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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Jul 23. 2021

이 꽃, 가지실래요?


낮 동안 지역 곳곳의 농장에서 출하된 꽃은 그날 자정 꽃시장에 모였다가 중간 도매상, 그리고 직접 시장을 찾는 플로리스트들에 의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꽃집으로 흩어진다. 생산지인 농장에서 소매점인 꽃집에 이르기 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셈이다. 꽃은 시시각각 상태가 변할 수 있고 특히 땅에서 잘려진지 3일이 지나면 아무리 정성스레 돌본다 하여도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대부분 잃게 된다. 물론 그 후로도 일주일 정도는 족히 살 수 있지만 값을 치르고 누군가에게 판매할 수 있을 만큼의 상태는 되지 않는다. 때문에 플로리스트는 이를 잘 계산하여 꽃을 들여와야 한다. 하지만 꽃이 지천으로 널린 꽃 시장은 그야말로 플로리스트에겐 눈이 휙휙 돌아가는 천국 같은 곳이다. 새벽마다 이 곳을 찾는 것이 고되고 힘들어도 새로나온 꽃을 보거나 상태가 싱싱하게 그지 없는 꽃들을 만나면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흥이 나서 사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꽃을 꼭 필요한 만큼만 백퍼센트 데려 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쓰다보면 상태가 나빠져 버리게 되는 경우나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 오는 것에 대비하여 백십퍼센트 정도로 항상 약간의 여유를 둘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유, 게다가 생각 보다 꽃이 팔리지 않았다면 이 양까지 더 해 모두 재고가 된다. 그리고 이 재고를 처리 하는 방식은 손님들께 꽃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덤으로 드리거나 주변에 나누어 주거나 강제적으로 나를 위해 집에 가져가는 것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를 흔히 ‘로스loss가 났다.’라고 표현하는데 초보 플로리스트에게는 무수히 겪게 되는 시행착오이며, 경력이 오래 되었다고 한들 다시는 없을 실수도 아니다. 그저 꽃집에서는, 플로리스트에게는 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웨딩 플라워를 하면서 부터는 주말에 예약되어 있는 건 들에 대해서만 꽃을 주문하면 되기 때문에 이 ‘로스’가 많이 줄게 되었다. 하지만 주문 시에 더하기 빼기를 잘 못해서 혹은 예뻐 보이는 꽃을 즉흥적으로 더 사는 바람에 여전히 로스는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로스가 생겼다는 것은 주변에 선심을 쓰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여분의 꽃을 포장지에 둘둘 말아 자주가는 카페나 근처 동네 책방에 드린다. 과하게 포장을 하지 않는 이유는 혹시라도 받는 쪽에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마디로 시크하게 전해 드리려는 의도다. 이렇게 전달 된 꽃은 종종 시원한 얼음이 띄워진 아메리카노 한잔이 되어 다시 돌아오곤 한다. ‘로스loss’는 잃었다는 뜻이지만 이는 비단 장부 상의 수치일 뿐 그것은 물건으로 혹은 마음으로 반드시 되돌아 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잃음이 아니라, 얻음. gain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남은 꽃을 나누고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이 줄 수 있는 기쁨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의 경험은 공간을 뛰어 넘어 어디서건 동일했다. 그곳이 지구 반대편이라도 말이다.

지구 반대편, 런던에서 플로리스트로 일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녹록치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이야 차치하고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쉽게 적응키 어려웠다. 다행인 점은, 그곳에서도 팔 수 없는 꽃은 언제나 플로리스트가 ‘알아서' 처리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든 영국에서든, 아니 세계 곳곳이라 할 지라도 지역과 나라에 상관없이 ‘꽃집'이라는 공간만 같다면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플로리스트의 하루 루틴 중 가장 마지막은 쓸 수 있는 꽃과 그렇지 않은 꽃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삼일 쯤은 더 판매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꽃들은 다시 다듬어 깨끗한 물통에 옮겨 담는다. 그러기 어려운 꽃은 폐기 되거나 이를 어여삐 여기는 플로리스트의 퇴근길에 동행하여 그의 집에서 며칠 더 머물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꽃을 쉽게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 나 역시 하루 일과를 마칠 때면 나에게 허락된 양 만큼의 꽃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온기 잃은 나의 방을 데워 주기엔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실은, 꽃을 챙겨 오긴 했지만 나의 방 화병에 꽂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는 도중에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살았던 동네는 주거 환경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민자, 노동자, 가난한 유학생 그리고 꿈을 쫓아 모여든 이들이 칸칸이 방을 얻어 지내는 곳 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집과 집 사이의 벽은 낮았고 사람들은 소탈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낯 익은 얼굴들에게 일터에서 챙겨온 꽃들을 나누는 것은 소중한 재미다.

첫 시작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비슷한 시간에 꽃을 들고 걸어가는 동양인 청년은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들은 빤한 눈으로 나를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꽃을 번갈아 보았다. 궁금했을 것이지만 쉽게 말은 걸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타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 역시 거리에 익숙해 질 때쯤, 두 어번 길에서 마주친 안면이 있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 왔다. 꽃이 예뻐서, 이 근처에는 꽃집이 없는데 어디서 샀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지 않았어요. 저는 꽃집에서 일해요. 플로리스트입니다. 원하신다면 드리고 싶어요.’

어쩌면 나도, 동료 이외의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영어를 정성스레 말하고는 그에게 꽃을 안겼다. 잠시 놀라는 눈빛의 그녀는 정말 그래도 되는지, 놀라움과 고마움의 말을 연거푸 담아 내었다. 그리고선 나를 안고는 내 등을 쓸어 주었다. 아, 이것이 바로 허그hug구나. 이러한 표현이 익숙지 않아 조금은 놀라웠지만, 좋았다. 그리고 그 ‘좋음’이란 단순히 하나의 이유가 아닌,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이 함께 뭉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금전적인 대가를 취하고 꽃을 판매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날 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낮의 일을 떠올리며 했던 생각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곳에 오길 잘 했구나 그리고, 이 일을 하길 잘 했구나.’

이후 부터는 꽃을 가져가도 될 기회가 생기면 빼 놓지 않고 꼭 챙겨왔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낯 익은, 혹은 낯설더라도 꽃에 관심을 보이는 누군가에게, 자주 가는 케밥집 점원에게, 단 한번도 신문을 산 적은 없지만 가판대를 운영하는 어떤 이에게 주었다. 그것은 다시 고마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포옹으로, 꾹꾹 눌러 담겨진 케밥으로 돌아왔다. 꽃을 가져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줄 기회를 놓쳐 내 방에 꽂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서운한 일 이었다.

오래 전, ‘미스터 플라워'라는 영화가 있었다.(원재 Bed of roses, 1996) 영화 자체는 당시에 유행하던 로맨틱 드라마의 클리셰를 따르므로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지루하거나 진부하게 다가 왔을 수 도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꽁꽁 담겨진 장면들이 있다. 뉴욕이라는 삭막한 도시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남자 주인공은 틈틈히 모르는 이들에게 꽃을 나눈다. 실의에 빠진 사람도, 문 조차 쉽게 열어주지 못하는 경계심 많은 사람도, 그가 내미는 꽃을 보면 모두 표정이 밝아 지며 마음을 연다. 영화를 관통하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중간 중간 영화에 비쳤던 주인공의 직업으로 인해 몇 번이나 돌려 보았던 영화이다. 이제 나는 플로리스트가 되어 영화 속 주인공 처럼 주위의 이들에게 꽃을 나눈다. 물론, 진짜의 삶이 영화와 같을 수는 없다. 플로리스트라고 해서 늘 행복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 남녀 간을 오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남자 배우 보다 잘생기지 못했다. 하지만 거짓이 아닌 건, 꽃을 받아든 사람들의 표정이다. 꽃을 안겼을 때 불쾌하게 받아들 이는 없다. 영화 속에서 꽃을 받았을 때 환하게 표정 짓던 배우들의 연기는 연기가 아닌, 곧 실제의 표정들이다. 사람들의 그러한 표정을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긴 시간 이 일을 해오며 스스로를 지치지 않게 만들어준 칭찬 같은 것이다.

오늘도 보아하니 꽃들이 남을 것 같다. 아무렇게나 포장지에 둘둘 말지만 이 것이 꽃임을 알 수 있게 꽃 머리 쪽은 낙낙히 여유를 둘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중에 누구와 마주치게 될지 기대해 본다. 만약 누구라도 꽃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이렇게 말해 야지.

저는 플로리스트예요. 이 꽃, 가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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