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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꾸 Dec 20. 2020

김유정의 '형'을 읽고

그의 행복하지 않은 가족사 이야기

김유정의 단편 ‘형(兄)’은 그의 사후(死後)인 1939년 ‘광업조선(鑛業朝鮮)’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부장의 전형인 아버지와 효성 지극했던 맏아들이 난봉꾼으로 변해가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둘째아들인 어린 나가 서술해 간다.

형은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면서도 착실히 만석꾼인 아버지의 재산을 돌보며 살았지만 18세쯤 되면서 ‘난봉’, 좋은 말로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미 15세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해 아내가 있다. 이혼을 하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은 집을 나가 살림을 차린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술에 잔뜩 취한 체 집에 와 아버지에 대한 화풀이로 누이들을 때리고 돌아가기도 한다. 정성들인 약을 가져와 아버지에게 사죄를 구하기도 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사죄를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로 인해 형은 좀 더 난폭해 진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려고 한다는 전갈에 새로 얻은 아내를 동반해 형은 집에 돌아와 효자인 척 단지를 하고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그 많은 재산을 차지하고 향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돈이 몇 푼 없어진 것을 보고 누이들을 몽둥이질 한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입체적 인물인 ‘형(兄)’과 평면적 인물인 ‘아버지’이다. 형의 처음 효성 지극했던 착실한 아들의 성격과 전형적인 가부장이면서 수전노인 아버지의 성격은 다음의 글에서 보여주기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에게는 토지가 많았다. 여기저기 사면에 흩어진 전답을 답품하랴 추수하랴 하면 그 노력이 적잖이 드는 것이었다. 병에 자유를 잃은 아버지는 모든 수고를 형님에게 맡기었다. 그리고 형님은 그의 뜻을 받들어 낙자없이[틀림없이] 일을 행하였다. 물론 2백~3백 리씩 걸어가 달포식이나 고생을 하며 알뜰히 가을하야 온들 보수의 돈 한 푼 여벌로 생기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마주앉아 추수기를 대조하야 제대로 셈을 따질 만치 엄격하였던 까닭이다. 형님은 호주의 가무를 대신만 볼 뿐 아니라, 집에 들어서는 환자를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환자의 곁을 떠날 새 없이 시종을 들었다. 밤에는 이슥토록 침울한 환자의 말벗이 되었고 또는 갖은 성의로 그를 위로하였다. 그는 이따금 깜빡 졸다간 경풍을 하여 고개를 들고는 자기를 책하는 듯이 꼿꼿이 다시 무릎을 끓었다.

형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살림을 차렸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번 아버지에게 정성의 사죄를 하나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인물인 아버지는 아들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봉의 길로 들어섰으나 본래의 착하고 순종적이며 헌식적인 맏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길 반해를 지나니 형님은 자기의 죄를 뉘우쳤는지 하루는 풀이 죽어서 왔다. 그리고 대접 하나를 손에서 내놓으며 병환에 신효한 보약이니 갖다 드리라 한다. 나는 그걸 받아 환자 앞에 놓으며 그 연유를 전하였다. 환자는 손에 들고 이윽히 보더니만 그놈이 날 먹고 죽으라고 독약을 타왔다, 하며 그대로 요강에 쏟아버렸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울며 돌아갔다. 이것이 보약인지 혹은 독약이지 여지껏 나는 모른다마는 형님이 환자 때문에 알밴 자라 몇 마리를 우정 구하여 정성으로 고아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며칠 수 그는 죄진 낯으로 또다시 왔다.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부지깽이처럼 굵다란 몽둥이를 몇 자루 다듬어서는 그것을 두 손에 공손히 모아 쥐고 아버지의 앞으로 갔다. 그러나 그 방에는 차마 못 들어가고 사랑방 문턱에 바싹 붙어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결국 그러다 울음이 터졌다. 아버님 이 매로 저를 죽여줍소사, 그리고 저의 죄를 사해주소서, 하며 애걸애걸 빌었다. 답은 없다. 열 번을 하여도 스무 번을 하여도 아무 답이 없었다. 똑같은 소리를 외며 울며 불기를 아마 한 시간쯤이나 하였을 게다. 방에서 비로소 보기 싫다, 물러가거라고 환자는 거푸지게 한마디로 끊는다. 그러니 형님은 울음으로 섰다가 울음으로 물러갈밖에 도리가 없었다.


형의 정성된 사죄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형은 포악하고 사악한 인물로 변해간다. 두 인물의 갈등의 양상의 절정은 형이 궁핍하게 생활하고 있음에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빌미로 누이에게 심하게 매질을 하여 아버지의 화를 돋우고 이에 아버지가 힘겹게 호령을 하며 급기야는 아들에게 부엌칼을 던짐으로 부자간의 갈등은 절정에 달하고 관계는 바닥으로 치 닿는다. 아들에게 칼을 던지는 극단적인 행위는 결국 관계가 다시는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없음과 아버지의 죽음과 풍지 박산 될 집안을 암시한다.



어른에게 대한 모함, 혹은 어른을 속여서라도 넌짓넌짓이 자기에게 양식을 안 댔다는 죄목이었다. 누이는 뒤란을 한바퀴 돌더니 하릴없이 마루로 한숨에 뛰어올랐다. 밤의 문을 열고 어른이 드러누웠으매 제가 설마 여기야, 하는 맥이나 형님은 거침없이 신발로 뛰어올라 그 허구리를 너덧댓 번 차더니 고꾸라뜨렸다. 그리고는 이년들 혼자 먹어, 이렇게 얼르자 그 담 누님을 머리채를 잡고 마루 끝으로 자르르 끌고와서 댓돌 아래로 굴려버리니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귀가 놀랬다. --- 이태 만에야 비로소 정면으로 대하는 그 아들이다. 그는 기에 넘어[기가 나서] 대뜸 이놈, 하다가 몹쓸 병에 가새질려 턱을 까불며 한참 쿨룩거리더니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고는 기운에 부치어 뒤로 털뻑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몸을 전후로 흔들며 시근거린다. 가슴에 맺히도록 한은 컸건만 병으로 인하여 입만 벙긋거리며 할 말을 못하는 그는 매우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신 옆에 커다란 식칼이 놓였음을 알자 그는 선뜻 집어 아들을 향하여 힘껏 던졌다.



아버지의 부음 전에 보여주는 형의 모습은 가증스럽고 탐욕한 인물의 전형을 보여 준다.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쯤 아들의 사죄를 받아주며 안심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부정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단지를 하며 남들에게 효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형의 모습은 전통적인 효심의 행위를 오히려 가증스럽게 변한 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엄청난 자산가가 되어 향락에 빠져있지만 가족들에게는 한 푼의 돈도 아까와 하는 형의 모습은 수전노였던 아버지의 한 단면을 보인다.



그는 느껴가며 전날에 져온 죄를 사해 받고자, 대구 애원하였다. 환자는 마른 얼굴에 적이 안심한 빛을 띠이며 몇 마디의 유언을 남기곤 송장이 되었다. 점돈을 놓으면 일상 부자간 공이 맞는 쾌라 영영 잃은 놈으로 쳤더니 당신 앞에 다시 돌아오매 좋이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형님의 효성이 꽃핀 것도 이때이었다. 그는 시급하여 허둥거리다가 단지를 하고자 어금니로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뜯었다마는 으스러져도 출혈이 시원치 못함에 그제서는 다듬잇돌에 그 손가락을 얹어놓고 방망이로 짓이겼다.

가부장적이며 수전노인 전형적인 전통 아버지와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버지의 휘하에서 벗어나 자기의 주장을 펼치며 독립된 자아를 찾아가려다 뒤틀려버린 형과의 대립이 이 소설의 갈등의 양상이다. 전통적인 상을 가진 아버지는 자식의 선택에 대해서 존중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여겨 사죄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갈등을 키워간다. 순순히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던 유교적이던 아들은 이를 탈피해 자신의 선택에 따라 길을 찾으려 하지만 경제적 자립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형의 자아 찾기는 주변인물을 억압으로 형태가 변하되어 가며 가족붕괴의 파탄을 이룬다. 어린 나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그린다.

이 소설의 큰 장점은 선택이나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연약한 ‘나’가 서술자의 입장이 되어 ‘보여주기’ 방식으로 소설을 끌고나가 독자가 객관적으로 인물을 평가할 수 있게 함에 있다고 본다. 선뜻 보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기만 하는 파렴치한 인물의 전형으로 비칠 수 있는 형의 모습이 아버지와의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성숙되지 못하고 비뚤어진 인간으로 커감으로 결국 재산을 차지 물질적 성공은 획득했으나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의 실패를 보여준다. 만약 아버지가 좀 더 자애로운 사람이었다면 형은 어떤 모습으로 어린 나에게 기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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