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자식을 많이 둔 어버이는 자식을 위하는 걱정이 한없이 많고, 또 할 일이 많아 편할 날이 없다'라고 뜻이 나온다. 겨우 가지 둘 달고 뭐가 많다고 그런 소리하냐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가지 하나의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
라떼는,
산아제한정책으로 형제자매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무에 달린 가지 하나, 딱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물론 개인차가 있겠으나) 전후 세대인 우리 부모 세대는 최저 시급, 적정 근무 시간을 논할 여유도 없이 일했기에 살뜰히 자식을 챙기기 힘들었다. 그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당신들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또 라떼는,
부모의 재력 차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다들 믿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학교를 신뢰하고 선생님에게 의지했다. 매달 치는 시험의 결과가 실명과 함께 복도 벽에 나붙고, 머리 길이가 귀밑 3cm가 넘을 때 사정없이 맞아도 그러려니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다.
지금은,
부모들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싶어 한다. 그럴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헬조선이니 뭐니 해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못 먹고 못 입는 집은 거의 없어졌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니 부모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부모일수록, 자녀의 수가 적을수록, 아이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져서 더 많은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문제점이 진짜 문제인지는 차치하고.
미열이 나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어젯밤에 37.8도를 찍은 체온이 오늘도 정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아들의 체온을 소수점 한자리까지 알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그럴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일하면서 삼 남매를 키우느라 바빴기 때문에 내가 고열로 기절했을 때에야 알아챘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주 안겨서 부모에게 체온 측정 당할 기회가 많다. 약간 뜨끈한 감이 있어 잰 체온이 정상 체온이 넘으면 집안에 비상이 걸린다. 나도 비상 태세로 전환해서 밤새 두 시간 간격으로 아이 열을 쟀다.
글을 쓰는 나에게 딸이 자꾸 말을 건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자꾸 팩폭을 가장해서 자기를 까내린다고 한다. 딸은 영상 편집을 잘해서 이번에 학교 방송부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너는 맨날 공부 안 하고 노니까 시간이 남아돌아서 영상 편집을 잘하지' 했단다. 와, 열받는다.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빠서 내가 학교에서 하는 캠프에 얇은 담요 한 장 대충 챙겨가서 새벽 찬 기온에 발발 떤 것도 몰랐다. 나랑 같은 텐트에서 잔 두 명이 나만 쏙 빼놓고 둘이서 푹신한 침낭에서 자는 동안 내가 흘린 눈물을 지금도 모른다. 알았어도 '네가 잘 챙겨갔어야지' 했을 거다.
며칠 전, 아들이 축구하다가 맞은 일도 떠오른다.
공격수인 어떤 아이가 열받는다고 수비수였던 아들 얼굴을 정면으로 때려버렸다. 쌍코피가 나서 피범벅이 되고 얼굴도 꽤 부었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정형외과에 데리고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상해진단서를 끊었다. 상대방 아이가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30년 전, 고무줄놀이를 하다 얼굴부터 떨어져서 피투성이가 되고 앞니가 깨졌던 내 친구는 병원도 못 갔었다. 엄마아빠가 트럭에 야채를 팔러 다녀서 바빴기 때문이다. 친구랑나는 그 이후에도 계속 고무줄놀이를 했다. 앞니가 하나만 깨져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깨진 앞니마저 예뻤던 그 친구도, 침낭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나도 어느새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다.
우리는 안다. 우리를 돌아 보면 안다. 아이들이 얼마나 강하고, 영민하고, 의외로 무던한지.
부모가 조금 덜 챙겨줘도, 학교에서 조금 부당한 일을 당해도, 친구에게 서운한 일을 당해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낼 수 있고, 그 부족함이 간절함으로 바뀌는 시점에 뭔가 해낼 의욕이 생긴다는 것도 안다. 간절함이 생기지 않으면 의욕도 생기지 않고, 결국 스스로 뭔가를 이룰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우리 삶을 통해 안다.
그리고, 스스로 뭔가를 이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른이 되었을 때 겪는 고통도 절절히 느끼고 있다.
나와 비슷한 '라떼'를 보낸 사람들이 지금 청소년의 부모들이다.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 '간절함을 느낄 기회'를 빼앗고 있는가.
아이 편을 든답시고 다른 아이를 공격하고, 교사를 공격하고, 학교를 공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아이가 부족함을 느낄까봐 두려워서 하는 행동들이다. 부족함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모두들 자기의 성장 과정을 잊는 선택적 기억상실열매라도 먹은 걸까.
언제까지 아이의 '부모'로만 살 것이고,
언제까지 아이를 '자식'으로만 살게 할 것인가.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어야 하고, 우리도 언젠가 아이를 떠나보내고 우리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삶을 살고 싶을 때 몸만 어른이 된 아이를 주렁주렁 달고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