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밥 Aug 16. 2023

황혼까지 잘 살 수 있겠어?

몇 달 전 남편과 처음으로 카페에서 책 읽은 일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제목과 첫 문장을 쓰고 이어갈 단어를 고르다 잠시 쉬기로 했다.

이른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은 탓에 살짝 배가 고팠다. 점심에 남편이 채칼로 한 냄비 썰어 놓은 양배추에다가 감자 하나를 채 썰어 섞어 간단하게 전을 부쳤다. 내 마음대로 양배추 감자전이다. 이걸로 네 식구 저녁을 해결하려고 하니 부족한 것 같아 남편이 사다 놓은 비비고 만두 한 봉지를 꺼내 오븐에 굽기 시작했다.

남편은 요리를 직접 하는 건 잘 못해도 재료 사다 주는 건 잘하는 편이다. 맛집 찾아다니는 건 귀찮아 하지만 맛있는 음식 먹는 건 좋아하는데 내가 해주는 건 웬만하면 거부감 없이 먹고 있다.


광복절이고 아이들 방학 마지막날 집에서 고요하고 탈없이 지내는가 싶었다. 남편이 사 온 만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오븐에서 알맞게 구워진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봉지에 '청양고추가 들어있습니다'라고 적힌 문구 때문에 매운맛이 날 줄 알았다. 전에도 먹었던 만두에서 손만두라고 크게 쓰여있는 것만 보고 먹었다가 매운 고추 맛이 느껴졌던 기억이 있어서 그때 그 만두인 줄로만 알고 남편이 비비고 만두를 사 온 날 냉동고에 넣을 때 '그거 매워서 애들 못 먹을 텐데'라고 말했던 게 화근이었다. 한 입 먹고 '안 맵네? 청양 고추 들어 있어서 매운 줄 알았더니 맛있구먼'하고 말한 뒤로 남편은 나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잘 모르면서 왜 아는 체 하고 그래? 먹어 본 사람처럼 그렇게 말해?'라며 나를 공격했다. 언성을 높인 건 아니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말의 분위기가 마치 내가 사기꾼인 양, 전문 거짓말쟁이인 양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그럴 수도 있지 이만한 실수 같지도 않은 실수로 사람을 그렇게까지 취급할 일이야? 당신 표정을 당신이 봤어야 해. 지금 내가 법을 어기기라도 했어?"

식탁에 모두 앉아 평화롭게 양배추 감자전을 먹다 말고 만두 한입에 남편과 내가 싸움이 붙어버렸다.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이 눈에 밟히면서도 별것도 아닌 걸로 나를 모욕감 주는 남편의 태도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에이 밥맛 떨어져."마지막 쐐기를 박으며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한편 내 책상에 앉아있었다. 물론 양배추 감자전도 만두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도 기분 나쁠 텐데 내색 안 하고 혼자 끝까지 만두 먹는 남편이 너무 싫어서 말도 안 하고 혼자 집을 나와버렸다. 아이들도 엄마가 화 삭이러 나간 거겠니 물어보지도 않았다. 일단 집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집을 나올 땐 현명하게 카드랑 차키를 챙겨야 하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나와 버려서 아파트 주변 공원을 걸으며 지금 내가 가진 게 뭘까 곱씹었다. 두 달 전 남편이 보내준 커피 쿠폰이 있었다. 시원하게 아이스커피 한잔 사서 사색 좀 하고 들어가야겠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아파트 옆 유적 공원에 올라가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내가 나간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한테도 연락이 없다. 그래. 나는 집에서 이런 존재냐? 화가 더 나려고 할 참엥 첫째한테 전화가 왔다. 내심 남편이 전화를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남편을 내가 과대 평가했다.

딸과 한참을 속풀이 통화를 마치니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벌레가 날아들고 가족단위로 저녁 산책 나온 사람들 틈에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부부 싸움하고 나온 아줌마다.

나올때만 해도 노을이 이쁘려나 했지만
어두워질때까 연락오는데가 없어서 초라했다
갈곳잃은 내 신발



소통에 관한 강연을 많이 하는 김창옥 님은 <일타강사>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

부부는 가장 중요한 게 예의 지키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랑보다 예의가 중요하고 예의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뜨끔하면서도 남편이 꼭 갖췄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서로가 바라기만 할 뿐 먼저 행동하는 것이 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탓이 큰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나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은 당신 혼자 차려 먹고 가든가 말든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