니다.
시시포스는 절대신 제우스의 불륜을 강의 신 아소포스에게 고한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황천길에 올랐다. 다만 그는 순순히 끌려가는 대신 비상한 꾀를 내어 지상으로 도망쳤고, 도망친 곳에서 은둔하며 천수를 누리지만, 결국 신들에게 발각되어 영원히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훗날, 시시포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빗대어지기 시작한다. 시시포스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떠냐는 권유가 되어서 말이다.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자각이 시작되었음은, 곧 그 삶의 형태에 충분히 적응했다는 뜻이다. 새로운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삶의 형태는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순간, 은근슬쩍 시시포스를 향한 기만이 시작된다. 매일 같이 바위를 밀어 올리고 정상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를 또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그가, 어느 순간 바위에 피어난 이끼나 꽃 뿌리 따위를 보고는 기뻐했다던가, 오늘은 바위가 수월히 굴러가는 느낌이 들어 슬며시 고조되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사소한 즐거움을 찾았다고 말이다.
발상의 전환이란 대부분은 은근한 말장난이다. 신이 시시포스에게 단 한 번의 면죄부를 준다면, 시시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며 사는 것을 택할까? 바위에 피어난 이끼가 아름다워서? 어제 맺힌 꽃망울이 예뻐서? 바위를 굴리는 일이 즐거워져서? 그렇게 신에게 엿을 먹였으니, 그래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며 사는 것을 택한다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일구기 위해 살며, 무엇을 누리기 위해 사는가. 산다는 데에 있어 그 의미란 중요하다. 삶의 의미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그 자체이며, 원동력 그 자체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한 때는 천수를 누렸으나, 지금은 매일 바위를 산 정상을 향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에게, 그의 발 끝에 차이던 꽃 뿌리들은 삶의 의미가 되었을까?
아니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집어던질 것이다. 시시포스는 등 뒤의 내리막으로 바위를 냅다 집어던지고는, 신이 비겁하게 은둔하고 있는 하늘을 향해 포효할 것이다. 그러고는 그 길로 산을 뛰쳐 내려가 강에 몸을 던져 세찬 물살을 맞고, 숲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열매들의 과육을 게걸스럽게 맛볼 것이다. 이윽고 가까운 도시를 찾아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또다시 천수를 누릴 것이다. 바위를 밀어 올리며 삶의 의미를 헤집던 일은 진작에 잊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