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윤 변호사 Feb 07. 2022

비혼주의에 대하여

33년간 비혼주의였다가 지금은 결혼해서 애들 낳고 잘 살아요.

요새 눈에 자주 들어오는 단어 ‘비혼주의’.


글에 앞서서, 먼저 나는 남편과 연애하기 전까지인 33세까지는 철저한 비혼주의자였음을 밝힌다. 내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미혼’과 ‘기혼’이라는 용어가 혼인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와 한 상태로 나누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인해, ‘혼인 여부는 선택이고, 주체적으로 혼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비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에 ‘미혼’과 ‘비혼’을 구별하자면, ‘미혼’은 현재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고, ‘비혼’은 현재 결혼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을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했기에 앞으로도 결혼 가능성이 없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일 터.     




내가 왜 그렇게 절대적 비혼주의로 성장해 왔는지 돌이켜보면, 장남인 아빠의 장녀(나에게는 여동생만 있다)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아빠뿐만 아니라 친척들로부터 “넌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을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에 대한 반발심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공부도 잘하고, 계속 반장도 하면서 잘 자라고 있으니 가족과 친지들의 기대가 컸을 것.


하지만 나는 온전히 나일뿐 가족을 위해 존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가족끼리 돈독하게 지내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주위의 기대가 클수록 나는 방어기제로 더더욱 개인주의화되어 왔던 것 같다. 더욱 나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을 책임지거나 어떠한 틀에 박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성장하면서 더 강해졌다.     


성인이 되어서는 “전 결혼 안 해요!”라는 말을 늘 당당하게 하고 다녔으며, 사귀는 남자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난 결혼 생각 없으니 나랑 결혼할 생각이면 그냥 딴 여성 찾아보라’는 식의 경고를 미리 하고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33년을 철저한 비혼주의와 개인주의로 살아왔다. 물론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꿈과는 별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니까.     




그런데, 그 33년간 단단하게 형성되어 온 나의 ‘비혼주의’에 대한 마음은 정말 신기하게도 한 사람을 만나면서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지더라. 그냥 현실적인 상황들 다 내려놓고 ‘이 사람과 함께라면 평생 행복하겠구나’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정말 일사천리로 함께 사는 것부터 시작했고, 내가 주도적으로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이끌어 왔다. 평소에 아이에 대해 전혀 관심 없던 내가 ‘이 사람과 나를 닮은 아이들을 낳고 싶다’고 생각했고 감사하게도 허니문 베이비로 첫째를 낳고 현재 둘째까지 낳아 잘 기르고 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나는 준비가 안 되었고 부족하니 결혼은 부담스럽다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은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하나씩 채워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결혼 당시 부모님들 도움받을 형편이 되지 않아서 오로지 우리 둘의 힘으로 정말 필요한 것에만 돈 들이고 소박하게 시작했다. 사실 내 선택으로 신혼여행을 국내 여행으로 했고,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 등 예물도 맞추지 않았다(우리 부부는 결혼반지가 없다. 예단? 예물? 그게 뭔지 지금도 모른다.). 내 기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렇게 단출하게 시작한 우리 부부다. 그리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하나하나씩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 또한 완전히 바뀌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희생’으로 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나는 그 희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 더욱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낳고 길러보니 더 이상 나는 내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통해 오히려 혼자일 때와는 다른 차원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무한한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단 비혼주의는 깨졌으나 나는 여전히 개인주의적이다. 누가 동의 없이 나를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남편과 하루 종일 붙어있지만(심지어 우리는 일도 같이 한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룰이 있다. 초반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많이 다퉈왔지만 이제는 서로 존중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그래서 각자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 외의 것들을 공유한다. 그렇다 보니 결혼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결혼 후 서로 맞지 않고 결국 결혼을 후회할까 봐 두려운가?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물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환경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같이 사는데 안 맞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 서로 마음 열고 대화하며 이해하고 맞춰가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다. ‘왜 이 사람이랑 결혼했지?’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처음부터 잘 한 결혼은 없다. 부부간의 사랑이 기반된 존중과 소통을 통해 서로를 선택한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있을 뿐. 그 지난한 과정이 어느 정도 이어지고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이 사람이랑 결혼하길 잘했구나’ 생각할 날이 오지 않을까? 주위에 보이는 잉꼬부부도 분명 서로에게 맞춰가는 힘든 과정을 거쳐왔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부부가 부럽다면, 나부터 내가 내 남편(또는 아내)에게 잘하고 있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댁과의 관계. 나는 원래 우리 부모에게도 살갑지 못한 딸이기도 했고 결혼 후 며느리가 주기적으로 안부전화드리고, 찾아뵙고, 음식 해 드리는 등등 소위 말하는 며느리 노릇(?)을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왔다. 왜 결혼 전 아들도 하지 않던 것을 아들이 결혼했다고 며느리가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은 남편도 동의했기에, 우리 부부는 각자의 가족은 각자가 챙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필요시(명절, 생신 등)에만 함께 챙겨드리는 것으로 룰을 정했다. 특히 딸이 없는 시부모님은 결혼 초기 내가 딸 노릇(?)을 해 주기를 원하셨고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하셨지만, 그건 남편의 컨트롤 영역이다. 이제는 시댁 어르신들과도 일정한 선이 정해져서 서로 그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한다.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결혼을 왜 하게 되었고, 결혼을 한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풀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결혼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비혼주의를 존중한다. 결혼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녀를 낳는 것 또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을 것이다. 이미 그로 인한 행복이 너무나 크고, 아이들이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기에.     


만약 비혼주의자가 내 글을 읽는다면, 꼭 이 말은 전해주고 싶다.

“인생은 모른다.”     


나의 형편이나 결혼제도에 대한 거부, 책임에 대한 부담감, 살아왔던 환경 등 비혼주의자가 된 이유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삶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예상치도 못하게 결혼을 원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가능성을 아예 닫고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위 비혼주의자가 결혼을 한다고 하여 비난할 일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물론 이 글은 결혼 권유 글이 전혀 아니다. 비혼주의자도 결혼을 해서 자녀들 낳고 잘 살 수도 있더라는 경험담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영접 일기(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