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길에서
오포리뇨에서 묵은 알베르게는 조용-했다. 깨끗하고 시설도 괜찮은 편이지만 하얀 벽과 타일 바닥 때문에 아늑한 느낌이라고는 없었다. 이 알베르게를 예약한 이유는 침대마다 개별 커튼과 전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공립 알베르게 침대 차지한다고 빨리 걷고 싶지 않고, 부활절 연휴라 사람들이 몰릴 걸 대비해 숙소를 거의 다 예약하고 왔다. 실제로 묵은 알베르게마다 꽉 찼고 예약 없이 왔다 낭패를 보고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예약해 놓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알베르게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이 두 가지다.
1. 침대의 개인 커튼
: 도미토리에서 조금이나마 개인 공간을 갖고 싶어요...
2. 침대 리넨 시트 제공
: 공립 알베르게는 저렴하지만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시트를 사용하는 게 걸렸다.
이 알베르게는 숙박비에 뷔페식 아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햄, 치즈, 요거트 등 내가 먹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나에게 딱히 큰 메리트는 없었다. 간단하게 식빵 두 쪽에 잼 발라 집에서 가져온 홍차와 함께 아침 식사했다. 작게 포장된 올리브유와 간 토마토는 다음 숙소에서 사용하려고 하나씩 챙겨 두었다.
Day 2.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
오 포리뇨(O Poriño)에서 레돈델라(Redondela)까지
15km
오늘은 레돈델라까지 15km 걷는 날. 6일 일정 중 가장 짧은 거리다. 뚜이에서 시작하는 이번 포르투갈 길은 15~16km부터 시작해서 점점 거리가 늘어나 마지막 날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는 날 26km로 가장 많이 걷는 일정이다. 내가 이틀에 나눠 걸을 뚜이부터 레돈델라까지 31km를 하루에 걷는 순례자들도 있다.
30km 이상 걷는 건 한다면 못 할 건 없지만 몸에 확실히 무리가 가고, 그럼 다음 날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루 25km 이상 걷는 건 자제하려고 한다. 사람마다 몸 컨디션이 다 다르겠지만 내 상태로는 그렇다. 하루 걷고 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한 욕심내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8시가 좀 넘어 동이 튼 다음 길을 나섰다. 어제는 종일 잔비가 내리고 흐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햇빛이 쨍하게 떴다. 뽀드득하게 잘 닦인 새파란 하늘을 보며 오늘의 순례길 시작!
날이 좋으니 필터 씌운 것처럼 하늘과 나무의 색깔이 선명하다.
숲길은 새소리만 들으면서 걷고 싶어서 앞이나 뒤에서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으면 빨리 걸어서 앞지르거나,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보낸다.
6km쯤 걸은 후 모스(Mos)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 카페에 들어갔다. 그늘진 카페테라스는 한기가 돌아 커피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 맞은편에 있는 볕이 잘 드는 작은 광장의 계단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했다.
아 따뜻하다. 배낭 줄에 매달아 놓은 덜 마른 빨래도 바싹 말라라.
카페에서 나와서 걷다가 한국인을 만났다. 포르투부터 걷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순례길에서 한국인을 본 건 처음인데 두 사람도 포르투부터 걸었지만 지금껏 한국인을 못 봤다며 서로 반가워했다. 두 사람이 포르투갈 쪽을 걸을 때만 해도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스페인으로 넘어오며 순례자들 수가 확 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스페인으로 들어온 시기가 부활절 시작 시기와 겹쳐서 그럴 것이다. 부활절 연휴는 순례길의 극성수기니까.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는 안 그랬는데 스페인에 오니까 순례자들이 '부엔까미노' 하고 인사도 해주더라 하셨는데, 내 생각과 반대라 좀 놀랐다.
작년 영국길에서는 다른 순례자들 앞질러 갈 때나 99.9%가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했다. 그런데 포르투갈길에 오니까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뒤에서 인사 없이 쌩-하고 지나치거나, 인사를 해도 떨떠름하게 받는 경우가 꽤 많은 거다. 이게 뭐라고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는지.
인사를 안 하는 게 기본값이 되면 하는 상황이 기억에 남으니 인사하는 사람이 많다 느껴질 수 있겠고,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 안 하는 상황이 더 뇌리에 박혀 참 사람들 인사 안 한다 생각이 드는 거겠지.
그래도 길 위에서 어떻게 다시 마주칠지도 모르고, 서로 어떤 도움을 주고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하고 안 하고 중에 하나 선택하는 거라면 이왕이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부엔 까미노' 라고 다섯 글자 말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텐션이 좀 떨어질 때쯤에 두 사람을 만났는데 나보다 빠른 두 사람의 속도에 맞춰 걷다 보니 금방 레돈델라에 도착했다. 혼자 걸었으면 이렇게 빨리 걷지 못했을 텐데, 이야기하면서 걸으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두 사람은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 공립 알게르게로 가고, 나는 걷는 중 전화로 사립 알베르게를 예약해 놓아서 또 길 위에서 보자고 하고 헤어졌다.
출발 시간: 8시 10분
도착 시간: 12시 40분
예약한 알베르게는 침대가 단 10개뿐인데 특이한 점은 이층 침대가 없고 모두 싱글 침대라는 것! 운 좋게 마지막 남은 한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바로 옆 침대를 사용하는 영국인 사라랑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11년 동안 살고 있는 영어 선생님인데 스페인어도 아주 유창하다.
점심 먹고 레돈델라 중심부를 천천히 산책했다. 날이 좋아서 작은 마을이 더 예뻐 보였다. 느긋한데 적당한 활기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드는 곳이다. 작은 공우 벤치에 앉아서 팔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햇볕을 쬈다. 레돈델라는 찐 연두색으로 기억될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빨래도 하고, 낮잠도 잔 후 사라와 다시 만나 숙소 근처 야외에서 열린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 공연을 보러 갔다. 마을 주민들이 빼곡하게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음악도 좋았지만 몸을 좌우로 흔들며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기분이 들떴다.
저녁에는 알베르게에 묵는 순례자들과 작은 테이블에 쪼르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눴다. 포르투갈에서 온 중년 부부인 아나와 주이는 포르트부터 걷기 시작했고, 사라와 나, 스페인 똘레도에서 온 커플 인마와 루이스는 뚜이에서 시작했다. 인마와 루이스는 내가 어제 묵은 오 포리뇨를 건너 띄고 오늘 뚜이에서 레돈델라까지 31km를 걸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예전에도 포르투갈길을 한 번 걸은 적이 있는데 인마와 함께 오려고 다시 왔단다. 프랑스 길 일부도 걸어서 순례길은 세 번째라며. 아무래도 순례길에 스페인에 있으니까 스페인 사람들 중에 루이스처럼 순례길을 틈날 때 여러 번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걸으면서 다음에 갈 순례길 루트를 벌써 정했지!
두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한 알베르게에 나, 사라를 포함해 선생님이 네 명이나 있는 게 신기하다고 하니 인마가 학교에 부활절 방학이 있어서 순례길에는 늘 선생님들이 많다고 했다.
작은 알베르게는 가족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사람을 알아갈 수 있어서 좋다. 이 숙소에 묵으면서 알베르게를 고르는 기준이 하나 확실히 정해졌다. 남은 5일 동안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을 계속해서 보게 되고, 순례길이 끝나고 연락하고 지낼 친구도 이곳에서 사귀었으니 제일 기억에 남는 알베르게가 될 것 같다.
조용하고 따뜻한 순례길 이튿날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