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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Nov 06.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슨 내용인가?

마히토, 왜가리, 그리고 큰 할아버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위 작품의 전개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왜 난해한가? https://brunch.co.kr/@minigoround/25




2-1. 자서전, 송별회, 그리고 작품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의 자서전임과 동시에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다. 이야기로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내러티브들이 담겨있으며, 그것들은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한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미야자키 주변의 실존 인물을 투영했다는 것은 작품의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한편으론 송별회 또는 잔치 같은 것으로, 은퇴작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자신과 주변인들만이 즐길 수 있는 유희 차원에서 여러 요소들을 심어두었을 뿐이다.


  영화. 즉, 이야기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작품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의 이유가 현실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작품 안에서 시작되고, 작품 안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발단이나 결과가 현실과 지나치게 연관될 경우, 그것은 드라마도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 언저리의 이상한 것으로 변하게 된다. 다만, 수십 년간 작품을 만들어온 미야자키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했다 보기는 어려우며, 당연히 작품 내부적으로도 완결성을 갖도록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미야자키의 일기장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면,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은퇴를 앞둔 미야자키 자신의 커리어와, 감독으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자전적 에세이. 즉,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모두 독립적인 이야기의 주체이며, 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미야자키의 사적인 인간관계는 이해할 필요가 없다.             



2-2. 세 인물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마히토', '아오사기', 그리고 '큰 할아버지' | 하, 우, 좌

  그렇다면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바라볼 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미야자키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마히토', 조력자인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 그리고 '큰 할아버지'. 이 세 등장인물들에 중요한 상징들을 부여했다. 세 인물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며, 미야자키가 이 영화를 통해 밝히고 싶었던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상처             

미야자키 본인의 유년 시절             

관객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친구             

미야자키의 작품들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자             

그러나, 사라지기도 하는 존재             


'큰 할아버지'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보잘것없는 세계의 신             

미야자키 자신의 페르소나             

기성세대



2-2-1. 마히토

주인공 '마키 마히토'. 진실된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상처

미야자키 본인의 유년 시절             

관객들             

우리가 나아갈 방향             


  1942년, 도쿄에 살고 있었던 마히토와 그의 가족들은 도쿄 공습이 시작되며 혼란에 빠진다. 마히토는 이때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어머니를 잃고, 가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회상할 정도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전쟁 트라우마 때문인지 과묵하고 담담한 성격으로 자란 마히토는 아버지가 데려온 새엄마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등 의젓한 모습을 보이지만, 전학생인 자신에게 시비를 건 학우들이나 자신을 귀찮게 하는 왜가리 '아오사기'에게는 주저 없이 달려들 정도로 호전적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무구하고 나약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상처

마히토의 상처 (공식 가이드북 표지)

  마히토는 전학생인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고, 홀로 쓸쓸히 남겨진다. 이때, 그는 바닥의 돌조각 하나를 집어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찍어버리고는 피를 철철 흘린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쇼이치)와 새엄마(나츠코)는 피칠갑이 되어 돌아온 마히토에게 누가 그랬냐며 추궁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히토는 '혼자 넘어졌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전학생들이 괴롭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보복을 다짐하며 즉시 학교로 향한다.


  이후 이세계에서 젊은 모습의 뱃사공 키리코를 만났을 때, 키리코가 마히토의 상처를 발견하곤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자신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다고 말하며, 늪의 대장과 싸우다 생긴 흉터이고 늪의 대장은 자신이 잡아먹었다고 한다. 키리코가 마히토에게 상처의 출처를 묻자 그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반창고가 사라졌다'라고 둘러댄다.


  결말부에서 '큰 할아버지'가 이세계의 주권을 마히토에게 넘겨주려 하지만, 마히토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살던 현실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때, '큰 할아버지'가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을 쌓아 올리면 된다며 마히토를 설득하는데, 마히토는 그제야 상처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 이 상처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며, 그것이 악의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 돌을 만질 수 없다고 말이다. 결국 마히토는 현실세계로 돌아오지만,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이세계의 돌조각 하나를 집어 챙긴다.


  마히토가 스스로 상처를 만들고 그 상처의 출처에 대해 여러 번 번복하는 과정은,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스스로 상처를 만들고 피를 뒤집어썼던 이유는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들에게 혼자서는 대항할 수 없어 거짓을 꾸며내기 위함이었지만, 곧 그것이 거짓을 악의로 꾸며낸 것임을 인지하고 사실을 숨긴다. 그 다음번에 누군가 상처에 대해 물었을 때는 자신이 악의로 거짓을 꾸며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대충 둘러대지만, 결국 종장에는 자신의 악의를 인정하고 상처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작품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인물이며 마히토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키리코가 늪의 대장을 잡아먹었다는 것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해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머니(히사코, 히미)와의 극적인 재회

  비단 물리적인 상처뿐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던 마히토는 이세계에서 실제 그의 어머니인 '히미'를 만나 어머니가 없는 상처와 그리움을 일부 해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히미와는 같은 현실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히미는 마히토를 낳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고, 이 의지는 마히토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마히토는 결국 다시 어머니와 결별하게 되지만, 이전처럼 그리움에 잠식되어 스스로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은 어머니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직접 자신을 낳기 위해 주체적인 삶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리라. 또한 의젓한 듯 내색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사람이었던 새엄마(나츠코)를 '엄마'로 진심을 담아 부르는 모습 등,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상처들까지도 차근차근 받아들이고 바꿔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처란 마히토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상징이며, 미야자키는 마히토의 상처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당부한다. 상처란 타인에게 입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당연히 악의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상처 역시 자신에 대한 악의이라는 것. 그러니 자신 스스로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겠으며, 이미 가진 과거의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약진해 나가는 것이라는 미야자키의 당부라고 볼 수 있다.



미야자키 본인의 유년 시절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42년 도쿄 공습 당시의 실제 사진

  한편, 마히토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거나, 아버지가 군수업에 종사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미야자키 자신의 실제 유년기를 반영한 장면도 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은 동명의 소설로 그가 실제로 유년기에 어머니에게 받았던 책이다. 내용은 본작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지만, 그 소설에 영감을 받은 미야자키가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는 방식으로 해당 작품에 대한 존경을 드러낸 셈.


  또한 그의 아버지는 전쟁 당시 군수업자였으며, 미야자키는 아버지와 대립했을 정도로 그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아버지 덕에 유복한 생활을 지낼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었으며, 군용 장비의 디자인에 매력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등에서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작중에서 마히토가 아버지의 공장에서 저택으로 운반되어 오는 전투기의 캐노피를 보며 묘하게 고조되는 듯한 묘사가 존재하기도 한다. 때문인지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그의 과거 작품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전주의 등은 꽤나 힘 있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전쟁의 수혜자는 아닌지, 괴로운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

'돌과의 계약'으로 묶여있는 신.

  후술 하겠지만, 사실 미야자키 자신의 직접적인 페르소나는 마히토가 아니라 '큰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미야자키는 직업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이미 축퇴기에 이른 노인이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삶을 바꿔나가고 미래의 세계를 짊어지는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마히토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마히토의 작중 노선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 즉, 젊은이들이 마음속에 간직했으면 하는  것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유년기를 투영한 까닭은 정작 자신은 그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조 섞인 미련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 감독 자신이 끝내 못다 한 소명을, 앞으로의 세계를 짊어지고 나아가 줄 젊은이들에게 정중히 넘겨주는 것이리라.


  마히토는 '큰 할아버지'가 만든 세계의 상속을 포기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큰 할아버지'는 전쟁과 폭력이 가득한 세계로 돌아가도 괜찮은 거냐며 회유하지만, 마히토는 그런 가혹한 세계에 돌아가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찾을 것이라 대답한다. 곧 감독 자신의 세대가 일구어놓은 산물과 불합리한 것들을 수용하지 말고, 당신들만의 세계와 정의로 바꾸어 나가라 당부하는 셈.



2-2-2. 아오사기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 '아오사기'는 '푸른 왜가리'라는 뜻이며, 작중에서 이름은 불리지 않는다.

아오사기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친구

미야자키의 작품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자             


  전편에서 간단히 언급했듯,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영제는 <소년과 왜가리, The Boy And The Heron>이다. 애초에 제목이 <소년과 왜가리>인 것부터 그가 주인공의 친구이자 조력자 역할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으며, 작중 행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오사기에게서는 일반적으로 정당한 갈등과 해소를 통해 돈독한 동반자로 그려지는 '친구'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친구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불편하고, 징그럽고, 부조화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진심으로 마히토를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또 마히토를 속이지는 않을지, 그전에 마히토를 좋아하기는 하는 건지 헷갈린다. 이런 애매한 태도는 아오사기가 작중에서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미야자키가 '친구'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이 담겨있다.



친구

으르렁대는 마히토와 아오사기. 그러나 키리코는 이 둘을 '환상의 짝꿍'이라 부른다.

  아오사기는 포스터에서부터 위압감과 신비로움을 보여준다. 작중에서도 초반에는 고고하고 신화적인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감에 따라 추악하다 싶을 정도로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이 드러나며, 교활하고 어리석은 모습 또한 자주 보여준다. 심지어 생김새까지 극단적으로 못생겨지는데, 이러한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반전 요소들은 감독 미야자키가 의도한 것이라 추측된다.


  친구란 다양한 형태로 처음 만나지만, 그들을 알아가고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찰을 겪게 된다. 다투거나, 싸우기도 하며, 심지어는 갈라서기도 한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우리들의 본모습을 마주한다. 처음 만났던, 혹은 상서롭게 지내던 시절과는 다른 날 것의, '못생긴' 내면을 보기도, 보여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작중에서 아오사기를 묘사하는 말들은 '어리석은 새', '엿보기를 좋아하는 새'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친구 사이에서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다툼과 관음에 대해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아오사기의 생김새

  아오사기가 종종 왜가리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어떻게 했던지 기억나는가?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을 꿀꺽 삼키는 것처럼 못생긴 얼굴을 몸속으로 밀어 넣으며 왜가리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는 우리가 그런 못생긴 내면들을 삼켜내고 끝내 친구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모습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작품에서 동료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는 모습들은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친구의 가치를 나타내는 순진무구한 표현이었다면, 아오사기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모습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현실적인 친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리라.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가증스럽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삶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이자 조력자 말이다.


  작중 아오사기는 마히토를 꿰내어 이세계로 인도하는데, 이세계로 마히토를 인도하기 직전, 그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이때 마히토의 화살에 부리를 관통당한 아오사기는 힘을 일부 잃어버려 왜가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못생긴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이세계의 규칙 상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준 사람이 그 상처를 메워주어야 했으며, 결국 마히토의 도움으로 힘을 회복하기도 한다. 친구 사이에서 상처를 주고받고, 그 상처를 다시 회복시켜 주기도 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어쨌거나 이렇듯 애증의 친구로 묘사되는 아오사기의 진심에 대해 작품은 이미 답을 내어놓았다. 아오사기가 현실세계에서 사라질 때, 마히토에게 "잘 있어라, 친구야."라고 말하기 때문. 아오사기는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며 그를 '단나(だんな, 나으리 정도의 의미)'라고 부르거나 하지만, 그가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는 '친구'라 부른다. 주인의 명에 따라 혈족인 마히토를 안내하는 시중의 역할로 처음 만났지만, 결국에는 같은 눈높이의 친구로서 사라져 간 셈.




미야자키의 작품 /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자

마히토와 다투는 아오사기

  한편, 아오사기는 미야자키의 작품 그 자체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브리와 미야자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작품이 어딘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외지인으로써 배척받았던 '아시타카'가 숲으로 모험을 떠나 결국 재앙신을 물리치고 사슴신에게 머리를 돌려주며 평화를 가져온 <모노노케 히메>의 이야기. 정체를 알 수 없는 테마파크에서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고 고난을 겪지만, 결국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현실로 돌아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이야기. '거신병'을 전쟁에 이용하려는 세력에 맞서 '오무'들을 설득하기 위해 숲으로 향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작품마다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유사하다. 사연 있는 주인공이 신비한 이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찾게 되는 이야기다. 물론 신비롭고 매력적인 조력자들도 필수다. 미야자키는 지금껏 비슷한 방식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상상력으로 빚어진 각각의 세계들로 관객들을 초대해 왔다.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 설레는 모험, 그 두근거리는 경험 뒤에 숨겨져 있던 삶의 가치. 그러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보여줬던 반전주의, <모노노케 히메>에서 애니미즘을 통해 보여줬던 자연과 만물에 대한 보전의식,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여줬던 탐욕과 자본에 대한 경계 등. 미야자키가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가치관들은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미야자키는 이번에도 이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했다. 아오사기가 마히토를 이세계로 인도하는 장면은 미야자키 자신이 관객들을 작품 속 세계로 인도했던 일들을 반추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전작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마히토가 이세계로 향하는 과정이 전혀 설레거나 고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히토가 이세계로 향했던 까닭은 아오사기가 그의 새엄마인 나츠코를 납치했기 때문이며, 마히토에게 죽은 어머니의 환영을 보여준다거나 마히토를 조롱하는 등 그 방식이 다소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거기다 이세계로 진입하는 모습이 마치 찐득거리는 늪에 서서히 침잠되어 가는 것처럼 묘사되는 점. 마히토가 당도한 이세계의 모습은 왜곡된 욕심이 가득했고, 아름답지 않았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즐비했던 점. 키리코가 아오사기에게 왜가리(작품들)는 모두 거짓말쟁이라 말하는 점. 그리고 이세계가 맞이하는 파멸적인 국면 등을 미루어 봤을 때, 어쩌면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관객들을 안내했던 그 세계들에 대해 자조 섞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오사기와 마히토가 무너져가는 이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빠져나올 때, 마히토는 바닥에 있던 돌조각을 하나 챙겨 나온다. 원래라면 현실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저쪽 세계의 일들은 잊어버려야 하지만, 마히토는 즉시 잊어버리지 않았고, 아오사기는 그것이 마히토가 챙겨 온 돌조각 때문인 것을 알아차린다. 마히토가 챙겨 온 돌조각은 미야자키의 작품들 속에서 관객들이 간직하고 있을 무언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오사기는 그 돌조각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결국 저쪽 세계에서의 일들은 서서히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공식적인 감독의 은퇴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얻었기를 바라는 마음도, 반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서서히 잊힐 것이라는 관망도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암전이 되며 아오사기와 마히토가 나눈 마지막 인사 장면은 그 대사 자체로 관객에게 직접 건네는, 미야자키의 애정 섞인 마지막 인사인 것.



2-2-3. 큰 할아버지

이세계의 신 '큰 할아버지'. 아오사기와 마찬가지로 이름은 불리지 않는다.

큰 할아버지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미야자키 자신의 페르소나             

기성세대             


  큰 할아버지는 작중에서 마히토의 실제 고조부이며, 마히토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의 원흉이자 이세계로의 입구인 서채(탑)을 지은 사람이다.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이세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자신이 노쇠함에 따라 적절한 후계자인 마히토를 안내하기 위해 아오사기를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미야자키 자신의 페르소나

미야자키 하야오

  마히토의 해석에서 언급했듯, 미야자키의 페르소나는 큰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엄밀히 따지자면 마히토는 유년기의 자신과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나갈 젊은이들(관객)을 동시에 투영하고 있지만, 미야자키 본인은 마히토처럼 생각하고 싶어도 이미 나이가 들었기에 그 미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바라는 바가 마히토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며, 자신의 현재까지의 삶에 대한 자조가 큰 할아버지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결말부의 전개에서 그가 이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방법이 소묘 도형처럼 생긴 돌조각들로 탑을 쌓아 올리는 행위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한눈에 봐도 물리법칙을 무시한 것처럼 매우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자신의 작품으로 쌓아 올린 세계와 자신이 정의하려 했던 가치관 등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탑과 다를 바 없다는 은유로 보인다. 미야자키 자신의 작품들로 쌓아 올린 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신이었으며, 각각의 세계는 다르게 생겼으면서도 비슷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쌓아 올리는 것. 즉,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는 것만이 자신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앵무새 대왕이 난입하고, 이런 보잘것없고 하찮고 말도 안 되는 일로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니, 앵무새 대왕은 분노하여 돌조각들을 반으로 쪼개버린다. 작품으로 쌓아 올려 유지하던 세계는 박살이 나버리고, 후계자로 삼기 위해 데려왔던 마히토도 현실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큰 할아버지는 이후의 어떤 행보 없이 그대로 사망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마 이 일련의 과정은 미야자키가 실제로 자신의 후계자를 찾는 데에 난항을 겪었고 현재까지 공석이라는 점을 은유한 것일 터이며, 동시에 자신이 지금껏 만들었던 작품에 대한 회의와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큰 할아버지의 실체이자 이세계가 유지되는 방식이 사실 위태로운 도형 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 앵무새 대왕이 느꼈을 분노와 허탈함 등이 바로 미야자키가 지금껏 자신이 만들어온 작품들을 바라보는 자조 섞인 비판인 것이다.



기성세대

우크라이나 전쟁 11개월째, 출구 안보이는 치킨 게임 | 2023-01-27 02:55, 한겨레21

  당연히 이 큰 할아버지라는 캐릭터에는 세계의 '신'이라는 위치에 서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도 함께 녹아있다. 큰 할아버지의 이세계로 통하는 입구가 된 서채(탑)는 빈 땅에 지어진 건축물로 보였으나, 사실은 하늘에서 떨어진 기묘한 운석의 주변을 감싸 건축물을 지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더구나 그 운석이 지구에 떨어지던 날, 지면과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폭발 장면은 마치 핵폭발처럼 묘사되고 있다. 서채의 건축이 시작되며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들 때문에 수 백명의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하며, 또한 이세계에서도 큰 할아버지의 서채와 비슷한 탑 형태의 건축물이 발견된다. 히미는 그 건축물에 대해 어느 세계에나 존재하고, 발견된다고 말한다.


  미야자키는 늘 반전주의를 작품에 담았으며, 마히토 문단에서 설명한 것처럼 전쟁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운석의 낙하는 당연히 많은 사상자를 동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할아버지는 흉물이라 생각해도 모자랄 운석을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운석을 감싸 서채를 짓는다. 그리고 운석의 저주처럼 서채를 짓다가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된다. 운석이 떨어지고 서채가 지어지는 과정은 전쟁과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판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전례 없는 재앙이 닥쳤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며, 결국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게 만들 것이라는 공격적인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마히토의 선택을 보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미야자키는 큰 할아버지를 통해 반전주의뿐만 아니라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 온갖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풍자하고, 그 바통을 마히토(관객)에게 넘겨주는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큰 할아버지는 작중에선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쳐버렸고, 서채를 짓고 나서 실종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지식(책)이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들을 해석해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큰 할아버지는 현실에서 서채 속 이세계로 도망쳐버렸고, 그곳에서 지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단들로 세계를 다스리려 했으나, 결국 그마저도 '돌과의 계약'에 묶여있는 시한부적 신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마히토는 큰 할아버지의 세계에서 보잘것없는 신이 되는 대신, 현실세계로 돌아가 한 명의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2-3. 작품에 담긴 메시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 세명의 상징과 페르소나 등을 알아보았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한 명의 기성세대로써 살아왔던 삶에 대해 반추하고, 그것들을 곱씹어보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주역들에게 건네는 주체적인 삶에 대한 당부인 것이다. 문장으로 표현해 보자면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묻는 것. 이 대목에서 제목의 의미도 유추가 가능하다.


  반면 해석되지 않거나 해석이 불가능한 상징들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아오사기의 일곱 번째 깃털이 약점이라거나, 큰 할아버지가 이세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조각을 사흘에 하나씩 열세 번 쌓아 올리는 일 등이다. 큰 할아버지의 돌조각은 미야자키가 지금껏 감독/각본을 모두 만들어낸, 그러니까 미야자키 본인의 순수 창작물의 개수가 열 세 작품이며, 그 연도를 모두 합쳤을 때 3년에 1회 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전편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에는 미야자키 본인과 그 주변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폐쇄적인 유희가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여러 번을 관람하고 미야자키의 현실세계까지 탐구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상술했듯 이야기의 완결성은 이야기 안에서 끝나야 하며, 미야자키 본인도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작품을 만들었기에, 현실 인물과의 관계를 모른다 하더라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큰 할아버지가 '돌과의 계약'에 묶여있던 것은 미야자키의 동료이자 상사였던 타카하타 이사오와의 관계를 은유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이 이야기를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는 상관 없거나 다른 의미로 다가오듯 말이다.


  미야자키의 은퇴작이란 지브리의 팬덤들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하거나 지브리의 작품들을 탐구하는 관객이라면 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매 번의 관람마다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마르지 않는 팬 서비스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토록 반복해서 소비되길 바라는 미야자키의 마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작품 외적 요소들 외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상징들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왜 유독 새들이 많이 등장할까?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가 상징하는 존재들은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는, 내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흥미롭다고 여겼던 상징들에 대해 해석해보고자 한다.




1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왜 난해한가? https://brunch.co.kr/@minigoround/25

3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왜 새가 많이 나올까 https://brunch.co.kr/@minigoround/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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