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의달빛정원 Jan 12. 2019

[사물체험놀이] #6 전기히터

가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면 공감을 잘 할 수 있겠지요.



To. 지인들


나는 전기 히터야.  

스위치만 눌러주면 몇 초 만에 2만 개의 카본 열선이 주왕~주왕~ 하면서 달아오르지. 내가 만들어내는 주황색은 적당히 따뜻한 기분이 들게 하고, 눈이 부시지 않아. 최강 한파가 몰려오는 겨울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사람들이 위로를 받잖아. 넘어지면 저절로 전원이 꺼지고,  기름보다 난방비가 적게 드니까 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무엇보다 원적외선이 나오니까 인기가 많은 것 같아.


사실 벗들이 있으면 긴 겨울밤이 더 풍요롭긴 하지. 따뜻한 차와 책, 그리고  가습기! 내 곁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어봐. 분위기 있어 보이잖아. 거기에다 가습기가 팍팍 숨을 쉬면서 습도를 맞춰주면... 캬~ 별천지가 따로 없지. 이 친구들이 긴 겨울밤을 더 풍요롭게 해주거든. 물론 군고구마를 구워주는 난로보다 운치는 덜 하겠지만.   


그런데... 지인들아. 두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나한테 등 돌리지는 말아 줘.

얼마 전에 새로 산 벤치 코트를 입고 나에게 등 돌린 여학생. 허벅지 뒤쪽에 눌은 자국 난 거...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나를 발로 차는 건 좀 너무했지 않니? 네가 거리 조절에 실패한 거잖니~. 알다시피 아직 나에겐 사물이 가까이 올 때 자동으로 꺼지는 기능이 없단 말이야. 나도 '자동 눈치 장치'가 있으면 정말 좋겠어. 나는 한없이 가까워져서 따뜻함을 주고 싶지만 상대가 부담스러워하거나 뜨거워할 때는 그걸 바로 알아차리고 온도를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누군가  내 전원을 끄는 걸 깜박 잊고 그냥 나가버릴 때 알아서 전원을 끌 줄 알다면 말이야. 119 소방차 소리는 나도 원하지 않아. 


내 위에 걸터앉지 않았으면 해. 

지난번에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무심결에 내 위에 앉은 박샘. 나 머리 쪽은 약하단 말이야. 박샘 무게가 상당하다는 거 잊었구나. 자기야! 운동한다며~. 6시 이후에는 물만 마신다며~. 내 몸통이 아이언맨 슈트처럼 골드 티타늄 합금이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면 박샘 정도는 넉넉히 받쳐줄 텐데 말이야.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있어. 

이 시간... 혁오의 'Tomboy'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가습기도 옆에서 습기를 마구 뿜어주고 있네. 모모는 생강차를 타서 책상에 앉았고 말이야.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주황색 원적외선을 쪼여 줄 거야. 왠지 알아? 난 지금 내 상황이 감사하거든. 이 집에 들어오는 날, 손바닥만 한 사무실 벽에 걸려 경비원 아저씨를 재우는 선풍기형 히터를 본 적이 있어. 그렇게 벽에 매달려 고개를 흔드는 녀석보다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가 훨씬 안정감이 있잖아. 난 눈치도 없고 아이언맨 슈트처럼 단단하지는 않지만, 내가 있는 이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2018년을 잘 마무리하도록 돕고 싶어. 추운 겨울엔 내가 있다는 거 기억해줘. 


2018년 12월 30일

인공지능을 꿈꾸는 전기 히터가.  


작가의 이전글 독서치료 #21 역무원과 똥퍼 아저씨의 품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