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들의 방식을 엿보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모든 여정을 알면서도, 그 끝을 알면서도,
I embrace it and welcome every moment.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맞이하지.
- 영화 <컨택트> 중에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렸던 나와 형은 생경한 장례식장의 풍경에 압도되어 울 정도는 아닌 침울함에 잠겨 어머니의 검은 상복 치맛자락만 쥐고 있었다. 마치 목청을 부수려는 듯 울부짖는 일부의 외가 가족들과, 조신히 예를 갖추어 외할아버지의 영정에 추도하는 이들이 번갈아 눈에 비쳤다. 생전 외할아버지와 남남처럼 지내던 외할머니도 눈물을 보였다. 그날 장례식장에 있었던, 내가 아는 어른들의 모습은 평소의 모습들이 아니었고, 하나같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배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막연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뿐일 때의 나에게 그 현장의 경험은 다른 의미의 습득이었다. 다만 한 사람의 죽음이 남겨진 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바꾸는지 그저 목격할 뿐이었다.
부고날의 늦은 저녁, 조문객들이 한산해진 틈을 타 외가친척들과 어머니 등이 모여 앉아 늦은 끼니를 챙긴다. 외가친척들에게 미움받던 어렸던 나는 당연한 듯 함구한 채 입에 밥만 밀어 넣을 뿐이었으나, 그들에게 사랑받던 나의 어린 형이 약간은 역정을 내며 그들에게 질문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웃고 떠드는 거예요?" 식사 후 '고스톱'을 치며 오후의 피로를 털어내던 외가친척들에게 나의 어린 형이 쏘아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하는 거야." 이윽고 이모들을 비롯한 어른들이 형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했으나, 나의 어린 형은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어린 형은 딱히 갈 데도, 바람을 쐬지도 않을 거면서 자리를 비워 어디론가 가버렸다. 대답 않고 자리를 뜨는 나의 어린 형을 바라보며, 외가친척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화투에 열중했다.
누구나 어릴 적엔 막연하게 죽음에 대해 고찰해 본 적이 있다. 죽음 이후엔 그 어떤 것도 없는 허무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면 잠을 설치거나 애틋한 부모의 품으로 향하곤 했으리라. 사춘기가 찾아오고 자아가 형성될 무렵, 죽음이란 약간 아름다워진다. 하지만 죽음을 원한다는 생각 까지는 미치지 못한 채, 미숙하게나마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하고는 얼렁뚱땅 성인의 문턱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나는 이 얼렁뚱땅한 시간에 돌연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겪은 이들의 변화를 유심히 살펴본 적 있다.
그중 몇 가지 말하자면, 첫 번째로 대학 시절 같은 문하생이었으나 다른 분반에서 공부하던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모친이 지병으로 병사했는데, 당시 나는 물론 그 분반에서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이들 조차 그녀의 모친이 지병을 가졌으며 병세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충격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조문이 이어졌다. 나는 그녀와 딱히 마주 보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친하지 않았기에 조문하는 대신 그녀의 장례식장에 가는 친구에게 조의금을 맡겼다. 그녀가 장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온 날, 나는 그녀가 평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조금 웃고 다니는 모습에 놀랐다. 그래서 분명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리라 지레 짐작 했다. 이후 그녀와는 별 연관 없는 삶이 이어지며 시간이 흐르고, 나는 어느 날 그녀의 친구로부터 그녀의 장례식 동안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심각한 우울에 시달렸다. 정신과에 찾아 진단과 약을 받기도 했고, 때 아닌 감정에 여러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녀가 평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조금 웃고 다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그때 그녀를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들이 자조적으로 그 뒤를 이었다.
두 번째로 나의 친구가 있었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웠다. 어느 날 그의 강아지가 노쇠하여 죽었는데, 나는 지금도 녀석의 강아지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 언제 그 강아지가 죽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녀석은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녀석과 내가 단 둘이 오묘한 평일 저녁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문득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겪은 이들의 삶이 변곡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고, 내 얘기를 듣자 녀석은 그 강아지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지금까지 녀석의 주변인 가운데 어떤 이가 돌아가신 바는 없었으나, 녀석은 그 강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이 바뀐 것 같다 했다. 녀석은 강아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끝내 이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겠다고 말했다. 죽음의 무게를 물은 나에게 강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녀석에게 다소의 가소로움을 느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강아지를 잃어본 적이 없으니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싸움이 날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니나, 직장 생활 동안에 주변인의 죽음을 맞은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직장인이란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 가까운 집단이다. 매일 문자 메시지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연거푸 오르내린다. 직장인들에게 죽음이란 일종의 품앗이다. 결혼을 품앗이라 말할 수 있다면 이 표현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실제로는 첫 번째 이야기의 여성처럼 미시적인 그들에게야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그 삶 가운데 지속되겠지만, 나를 비롯해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의식일 뿐이다. 주말까지 가리지 않고 전해지는 누군가의 죽음은 다소 피곤하게 여겨질 정도이며, 고인이 상주의 빙부 혹은 빙모인 경우에는 그 조문이 일종의 인사치레로 취급되기도 한다. 한 편,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자격 취득이나 결혼 같은 경사들을 사내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글을 올리는 풍조가 있다. 어느 날은 모친상을 당한 동료가 조문에 감사하다는 글을 썼는데, 머지않아 그 위로 각종 이모지와 특수문자가 낭자한 자격시험 합격 축하와 결혼 축하 게시물의 제목들이 짓누르듯 그 위를 차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자리에서 눈을 흘겨 그의 화면을 바라보았는데, 우연히 그 또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단지 마우스를 쥐고 있었을 뿐, 어떤 움직임도 없이 한참이나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곧 바쁜 일이 생겨 그 뒤로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 화면을 보고 있었던 것조차 잠깐 지나가며 본 것인지 아니면 골몰히 쳐다보며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뒤통수가 짓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러 이들을 보며, 나는 일단은 의연하게 평소와 다름없이 나타나 웃음을 보이는 이들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각자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소개하지 않았을 뿐 어른의 모습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죽음 또한 본 적 있으며, 내가 겪게 될 죽음이 그들의 죽음과 같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런 죽음들과 거리가 먼 삶의 한가운데 있다. 죽음은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자면,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어른의 모습을 엿보려는 시도를 멈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일종의 사랑이기에, 나는 그 방식에 참견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죽음의 의미는 죽은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당한 자들에게 있다. 어떤 이의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어 남겨진 이들에게 기필코 떠 안겨진다. 어쩌면 그것이 죽음과 가까워진 이들이 진정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