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을 한다는 건 주위에 도와줄 친정도 시댁도 친척도 없음을 의미한다. 친구들은 사귀면 많아지지만 기존에 사귄 절친들을 다 한국에 두고 다시 새롭게 출발점에 서는 것이다. 낯선 환경, 한국과 다른 기후, 언어, 문화를 접하고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만주벌판의 독립투사처럼 나홀로 독야청청할 자신감도 필요하다.
여기서 자리 잡을 생각으로 20년 장기 프로젝트를 착수하리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왔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굿바이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왔을 때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신랑과 나, 서로를 의지하면서 알콩달콩 미국생활한지 3년 차에 아기천사가 찾아왔다.
초보엄마 아빠를 배려해서인지 우리 아기는 순한 편이었다. 잘먹고, 잘자고, 잘싸고. 이제 엄마 아빠를 보면 황공하게도 방긋방긋 웃기까지!아가가 그렇게 예쁘게 크는 이면엔 시간에 맞춰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안아주고, 재워주고, 씻겨주는 엄마 아빠의 노고가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아빠는 아기띠매고 엉거주춤 자세로 바운스 바운스 하느라 무릎과 허리가, 엄마는 안아주느라 손마디와 손목이 저렸다. 동시에 아기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긴 엄마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에 와서 아기를 같이 봐주기를, 바깥세상 얘기를 더 많이 해주기를, 육아의 짐을 나눠주길 바랐다.
엄마는 아빠에게 종종 짜증도 내고 투정도 부렸다.
"너무 힘들어. 어머니라도 와서 잠깐 아기 봐주시면 안 될까? 우리 엄마는 내 산후조리에 아기 50일까지 해주시다 가셨잖아."
"그럼 어머니께 전화해볼까?"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아기는 잘 지내노?"
"네. 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요. 근데요 할머니 엄마 아빠가 힘든데 아기 보러 와주세요."
"아가, 엄마 아빠 힘들게 하지 말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해야지. 아들. 엄마 바빠서 이만 끊을게."
한 두어 번의 전화가 이런 식으로 오갔다. 신랑과 나는 슬슬 어머니가 미국에 오실 거라는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하긴, 시어머니랑 단둘이 하루 종일 같이 있는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데.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무작정 오시라고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제사 지내라고 한국에 들어오라고 안 하시는게 얼마나 다행이야.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아기가 통잠을 자기 전이라 밤마다 너무 힘들었다. 통화할 때마다 힘들다는 소리가 숨 쉬듯 나왔다. 그러던 어느날...
"뭐가 힘드노? 힘들게 뭐가 있어?"
뚝. 그나마 참고 있었던 서운한 감정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처음엔 힘들어서 어쩌니라고 하셨던 말씀이 힘들다 힘들다는 말이 듣기 버거우셨으리라. 아니면 힘드니 내가 도와주랴라고 말씀하시면 바로 비행기표를 끊을 것만 같은 우리의 추진력이 무서우셨으려나. 꽃다운 나이에 기저귀 한번 갈아주지 않는 남편과 아이 둘을 거의 혼자 키우시며 시댁 제사와 행사를 도맡아 하셨던 종갓집 며느리 30년, 어머니의 일상.아기 하나 키우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비쳤을지도.
그런데 태평양 건너 아들이 3년 넘게 유학하고 있는 이 나라가, 우리의 생활이 궁금하시지는 않으시려나. 잊을만하면 발발하는 총기사건으로 치안이 점점 안 좋아지는 미국에서 키우는 아기 걱정은 안 되시는지. 미국인 교수 밑에서 동양인이라고 차별받고 시민권 소유자가 하기 싫어할 법한 잡일들은 다 한국인 유학생에게 토스해버리는 이 실상을, 당신 아들이 고생하는 생활을 알기 바랐다. 학교에서는 원어민이 아니라 논문 문법이 구리네, 주지사가 오니 데모를 한번 시연해야 하는데 한국인 중에 누가 할래? 이런 교수에게 시달리고, 집으로 퇴근해서는 육아하러 다시 출근하는 일상을 아셨으면.
"엄마 너무 오래전에 아기 키워서 기억 안 날 수도 있는데 은근 힘들어."
"ㅎ어머니 와서 하루만 아기 봐보셔요."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간 통화 뒤로 내 뚜껑이 열릴만한 전화가 한통 더 남아 있었다.
"아기 보러 삼촌 오라고 해라."
당신께선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인지 몰라도 직계인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도 안 보러 오는데 방계인 삼촌이! 게다가 한창 본인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얘길?
열 받고 짜증 나는 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신랑한테 뾰족한 말이 새나갔다.
"아니. 아기 보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다 보고 가셨는데 결혼 준비하는 삼촌까지 굳이 보러 와야 해? 왜 그래야 하는데?"
"난 처남 오라고 한 적 없어."
"대체 어머니는 왜 그러셔? 자기 퍽이나 외삼촌들한테 예쁨 받았나봐?"
아기는 자는 밤 열 시. 집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열 받은 부부는 제각각 맥주 한 캔씩 십 초 만에 원샷했다. 우리는 싸우거나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는다. 둘 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폭발한 화가 잠잠해질 때까지 쿨링타임을 갖는 편이다. 내가 음식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동네 한 바퀴를 걸었다. 아기와 나, 남편과 나와 아기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 말고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밤늦게 갈 데도 없었다...
걸으면서 온갖 생각을 다했다.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총 맞아 죽으면 울애기랑 울엄마 아빠는 어쩌지. 힘들어도 아기가 예쁘니까 그리고 점점 오래 자니까 괜찮아지잖아. 잘 버텨왔는데 왜 그래. 이상하게도 신랑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자기 연민과 아기와 내 부모님 걱정만이 남았다. 한 삼십 분쯤 걸었나. 울분이 가라앉아 집에 돌아왔다.
이번엔 신랑이 나가서 걷는단다. 그래라. 그 사이에 난 씻고 보송보송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서 폰을 했다. 자버리면 왠지 이 냉전상태를 풀지 못할거 같았다. 삼십 분 정도 지났겠지. 남편이 돌아왔다.
"하고 싶은 얘기 있어? 무슨 생각했어?"
내가 먼저 물어봤다. 침대에 걸터앉은 신랑이,
"어른되기 참 힘들다... 당신은 뭐했어?"
"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걷다 왔지. 지금은 괜찮아졌어. 자기는?"
"그렇구나. 하아... 참. 나도 힘든데 아무데도 말할 데가 없어."
그 순간이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미안해. 못 알아줘서. 나만 힘들다고 말해서."
나라도 위해주고 안아주고 지지해줘야 하는데... 그동안 아기랑 집에 갇혀있다고 일방적인 짜증만 낸 거 같았다. 육아도 집안일도 다 나눠서 하는 남편이. 거기에 나가서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 그이의 바쁜 일상을 나는 가끔씩 잊어버린다. 몸이 힘들면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내가 해줬어야 하는데. 가장 가까이서 당신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내가 위로해줬어야 하는데. 미안해.
그날 밤 우리 부부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훗날, 이 시간을 생각하면 그런 때가 있었지라며 회상하겠지. 다들 그렇게 사는거니까. 그러면서 진짜 어른이 되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