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어른
붙잡고 있는다고 능률이 좋아지는 게 아니야.
찢어놓은 근육도 회복해야 커지는 것처럼,
저녁이 있어야 그 사람의 내일도 있는 거야.
- 어느 귀인
아버지가 없는 내게, 남성들은 낯선 존재다. 말실수를 하면 안 될 것 같고, 조금이라도 밉보였다간 큰일 날 것 같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친절하고 살가우며, 같은 남성에겐 엄중하고 공명정대하다. 모든 남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남성이 어른이 되어가며 얻는 동력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아버지가 없다면, 그에 준하는 어른이 존재해야 마땅할 일이다.
내겐 서툴게 따라 할 존재도, 모방할 그림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부재는 온전한 침묵으로 형성되어 갔다. 그저 미움받지 않기 위해, 말과 행동의 범위를 하나 둘 줄여가다 마침내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는 일종의 관계적 죽음. 나는 식물인간을 택했다.
사실, 식물인간이 될 것까지는 없었다. 그저 식물인간이 되지 않는 이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식물인간으로 지낸 지 몇 년째 되어가던 날. 문득 귀인이 찾아온다.
직장에서, 특히 중간기의 커리어에서는 자신의 업무 능력을 객관화하기 어렵다. 다양한 환경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전부인 양 받아들이기 쉬우며, 잘못 습득한 지식도 진리로 생각하기 쉽다. 따스한 온수를 맞으며 한껏 자만하는 이들과, 얼음물을 맞은 표정으로 서서히 얼굴을 굳혀가는 이들로 이 시기의 우리들은 나눠진다. 그들에게는 어른이 필요하다. 명쾌한 지식을 전수해 주고, 그의 방식 너머로 삶의 가치관을 엿보이며, 불합리한 요구들에 대신 나서 분개하며, 저녁 이후의 삶이 실존하고 있음을 믿는 그런 어른 말이다.
아아, 비상한 귀인들이 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이따금씩 귀인들을 마주한다.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 사람, 삶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 그런 이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후광이 보인다. 마치 매혹하듯, 그들은 뒤로 가고 있던 우리를 알 수 없는 인력으로 조금씩 끌어당긴다. 하찮은 풍토와 분위기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에게 이끌려간다. 그가 이단아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간다.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 누구나 그를 사랑하며, 올려다보며,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는 나보다 나이 들었음에도, 나보다 젊었다. 그는 리더가 아니었음에도,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한 달여간의 짧은 시간 동안, 부서의 정신적 유대와 그 근간은 뿌리째 흔들렸다.
어른이다. 어른이 분명하다. 나는 두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가 뜨며 그를 바라봤다. 몇 년 만에 등장한 어른의 모습에 나는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종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에게서 안정을 느꼈다. 그에게서 안도를 느꼈다. 그에게서, 거절할 수 없는 의지의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빠르게 사라진다. 귀인은 바쁘다.
귀인이 떠난 자리는 공허하다. 모든 것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귀인의 존재는 점점 잊혀간다. 귀인을 바랐음은 잘못이었을까. 귀인 없이는 온전하지 않다 느끼는 것은 나약함일까. 귀인들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말인즉, 여전히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 나와 달리,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기이하게도 그들이 가진 어른의 냄새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고찰이 아니라,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라는 강력한 눈빛과 태도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들을 빛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스며드는 물결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른이란 색을 가져야 한다. 힘이 아닌 색. 어떤 색조를 가졌든 그 색 하나 뚜렷한 것만이 중요한지 모른다. 희여 멀건 민들레 홀씨가 우리를 홀리지 못하는 것처럼, 어른이란 다만 형형색색의 분분한 꽃 같은 것인지 모른다.
식물인간인 내게도, 그런 꽃이 피어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피어나던 어느 날, 나는 한 손으로 뿌리를 뽑아들고 일터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