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의달빛정원 Jul 26. 2018

오늘부터 1일이야

중년부부의 연중행사

남편의 네일아트


봉숭아 꽃잎

해마다 7월이면 친정에서 봉숭아 꽃잎을 따온다. 수분이 살짝 빠질 때까지 꽃잎과 잎을 그늘에 말린다. 백반을 섞어 곱게 빻아 손톱에 얹고 비닐장갑 손가락 부분을 잘라 감싼다. 테이프로 감은 손가락이 저려오는 걸 하룻밤만 참으면 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비닐을 벗기고 씻어내면 한여름 태양 같은 빨간색이 손톱에 소담스럽게 담긴다. 일상의 익숙함과 무미건조함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시간이다.


여자 셋과 사는 남자

이십여 년 동안  한여름 연중행사로 자리 잡은 남편의 재능기부인 네일아트. 우리 집 세 여자의 손톱에 예술 작품을 만드는 남편의 손가락도 덩달아 발갛게 물든다. 씩씩한 아들이 있었다면 축구를 하거나 야구장에 다니며 얼굴이 까맣게 탔을 텐데, 울 남편은 여자 셋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주고 공기놀이를 하고 별자리를 보러 다녔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아이들에게 해준 것들이 참 많다. 자전거 보조바퀴를 처음 떼던 날 붙잡아 주었고, 인라인과 S 보드를 타며 공원을 누볐고, 밤송이에 손이 찔렸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애들을 업고 달렸다. 참 성실한 남편이자 아빠이다. 아니 그런데 올해는 자세가 살짝 불손해졌다. 염색용 고무장갑을 끼고 작업을 하는 게 아닌가. 예전에는 두 손가락에 봉숭아 물이 들어도 자랑스럽게 잘 다니더니 이제는 쑥쓰럽댄다. 아버지학교 지부장님이 왜 그러셔~ 이것도 다 모델이 되는 건데.   


환하게 웃던 공대 형

우리의 만남은 아주 사소한 느낌으로 시작되었다. 등나무 벤치에서 웃고 있던 스물네 살의 공대생 형은 도서관 자리를 맡아주었다. 공부 친구가 술친구가 되었고 막 뽑은 새 차를 태워주는 남친이 되었다. 남동생이 써야 할 386 컴퓨터를 나와 동생이 있던 자취방에 실어다 주었고, 우리방을 찾는 선후배들을 감시하느라 윗목을 지키고 앉아 있던 가이드였다. 좋은 사윗감 놓칠세라 서둘러 결혼을 시켜주신 부모님 덕분에 우리는 이른 나이에 부모가 되었고, 어느덧 희끗희끗한 머리를 염색해주는 중년의 부부가 되었다. 결혼 23년 차 부부의 일상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잠버릇, 밥 먹다가 떨어지는 반찬, 일찌감치 튼 방귀, 베개의 높이, 양가 어른들의 용돈 차이... 눈에 쓰였던 콩깍지가 벗어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서로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심리적 독립

우리 부부는 이것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서로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점들을 조화시켜 개인으로서, 부부로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양가 어른들로부터 심리적인 독립이 잘 되었기에 각자의 영역을 유지하고 꾸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부부는 정말 특별한 인연이다. 무수히 넓은 우주 공간 중 이곳에서 만났고 수많은 인연 중 바로 이 시기에 만나 살아가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가려면 사랑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더욱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 즐거움과 스트레스가 함께 있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수고로운 '여름행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빨갛게 물든 손톱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초승달처럼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릴 무렵 첫눈이 온다. 그러면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다. 첫사랑이 이루어 1년치가 자동갱신 되었다고... 봉숭아를 너무 올려놓아 손가락까지 빨갛게 물든 내 손을 보면서 남편에게 한마디 건넨다.


여보~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모모의 이쁜 손가락




#네이버블로그: 모모의달빛정원

#상담심리사모모

작가의 이전글 [사물 체험 놀이] #4 낭만 버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