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마주하며 그리움이...

by 책사랑꾼 책밥


2012년 12월 30일 아침은 전국이 눈으로 몸살을 앓았다. 전날 쌓이는 눈을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겐 눈이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다른 시작을 알렸다.

그날 아침 어설프게 잠에 깨자마자 아버님과 함께 사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은 직감했다. 나쁜 일이구나. 표정은 굳었고 말도 많이 하지 않고 끊자마자,

“아버지가 쓰러졌대.”

구급 대를 불렀는데 길을 못 찾는지 안 온다며 다급하게 남편을 찾는 전화였다. 아버지가 새벽 늦게 잠들었는데 일어나지 않는다고, 돌아가실 것 같다고. 서둘러 집을 나선 남편을 보내고 곧 잠에서 깨려고 뒤척이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며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을 때 30분가량 흘렀을까,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장인어른한테 연락 좀 해줘.”

이게 무슨 일이지? 뭐? 아버지가? 왜? 어떻게?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해서 3년 동안같이 살았고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했지만 살림을 합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와 살고 싶어 했다. 당연히 나는 반대했다. 그러려고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산다고 한건 아니었으니까. 며느리가 받아주지 않음을 조금은 서운하게 생각했을 아버지는 결국 밖에서 살림을 합쳤고 어느 과수원을 임대해 우리에게 기대지 않고 둘이 살길을 찾았다. 우리 부부가 채워줄 수 없는 적적함을 여자 친구에게 찾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의 여자 친구(혼인신고는 안 했지만 어머님이라고 불러드림)는 우리 가족에게 반찬도 가끔 해주고 마침 둘째를 낳고 몸조리 중인 내게 첫째 아이도 봐주는 등 적극적이었다. 시어머니가 있다면 이런 것인가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는 과수원은 그 동네에서도 맨 끝자락, 내비게이션으로도 주소가 잘 나오지 않는 외딴 길 끝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펑펑 내리는 눈을 마주하며 새벽 내내 아버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상념으로 잠도 못 자고 담배만 줄지어 피웠을까. 진실은 어머니만 알고 있다. 어머니의 빚 문제로 밑 빠진 독에 물만 붓다 아들 부부에게 차마 속시원히 말도 못 꺼내고 담배와 술에 의지했을 아버지.

밤새 눈으로 뒤덮인 차가운 바깥공기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느끼며 아들, 딸, 손주들을 떠올렸을 테고 60여 년을 살아오며 후회와 반성을 오갔을 것이다. 큰 재산을 일궈놓지 못했지만 자식들 앞에 당당한 아버지로 살기 위해 온갖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 없이 일을 했을 것이다. 결혼해서 같이 살면서 매일 하던 말도

“나는 아직 건강하고 뭐든 일해서 먹고 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느덜이나 돈 열심히 벌어. 알았지?”


아버지는 아무리 술을 많이 드신 날에도 다음날 5시면 일어나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하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 분이었다. 그런 분이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 때문에 얼마나 끙끙 앓았을 것이며 숨이 멎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살갑게 잘해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아버님에게 미안함이 밀려와 내 마음 추스리기도 힘들었다.


새해 첫날부터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시작된 2013년은 우리 가족에게 암울한 해였다. 남편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을 그 여자의 전적인 책임으로 물었다. 나한테 나중에 한 말인데 같이 사는 여자랑 헤어지고 방 하나 따로 얻어 드리기로 했다고 한다. 다시 며느리랑 살림을 합치는 건 서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아버님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가 아버지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괴로워했다. 매일 술을 마셨고 그 여자가 아직도 그 과수원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불이라도 질러야겠다며 몇 번을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매달 아버님 산소를 찾는다. 남편은 애석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나는 며느리로서 따뜻하게 대해드리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미처 나누지 못한 정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살아계신 동안 잘해드리는 것이 응당 맞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실 것 같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자리는 아직 남아 있다고.

이전 07화엄마, 내 상처가 안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