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도록 마주하고
우리는 처음에 슬퍼지는 그 짧은 순간이 싫어서,
‘이러면 안 돼’ 하고는 그 슬픔을 얼른 밀어내 버리려 합니다.
뭔가를 보거나, 먹거나 하면서 말이죠.
그러고는 뭔가 작은 만족감을 얻죠.
완전히 슬프지도, 완전히 행복하지도 못한 채로요.
- Louis C.K.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귀 옆으로 바싹 다가오는 듯,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러나 아늑한 침대 위에서, 또다시 잠과의 싸움은 시작된다. 수 십 번 뒤척이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문득 시계를 보니 잘 시간은 아득히 지나있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고 무언가를 세어 보지만, 쉽지 않다. 그 틈을 놓칠세라, 무수히 많은 연기 같은 것들이 머릿속으로 날카롭게 스며든다. 상서로운 잠 대신, 어김없이 녀석은 찾아온다.
녀석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불안, 슬픔, 혹은 상념. 나는 녀석을 '공허'라 부른다.
무언가에 깊게 매몰되어 보낸 시간 뒤에는 반드시 공허가 찾아온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분투한 시간이었든, 미움에 매달려 가만히 산화하던 시간이었든, 혹은 여정이나 여행에 올랐던 시간이었든, 녀석은 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매몰되었던 일에 대한 감상과 경험들을 추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런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듯 일상은 강행되게 마련이다. 녀석은 그 빈틈을 노려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난다.
사실은 그 안에 내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 부끄럽고, 애잔하며, 누군가에게 혼나는 기분마저 든다.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며, 외면하려 한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듯,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무엇이라도 다른 일을 하며 떨쳐내보려 하지만, 어쩐지 녀석은 곁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곧 녀석이 검은 허공에 영상을 펼쳐낸다.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속절없이 그것들을 관람한다. 나는 그간 견고히 세워져 왔던 가면들 무더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벗어낼 수 없는 내 하자들을 엿본다. 그 누구도 하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자라고 여기기로 했던, 그 중립적인 요소들의 향연을 말이다.
하는 수 없다며 잠자코 지켜보았더니, 어쩐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들은 나의 모습이다. 지난 시간 단조로운 일상의 탈을 쓴 시험들을 치열하게도 마주하던 모습. 만나고 이별하며, 획득하고 상실하던 순간들. 나를 바꾸기 위한 시도들을 일삼던 시간들.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하지만, 내심 무언가를 바꾸지 못했던 내가 아쉬워 조용한 분노로 숨죽이던 밤들. 영상들은 눈을 향해 쏟아지고, 이윽고 뿌옇게 흘러내린다.
공허를 마주한다는 것은 일종의 결심이다. 그것은 공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무력히 누워있는 나를 천천히 휘감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마치 오물을 퍼올려 스스로 뒤집어쓰는 듯,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 수면에 비치며 일렁거리는 나의 반영을 아프도록 마주하고 감내하는 일이다. 캄캄한 저편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그날의 내 모습들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좌절하는 일이다. 가시 돋친 그것들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오래도록 있는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피하고, 미루어 둔다.
하지만 우리는 공허를 직접 관람하며, 비로소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임을 깨닫는다. 바꿀 수 없는 나의 일부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결핍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료 삼아 검게 태워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내 삶과 그 자욱들.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무엇이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주었는지 깨닫는다. 적어도 나만은 부정해선 안되었을 내 모습을 똑바로 응시한다.
관람이 끝나면, 공허는 정중히 목례하며 자취를 감춘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는 맑다. 마치 공연이 끝나기라도 한 듯, 내 안에 불안과 후회가 어느 정도 다시 쌓이기 전까지 녀석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녀석을 손님처럼 맞이할 작정이다. 또 왔니. 오랜만이네. 함께 들여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