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메일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네이버 메일을 안 쓴지 한참 됐는데, 오늘 무슨 일인지 갑자기 네이버 메일함에 들어갔다가 11,356개의 메일 더미 속에서 옛 학생이 보낸 이메일을 발견했다. 무려 작년 8월 17일에 보낸 걸 말이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석사 과정 중이던 2010년, 일본 학생에게 한국어 과외를 한 적이 있다. 나가노 씨는 어학당의 3주 프로그램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온 일본 방송국 기자였다. 당시 기초적인 한국어만 가능했던 나가노 씨는 수업을 보충하고 말하기 연습을 더 하고 싶어 일본어가 가능한 선생님을 찾고 있었고 지인의 소개로 나와 연결이 왰다
나가노 씨는 공손하고 한국어에 대한 열의가 굉장한 사람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한국 특파원으로 오고 싶다고도 했다. 너무너무 열심이어서 그것보다 더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학생이었다.
당시 경험이 많지 않아 미숙한 부분이 많았을 텐데도 수업이 끝날 때마다 고맙다고 많이 배웠다며 감사 메시지를 보내 줬고, 마지막 수업 때는 덕분에 어학당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며 맛있는 것도 사 주셨다.
일본에 돌아간 다음에도, 어느 도시로 전근을 갔고 아이가 '두 세'가 됐고, 지금 사는 도시에선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어 언제나 길을 찾는 한국 여행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소소한 소식을 전해 왔다. 사회인이 되면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을 '소중히 주세요'라는 조언도 잊지 않고.
몇 년이 지나 일을 시작한 첫해, 나가노 씨가 공부했던 단기 프로그램을 맡고는 문득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하니까 축하와 함께 학생들이 분명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돼서 기뻐할 거라고 응원해 주기도 했다.
3년 전에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 특파원으로 가게 됐다며 오래 전에 꾼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도 알려 줬다.
영영 확인 못 할 뻔한 이번 메일에는, 어느덧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났고 내년 여름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고 있으며, 전에 해외에 있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혹시 한국에 있다면 만나고 싶다, 이런 내용이 매끈한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이번 8월 한국에 있었으니, 그때 메일을 확인했다면 한국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찰나의 인연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잊을만하면 건져올려 깨끗하고 선명하게 닦아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흘려보냈을 무수한 인연들을 떠올리며 반성한다.
오래돼서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느라14년 전에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아보고 페북 메시지들을 다시 읽으면서 잊고 살았던 반짝이는 작은 순간들과 마주했다.
이제는 더이상 학생들이게 SNS를 알려 주지 않지만, 수업 끝나면 학생들과 다 친구 먹던 시절, 옛 학생들과 주고받은 페북 메시지들을 보며 지난 12년 간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게 일해 왔는지 생각한다. 익숙해서 무뎌져 있던 초심이 선명해졌다.
네이버가 아닌 지메일로 들어가서 나가노 씨에게 아주 긴 메일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