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은 해바라기 일 거예요. 주로 노란색 배경으로 그려진 해바라기 연작들은 고흐의 생애처럼 정열적이게 다가 옵니다. 반면 태양만 바라보다 강한 빛에 바스라지는 해바라기가 마치 고흐 자신인 것만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애써 고흐하면 떠 오르는 꽃으로 이것을 꼽습니다.
아몬드 꽃이예요.
고흐는 흔히 '아를시대'라고 하는 1888년 2월 부터 그가 죽은 1890년 7월까지 약 2년 반의 시간 동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그가 가장 의지하는 혈육이자 영혼의 단짝이라 하는 동생 테오에게 미주알 고주알 일상을 편지로 남겼기 때문에 그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랍니다. 특히 이 만개한 아몬드 꽃을 그린 그림은 1890년 2월. 고흐가 테오의 득남 소식을 듣고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선물로 그린 것이라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겠죠? 게다가 테오는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빈센트'라고 짓습니다. 고흐는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 어느 때보다 정성들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를시대는 고흐가 작품 세계를 완성해 가는, 그의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뜻깊었던 시기라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생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불행한 시기라고 볼 수도 있어요. 이 그림 역시 그의 정신병 증세가 극에 달해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랍니다.
1888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고흐는 고갱과의 언쟁중에 자신의 귀를 자릅니다.(고갱이 펜싱검을 휘둘러 실수로 잘랐다는 설도 있어요.) 고흐는 잘려진 귀의 부분을 알고 지내던 매춘부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하며 마을은 일대 난리가 납니다. 이후 마을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버린 고흐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과 자신의 의지로 1889년 5월 셍 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모솔(Saint paul de Mausol)' 요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그는 이 곳에서 상태가 많이 호전됩니다. 그의 그림 역시 다소 안정된 상태를 보여주듯 붓꽃, 아몬드 꽃, 사이프러스 나무 등 요양원 안팎과 그의 병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자연과 풍경을 주제로 그려지게 됩니다.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은 요양원에서 그렸던 그림 중 일대역작으로 꼽혀요. 그리고 이 시기의 그림들에는 고흐의 시그니쳐 컬러라 할 수 있는 '노랑' 보다 푸른색이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역시 많다는 점인데요, 잘 알려진 대로 '우키요에'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목판화 기법으로 고흐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어요. 아몬드는 잘 알지만 아몬드 꽃은 너무나 생소하잖아요. 고흐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아몬드 꽃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아몬드는 흔히 땅콩과 같은 견과류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장미과에 속하는 아몬드 나무의 열매입니다. 중동 지역이 원신지로 지중해를 따라 남부 유럽으로 전해졌어요. 고흐가 지냈던 프로방스 지역 역시 이 곳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흐는 아마도 쉽게 아몬드 나무를 보았을거라 생각됩니다. 특히 다 자란 아몬드 나무는 높이가 무려 10m에 달하기도 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띄였을 거예요.
언뜻 우리에게 친숙한 벚꽃과 그 생김이 비슷한 아몬드 꽃은 여느 과일 나무 보다는 일찍인 2월 경 부터 꽃을 피웁니다. 이른 봄을 알리고 열매를 맺어주는 고마운 나무인 만큼 희망이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기도 해요.
조카의 탄생이 1890년 1월 31일 이었으니 테오로 부터 소식을 받았을 즈음에는 이미 아몬드 꽃들이 개화를 시작했을 거예요.
아직은 찬 공기가 고흐의 병실에 무겁게 내려 앉았있을 때, 동생 테오에게서 전해온 조카의 탄생 소식은 온전치 않은 고흐의 몸과 마음에 다시금 희망과 용기를 불러 주었을 거예요. 홀로 병실을 서성이며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 사랑스런 조카에게 어떤 선물을 해 줄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하며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기로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아몬드 꽃을 그리는 것이예요. 환희에 찼을 고흐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몬드 꽃은 고흐가 생애 마지막으로 본 것이 됩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린 해 7월. 고흐는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도 고흐의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요. 조카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염원대로 건강히 잘 자라 주었고 이 그림을 네덜란드 암스텔담의 반고흐 미술관에 기증함으로 자신에 대한 삼촌의 애정을 길이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