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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Jul 16. 2023

열네살 인간관계론

얼마 전 딸은 친한 친구와의 갈등이 지속되는 일로 화가 났다. 발단은 시험이었다. 첫 시험의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아주 최악의 점수를 얻은 딸은 친구와의 점수 간격에 풀이 죽었었다. 나는 딸이 기죽는 모습이 싫어서 절대 친구에게 점수 공개는 하지 마라, 어느 정도 거짓말로 점수를 부풀려 말하라고 했다. 나중에 이 일로 벌어질 일은 전혀 모르고 말이다.

시험 기간 동안 자신의 점수 때문에 우울하고 엄마한테 미안해서 할 말이 없다고 축 쳐져 있던 딸을 엄마로서 위로하고 싶었다.

친구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엄마가 앞으로 공부 잘하는 애랑만 놀으래."라고 말했다며 딸은 잔뜩 화가 나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말한 후 친구는 실제로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보다 덜 친하게 굴었다고 한다. 엄마가 말하는 공부 잘하는 애한테 더 친근하게 다가갔고 딸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겼다. 마침 교실에서 자리도 바꾸게 되어 그 친구들과 멀어지기도 했다. 작고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열네 살 여자 아이들에겐 재앙 같은 친구관계문제여서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몇 날 며칠을 힘들어하는 아이를 그냥 바라볼 수 없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서로 갈등이 일어난 지점을 찾아 대화로 풀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지난주 목요일 일이 터졌다. 수업 시간에 각자의 사진을 오려 붙이는 활동 수업이 있었는데 딸의 사진이 너무 커서 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나 보다. 하필 친구가 사진 자르는 일을 맡았고 딸은 볼품없이 자르지 말아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럼 작게 가져왔어야지'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듣기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지 됐지만 딸은 그렇지 못했다. 수업이 시작됐고 사진을 확대해 보던 중 딸의 이상스럽게 잘린 사진이 반 친구들 앞에서 놀림감이 된 것 같아 수치심이 들었다고 했다. 쉬는 시간에도 남자아이들이 웃으며 던지는 말들이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게 다 그 친구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 더 괘씸하고 화가 난 것이다.

집에 와서 학원 가는 시간 전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더니 잠만 자고 아무 활동도 하지 않은 딸이 걱정됐다. 우린 아무렇지 않는 일도 딸은 크게 신경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담임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물었고 선생님 보기엔 별일 없는 걸로 아는데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시험 점수, 부모님이 공부 잘하는 애랑 놀아라 말한 일) 다음날 불러서 얘기 나눠보겠다고 했다.

이미 수업이 끝나서 전화가 왔어야 할 시간을 한 시간이 넘겨 딸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다. 선생님이 알아보니 관련 아이보다는 다른 아이와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시험 기간 때 아이들 모두 시험 잘 못 봤다고 속상해하는데 그 앞에서 딸이 '난 영어 역대급으로 잘 봤어'하며 으스대는 듯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아마도 내가 친구들한테 점수를 공개하지 말라고 시킨 일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딸의 말이 친구들에겐 얄미웠을 테고 자기들 말에 공감 안 해준 딸을 멀리하고 싶었던 이유가 됐다.
그뿐만 아니다. 엄마가 공부 잘하는 애랑 놀라고 한 것은 사실인데 이름을 거론한 것은 정확이 이름을 아는 애가 그 애들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거다. 이 점은 이해할 수 없는 게, 집에 가서 엄마한테 특정 아이에 대해서만 여태껏 언급해 왔기 때문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내가 전혀 몰랐던 사실도 있었다. 딸의 반에 남자아이들 중 성적인 농담을 자주 쓰는 아이가 있는데 그럴 때 딸이 같이 리액션을 해준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그런 딸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슬쩍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시험점수는 어떻게 알았는지 딸이 부풀려 말한 사실을 알고 거짓말한 게 기분이 나빴다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얘기 잘하는 아이인데 자기한테 불리한 얘기는 그동안 안 하고 반 친구들이 했던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만 얘기를 많이 했다. 남자아이들이 던지는 성적인 농담도 걔네들 더럽다며 우리 애들 다 극혐 한다는 표현까지 썼던 딸인데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느 수위까지 리액션을 해주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담임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가 의문이 든 점도 있었다. 친구들이 거리를 두게 된 배경의 원인이 딸에게 있다는 요지로 들렸다. 작년에 아홉 명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힘든 학기를 보낸 경험이 있다. 친구 사귀는 일이 가장 어려웠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만족하는 학교 생활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작년처럼 친구들에게 내팽개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또 엄습해 오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어떤 위로와 힘이 되는 말로 기운을 나게 해 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친구 사귀는 게 어려울까? 왜 잘하는 게 없어?"라고 말할 때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냉철하게 '네 잘못도 생각해 봐'라고 냉큼 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몰랐던 사실, 알고 있던 일에 대한 오해들을 선생님에게 전해 듣고는 만감이 교차했다. 딸의 옳지 못한 언행에 대해선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나 역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천천히 호흡하며 하나씩 물어갔다. 엄마가 선생님한테 들은 얘기가 사실인지. 그 점에 대해선 엄마는 네가 딸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지만 남들은 너의 겉모습을 주로 보기 때문에 언짢고 불쾌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진실되게 다가가라. 시험점수에 대해 부풀려 말한 점은 놀림 감이 될 것 같고 실제로 친구의 부모님이 공부 잘하는 애랑만 놀라고 했던 말이 걸려서 그런 것인데 나도 잘 한 건 아닌 것 같다.

갈등을 겪고 힘들어했을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딸은 사과의 글을 올렸다고 했다. 어떤 글을 썼는지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아이들은 이모티콘으로 대신 답장을 남겼고 그렇게 일단락됐다.

딸은 사과했지만 친구에게 '나도 미안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끝내 그 말은 듣지 못했다. 그냥 내가 싫었던 게 아니었겠냐며 복잡한 관계가 싫다고 한다. 처음엔 다 좋아 보이다가도 3개월 이상 겪어 보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서 싫은 모습엔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나 보다. 내가 이런 부분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그런 건가 자책도 들었다.

친구와의 갈등을 통해 딸도 인간관계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기를, 그것이 가장 큰 인생의 지혜임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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