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May 01. 2023

시작부터 꼬여버린 산티아고 순례길

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전날 밤 10시, 침대에 누웠을 때까지만 해도 이번 순례길 첫날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작년 부활절 연휴에는 스페인 페롤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영국길’과 산티아고부터 시작해서 피스테라까지 가는 ‘피스테라 길’ 일부 183km를 걸었고, 이번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포르투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길 중 스페인 국경마을 뚜이에서 시작하는 118km를 걷을 계획이었다.


새벽 6시 반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에 도착해서, 거기에서 포르투갈 발렌사까지 버스를 타고 간 다음, 30분가량 걸어 두 발로 국경을 통과해 이번 순례길의 시작이 될 포르투갈 길의 뚜이(Tui)에 도착할 줄 알았다. 


새벽 5시에 택시를 타고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해 탑승줄에 설 때까지만 해도 비행기를 눈앞에서 그냥 보내야 할 줄은 전혀 몰랐지. 





탑승 게이트에서 휴대폰의 탑승권 바코드를 대며 스페인 체류증을 내밀었을 때였다. 직원은 내 체류증을 보더니 체류증은 혀용하지 않으니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여권? 안 가져왔는데…? 


지금껏 스페인에서 쉥겐 국가를 여러 번 여행했지만 한 번도 여권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체류증만으로 다 가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따로 여권을 챙기지 않은 참이었다.


여권이 없고 지금껏 쉥겐 국가를 여행할 때 항상 체류증만 보여줬다고 말했지만 직원은 라이언 에어는 국제선을 탈 때는 여권 없으면 탑승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권을 가지러 집으로 가기에도 늦은 시간이라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럼 여권 사진을 보여주는 걸로 안 되겠냐며 애원해 보았다.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딘가로 전화해서 물어보았지만 결과는 No.  결국 눈앞에서 탑승구가 닫혔다. 




하..하ㅏ하하하 하하ㅏ하하




덩그러니 남겨진 탑승구 앞에서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여행하며 자잘하게 멍청 비용이 발생한 적은 있어도 비행기는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서 여유 있게 공항에 왔건만 이런 식으로 비행기를 놓친다고?


그리고, 지금까지는 혹시나 몰라서 쉥겐 국가를 여행할 때도 체류증과 함께 늘 여권을 챙겨 다니기는 했는데, 그간 한 번도 필요가 없었고, 짐을 하나라도 줄이자는 생각에 이번에 처음으로 여권을 안 가져간 건데 하필 이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ㅠㅠ


*나중에 라이언에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관련 조항을 읽어보았는데 EU 국가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쉥겐 국가 내에서 여행할 경우 여권을 소지해야 하지만 쉥겐 국가의 체류증이 있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읽었고, 여전히 뭐가 문제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라이언에어 고객센터에 이메일을 보내 놓았다. 혹시 같은 경험 있는 분들 계시다면 좀 알려주세요!


 


망연자실한 채 터덜터덜 공항 밖으로 나왔다. 새벽 7시. 아직 해도 뜨지 않아 깜깜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여권을 챙겨서 다시 비행기 표를 사야 하나. 시내로 가는 기차역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데 의욕이 싹 다 사라져 그냥 취소해 버려? 하는 생각이 3초 정도 들었지만, 


아니 가만, 꼭 포르투로 가지 않고 뚜이랑 그나마 가까운 스페인 공항으로 가면 여권을 가지러 갈 필요가 없지 않나? 일단 공항 밖 벤치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당일 오전 출발, 스페인 북쪽 지방에 공항이 있는 도시들의 항공권을 알아봤다. 


가장 가까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항공권이 200유로 이상으로 너무 비싸고, 마드리드는 가격은 괜찮지만 거기부터 뚜이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 결국 갈리시아 지방의 꼬루냐로 가는 항공편이 오전 중에 출발하고 당일 출발이라 비싸지만 다른 표에 비해선 그나마 가격이 괜찮아서 그걸로 발권했다. 


그래서 꼬루냐에서 뚜이까지 어떻게 갈 거냐고요? 


모릅니다 ㅋㅋㅋ


일단 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산티아고만 도착하면 되지 않겠어?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어쨌든 도착은 할 테니까! 



그리하여 이동한 루트는 다음과 같다. 




갈리시아 지역을 크게 확대한 지도로 보면 이렇다. 




말라가 -> 꼬루냐,  비행기 이동 / 1시간 반

꼬루냐 공항 -> 꼬루냐 기차역,  자가용 / 10분

꼬루냐 -> 비고,  기차 이동 / 1시간 반

비고 -> 뚜이.  버스 이동 / 1시간



어쩌다 보니 비행기, 기차, 자가용에 버스까지 모든 종류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함.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간단해 보이지만 꼬루냐 공항에 내려서 뚜이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꼬루냐부터 뚜이까지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으니 요리조리 경로를 조합해야 했는데, 하나가 해결되면 하나에 문제가 생겨서 가는 동안 계속해서 경로를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버스 파업이 있어서 꼬루냐 공항에서 시내까지 나가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았다. 결국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몇 명과 택시를 셰어해서 가기로 했는데, 같이 기다리던 한 쎄뇨라 가족이 픽업하러 와서 그분 차를 얻어 타고 기차역 앞까지 갔다. 



기차 타고 비고에는 오후 4시 반쯤 도착했으나 버스 파업 때문에 다음 버스는 세 시간 후인 7시 반 출발^^^



결국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저녁 8시 반, 총 14시간 30분 만에  뚜이에 도착했다



이 엉망진창 하루에서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찾아 보자면, 놓친 비행기가 20유로로 매우 저렴했고, 새벽 비행기였던 덕에 오전 중으로 출발하는 다른 항공편을 이용해  당일날 도착 가능했던 것. 


예상 밖의 시작이었지만, 비고라는 도시도 둘러볼 수 있었고, 낯선 이의 자동차도 얻어 타는 친절도 받았으니, 이 자체로 또 하나의 여행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무사하게 잘 걷는 것 뿐.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의 끝으로 걸어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