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은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게 좋았다. 연기처럼 어디로든 흩어지다가 마침내 한 점으로 모여드는 일관성, 지구력, 관성 같은 게 좋았다. 현실이라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들을 넘나드는 과감함이 좋았다.
현실의 정윤이라면 넘어보겠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없는 장애를 글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처럼 느껴졌다.
정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단으로 친구들을 많이 모았다. 단어를 모으고 문장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친구들을 수집했다. 국민학생 시절에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고 중학생이 되자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친구들 사이의 중심에 섰다.
정윤은 주목받는 것이 어색했지만 자신이 아닌 자신의 글이 주목받는 것에는 쾌감을 느꼈다.
정윤이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윤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밥을 빌어먹고 사는 직업은 직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정윤은 글과 돈을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제야 글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정윤은 글을 팔기 시작했다. 한 장에 백 원씩, 정윤은 금방 만원을 벌고 십만 원을 벌었다. 친구들이 돈을 내지 않고 소설을 돌려보다가 정윤에게 들켜 크고 작은 다툼이 있기도 했다. 정윤은 만약 자신이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글을 다루는 일이어야 한다고 확신했기에 글을 돈과 교환하는 데에 있어 필사적이었다.
정윤이 십 대 후반이 되자 인터넷 소설로 큰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 십 대들이 출현했고 정윤은 혼란스러웠다. 정윤이 가장 잘하는 것은 글쓰기였지만 그 누구보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괜찮은 글을 보고 나면 조바심이 났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데에서 오는 절망, 그러나 이것 아니면 다른 것은 아주 없다는 절박, 그래서, 그래도 이게 가장 나은 선택이라는 희망.
그때부터 정윤은 글을 생각하면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의 반대로 국문과에 원서를 낼 수 없었던 정윤은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고 사범대에 진학해 한동안 글을 잊고 살았다. 글을 내세우지 않아도 친구를 사귀는데 어려움이 없어진 정윤은 쾌활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짧은 일기 형태의 글을 쓰는 것조차 모두 그만둔 정윤은 이제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겨울 새벽 2시.
잠에서 깬 정윤은 노트북을 열고 앉아 하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예고도 없이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화면 속엔 어떤 시인의 말처럼 공포만이 정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공포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정윤은 겨우 한 문장을 썼다.
상처 주지 않기에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아.
한 문장으로 인해 정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정윤이 지금까지 한 글자도 쓰지 않은 것은 책임감의 문제였다. 한 글자를 쓰기 시작하면 한 문장을 써야 했고, 한 문장을 쓰면
한 문단을 써야 했다.
그렇게 한 권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나면 작은 성취감 뒤, 오래 남는 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불쾌감, 자괴감, 조바심, 비교열위 같은……. 그래서 정윤은 완성한 글을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다. 수정하고 퇴고하지 않았다. 정윤의 책임감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식물인간 같은 글을 내놓고 나면 거기서 끝이 났다.
찢어버릴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는 몇 권의 전작 파일들을 불러내 읽다가 정윤은 노트북을 덮었다. 어린 시절의 일기 같은 것이라 해도 참혹한 수준이었다.
날이 밝으면 이 새벽의 한 문장을 다시 후회할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끔은 포기하는데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가는 일들이 있는 것 같다.
다음 해 봄, 정윤은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 돼 작가로 등단했다.
당선의 기쁨을 누리기 이전에 타인이 자신의 글을 읽었다는 것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정윤이 사생아처럼 낳아 던져놓은 글을 누군가 데려다 정성스럽게 읽고 평가했다는 것에 수치심이 일었다.
한편, 오랜 저주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글을 쓰기 위한 추진력을 얻었다. 그날부터 정윤은 한 문장을, 한 문단을 자주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글을 쓰지 않고 살던 시절이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공백기를 빠르게 회복했다.
당선 두 달 후, 정윤은 자신의 이름을 건 단편소설 집을 출간했다. 스물넷, 작가로서는 많지 않은 나이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게 될 것이었기에 정윤은 고무되고 긴장되었다. 어느 때보다 고치고 또 고친 문장들이었지만 자신의 문장이 성기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촘촘하지 못한 문장 사이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그의 문장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정윤만이 아니었다. 정윤이 그렇게 어떤 식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날 것 그대로의 공격을 받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윤은 맨 몸으로 광장에 서서 물맷돌을 맞는 심정으로 서평을 읽어나갔다.
칭찬 일색이었던 신춘문예에서의 평가와 별 두어 개짜리 독자들의 평가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잘하지 못할 때의 심정은 정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이후로 정윤은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쓰지 않았다. 다만, 독자의 이름으로 악플 같은 서평을 남기는데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문장이 있다면 그 즉시 온라인 서점의 해당 페이지에 별 하나 짜리 점수를 매겼다.
이제 정윤은 점수를 주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고 정말 좋은 글에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다. 정윤은 점수를 주지 못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마음이 찰 때까지 읽는 것이 끝나
면 그 한 권을 몇 달에 걸쳐 필사했다. 필사 끝에 다시 자신의 글이 쓰고 싶어지면 정윤은 그 책을 찢어버리고 태워버렸다.
정윤은 그렇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짧지만 고단한 순간들이 지나간 자리에 몇 명의 남자들이 스쳐간 후 지금의 남편인 진우를 만났다.
진우는 감정의 기복 없이 안정된 사람이었다. 진우의 지나치게 무던한 성격이 정윤을 당황시킬 때도 있었지만 같은 상황을 두고도 흥분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진우의 태도를 보며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진우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은 인생에 있어 큰 진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