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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피코코엄마 Apr 20. 2020

본편 2-6: 미국 유학을 나와 박사를 마치기까지

실패의 역사를 중심으로

고양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사 오는 이야기를 하면서 스쳐 지나가듯이 저와 저희 남편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서로 비슷한 성격인 두 사람이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의 학교에 왔다가 만나게 되었고, 둘 다 눈 앞에 주어진 일이 있으면 마칠 때 까지는 그 일에만 매여있는 성격이라 묵묵하게 해오다 보니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안 나지만 어느새 졸업을 하고 다른 곳에 와 있네요. 그동안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작고 큰 해프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고민 때문에 6개월간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더 정신없기도 했었지만요). 처음에는 어떻게 살아오며 무엇을 성취해왔는지를 적으려 했지만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이루어 낸 것은 없어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겪어왔던 실패를 적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어리고 철없던 학창 시절, 저는 그리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반에서는 얼추 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목고를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리하여 외고 시험에서 떨어졌었죠), 이과로 진학했지만 1등급이 안정적으로 나온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항상 돋보이고 싶었던 마음과 주목받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대회에 나간다던지, 도드라지는 취미활동을 갖는 등 실속은 없는 다양한 일들을 벌렸습니다. 심지어 대입도 정시를 기준으로 준비하다가, 남들이 수시 준비를 한다는 말에 혹하여 준비 하나 없이 갑자기 나도 수시 쓸 거라고 손을 들고나갔었죠. 운이 좋게 면접을 통과하여 얼렁뚱땅 대학에 진학하였지만 그때 만약 둘 다 떨어졌다면? 저는 아마도 회복하지 못할 대미지를 얻고 재수 직행이었을 거 같습니다.

사고 치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공개할 수 있는 사진, 화학탐구 프런티어 본선 진행 중의 사진입니다.

공과대학 일반계열로 진학했던 저는, 막연하게 만화에서만 보았던 멋진 여자 과학자들 -예를 들면 이카리 유이-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기계과 진학을 생각했었습니다.... 만, 첫 학기에 수학/물리과목에 무참하게 깨졌습니다. 같이 과목 듣는 친구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해하는 몇몇 개념을 저는 끝끝내 반밖에 알지 못했고, 노력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의 시험을 통해 알게 돼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렇게 산업공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학부과정 동안에는 제법 열심히, 적성에 맞다 생각하며 공부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을 배웠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과제들을 수행했었습니다.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고 대학원을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위해 내려와서 보냈던 2년간의 대전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취업과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학부와 학문으로써의 전공을 깊이 있게 파기 시작하는 석사의 산업공학은 많이 달랐고, 단발성 프로젝트를 위해 친구들과 잠시 모여서 일하는 것과는 다른 랩 문화에 적응하는 것 또한 힘들었습니다. 적응하고 연구 주제를 고르느라 반년을 헤매는 동안 2010-2011 동안 벌어졌던 다양한 자연재해와 함께 발생되었던 정전들에 대한 연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연구 제안이 들어와 그 과제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정통 산업공학이 아닌 옆길, 또는 융합학문,으로 가는 것이 더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사과정을 진학할 때의 제 목표는, 좋은 학교에 장학금 (또는 RA/TA 기회)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에는 박사과정이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나를 탐험하는 긴 여행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저 공부를 더 해야만 여자로서 안정적인 사회생활하기 좋다, 학점이 좋았었으니 공부를 계속하는 게 좋겠다 는 말이 막연히 맞겠지 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비록 다 지나오긴 했지만, 이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생각을 많이 해봤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다만, 성공과 실패에 관련 없이 제대로 유학을 한번 지원해보고 그 결과에 순응할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정책 쪽 학교 열몇 곳에 어드미션을 던져놓고 한동안은 엄마의 유방암 수술 후 항암 과정을 미력하게나마 도왔었고, 그 후에는 모든 학교들에서 연락이 오지 않음에 슬퍼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던 중이었으나... 다히도 3rd admission round를 통해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의 교수님과 3월 말에 인터뷰를 진행하고 마지막에 구제되어 2013년 말에 유학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2년 반 정도는 돌밭, 혹은 가시밭길에서 구르며 살아왔습니다. 잘 모르던 전력망에 대한 수업과 경제, 정책 쪽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연구를 위한 기초 지식을 쌓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은 영어였습니다. 공대 쪽에 몸담으면서 어설픈 영어로 발표하고 쓰고 강의를 들었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논문을 습득한 뒤 그것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조리 있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지요. 매일 새벽까지 일하다가 자는데도 불구하고 써놓은 글은 문법이 틀리지 않게 조리 있게 쓰인 문장을 찾는 것이 어려웠었고, 발표를 시키면 횡설수설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격식 있게 이메일과 글을 쓰는 법을 몰라 항상 지도교수님과 구 남자 친구 현 남편이 붙어서 검수해주기 바빴고, 그럼에도 막지 못했던 큰 구멍들 때문에, 그리고 그를 방어하지 못하는 저의 부족함 때문에, 자격시험에서 한 번은 떨어지기까지 했었습니다. 저 또한 그 이후에 많이 읽고 잘 쓰고 말하려 노력했지만, 많이 부족한 저를 인내하며 이끌어주신 지도교수님 두 분, 저의 연구용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해 준 학생 인턴과 남편이 있었기에 무사하게 크고 작은 연구 4건을 마무리하고, 논문으로 투고한 뒤에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달에서야 그 모든 연구들의 최종본인 논문을 막 게재 완료하였고요.

고생 많았다 구 남자 친구 현 남편.... 작년에 함께 졸업식 할 수 있었어서 정말 다행이야.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이 취소되었습니다.

박사과정 중에는 연구만 잘하면 됐느냐?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부 돈이 많아 연구 과제를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는 과가 아니라면 대부분 펀딩에 대해 조금은 고민하며 다니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펀딩을 받을 수 있을지 찾아보라는 교수님의 제안이 있었지만 유학생에게 주는 펀딩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요즘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학부와는 다른 공대와 사회과학 사이의 전공으로 진학하다 보니 (그리고 특출 나지 못했다 보니...)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다음에는 그 후로는 끝없는 펀딩 신청 및 제안서 작성과 거절의 과정이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마뜩한 외부 지원을 받아보지 못한 채 졸업 및 짧은 내부 포닥 기간의 종료가 가까워졌고, 이곳저곳 외부 포닥 및 연구직 지원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렇게 지원과 대답 없음이 반복되는 가운데, NSF의 관련된 분과에서 postdoctoral researcher fellowship program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3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살라 제안서를 완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구원해주어 원하던 연구소, 팀의 포닥 리서쳐로 2년을 보장받고 서부로 무사하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숨 가쁜 3주간의 제안서 준비 후에 10일간의 땡스기빙 휴일에는 자고 일어나면 포켓몬스터 렛츠고:피카추 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지금 서부에 연구소의 일원이 되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닥이라는 비정규직의 운명은 저를 다시 앞으로의 미래의 방향을 정하고 또다시 많은 실패를 경험하라고 밀어 넣고 있습니다. 한동안 육아와 저 자신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급급하여 다시 또 선택과 실패의 길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제 마음을 복잡하게 하기도 했고요. 막연하게 심란했던 마음만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글로 적다 보니 저는 참으로 평범하고 작은 사람이었고, 욕심이 많았으며, 여러모로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마지막은 성공이었고, 그 경험이 저를 다음 단계로 계속 올려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는 글을 마무리할 때 어떤 글을 다음에 쓰지... 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지난 6개월 동안 너무나도 다양한 (대체로) 육아/(소소한) 육묘 경험을 한 끝에 다음이 걱정되지 않는 마무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너무 늦지 않게 튼튼이 엄마로서 돌아오겠습니다 :)


2020/04/19

에너지 정책 연구 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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