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Feb 04. 2024

엠마누엘 카레르, <두 세계 사이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니다

엠마누엘 카레르(Emmanuel Carrere),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 -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니다     

“진실이 없으면 내 몸은 약해져요. 난 노동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소. 전에는 공장에서 생각을 했지만, 그 때문에 해고되었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표면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 또한 만인과 평등하게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늘날에 도래 했노라. 그런데 공식적인 계층은 폐지되었을지언정, 경제적 격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쁘띠 부르주아-부르주아가 나뉘는 것은 여전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브루디외는 저서 『구별짓기』에서 교육 수준과 출신 계급을 반영하는 문화와 교양을 분석한다. 계급의 아비투스(취향, 구조, 법칙 등)를 서로 공유하는 이들은 매우 자연스럽고 합당하게 느껴지는 반면, 서로 다른 아비투스는 이질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할 여유가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실용적 취향을, 시간 여유가 많은 부르주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새롭게 경제적 상류층에 진입하는 쁘띠 부르주아의 소유를 향한 갈망과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려는 경향을, 정통성을 바탕으로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부르주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고전 예술을 접할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 신흥 예술인 아방가르드를 옹호하는 쁘띠 부르주아, 일과 이후 쾌락을 추구하며 대중문화나 스포츠를 선호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각기 다른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더욱이 동족을 선호하는 계급 내의 친화력에 따라 서로 다른 계급을 이해할 기회는 줄어든다. 계급 간 선호하는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예술은 각자의 다른 삶을 이어주는 가능성의 장이다. 우리는 예술을 보며 다른 삶을 가늠한다. 그리고 엠마누엘 카레르의 신작, <두 세계 사이에서>의 두 세계가 각기 다른 두 계급이다. 과연 카레르는 고립된 각 차원을 어떻게 매개할까.      


1957년 파리 태생의 엠마누엘 카레르는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영화인으로서 그는 2005년 <콧수염>으로 장편 데뷔하였으며, 그의 적지 않은 소설이 타인의 손을 거쳐 영화화되었다. 카레르는 영화 데뷔작 <콧수염>에서 주관과 표상을 오가는 인간 심리의 기원을 탐구하였다. 주인공 마크는 오랜 시간 길러온 콧수염을 잘랐다. 그러나 아내 아녜스, 친지, 동료들은 모두 다 처음부터 그의 콧수염이 없던 것처럼 입을 모아 말한다. 왜 그럴까? 나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대상을 보고 싶은 대로 기대하고 왜곡한다. 세르쥬는 아녜스가 부정하지만, 과거에 그녀가 라디에이터를 껐다고 우겨댄다. 마크 또한 자신이 아녜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중요하지, 외부 브루노의 전화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선입견과 편견, 주관으로 인한 곡해가 '보편'을 이루고, 진실을 보는 사람은 '광인'으로 치부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될 위기에 처한다. 카레르는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표상에 갇힌 이기적인 다수의 폭정과 이로 인한 소수, 진실의 희생을 분석한다. 결국 마크는 프랑스에서 홍콩으로 탈출한다.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접근한다. 그 이해관계를 이데올로기가 구성하여, 구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동일하게 마크를 바라본 것이랴. 한편 프랑스 내에서도 마크와 이해관계가 없는 한 행인은 그의 콧수염 유/무를 인식하였고, 홍콩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마크는 고독한 유랑 속에서 아녜스를 상상한다. 그 아녜스는 객관적으로 그를 인식한다. 콧수염의 유/무와 양복에 대해서, 그러나 그 아녜스는 마크가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이로써 현실의 객관적인 아녜스와 다른 사람이다. 즉 끝없는 순환이다.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객관적인 사람에게 실망해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을 주관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이 무한히 범람하고… 그래서 카레르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덧씌워지지 않은 행위를 아주 적확하게 클로즈업하며, 왜곡 이전의 순수를 기록하지만, 영화에서는 순수하지 않은 이미지도 나타날 수 있기에 그의 영화는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기존 상황에서 거칠게 끊기는 편집으로, 다른 장면이 덧붙여질 수 있는 몽타주에 의해서다. 

그리고 카레르는 공간 또한 탐구하는데, 선입견이 변화 없는 단단한 건물이라면, 면도하고 변화하며 달아나는 마크는 '우천', '강', '바다' 등으로 상징된다. 단단한 도시에서 인간은 실존적이고 액체적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 물로 가득 찬 홍콩과 유람선에선 마크의 상상이 피어오른다. 객관이 머물러있지 않기에 그만큼 주관이 샘솟을 수 있는 공간, 이렇게 객관적인 세계와 표상을 오가던 카레르가 이번에도 두 세계를 오가는 신작으로 돌아온다.      


도입부, 아주 널따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2.39:1)에 영화의 배경 위스트르앙이 담긴다. 본 작품의 화면비가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사실상 가장 넓은 화면비인만큼, 위스트르앙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역력하다. 그러나 영화는 위스트르앙과 그 도시를 구성하는 시민들을 모른다. 이유는 카레르가 고정된 카메라를 이용해 도시를 2차원적으로 편평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직적으로 깊이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표면에 그친다. 또 기차가 지나간다.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그리고 멈춘 카메라는 프레임 바깥과 기차가 향하는 곳을 알 수 없다. 즉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알지만 모른다.' 위스트르앙에 속하지 않은, 파리에서 생활하던 작가 마리안의 시선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멀리서 관조할 것이 아니라, 직접 다가가고 참여해야 한다. 도시를 비추던 카메라는 서서히 거리를 좁혀서 말랑거리고 따뜻한 인간의 살결을 포착한다. 카메라가 맨 처음 주목하는 사람은 크리스텔이다. 카레르는 크리스텔의 발걸음을 수직적인 구도의 트래블링 숏으로 좇아간다. 그렇게 위스트르앙의 핵심에 깊이 다가가야지만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영화에선 리버스 숏이 주요하다. 마리안은 프랑스에 불어 닥친 경제 위기와 고용 불안정에 유리되어 있다. 그녀는 부르주아의 안온한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안은 세드릭에게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주변에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경제 위기가 절박하고 불안한 반면, 마리안은 노동자들의 세계에 녹아들어도 불안함과 동시에 ‘짜릿하다.’ 그래서 마리안이 경제 위기를 다루기 위해선 트래블링 숏으로 위스트르앙의 구성원들을 쫓아다니고, 리버스 숏으로 그들의 얼굴을 맞대며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이 되어야지만 이들을 글로써 다룰 수 있다. 

크리스텔을 따라간 카메라는 그녀의 발이 닿은 '복지국'에 도착한다. 복지국을 포착한 시퀀스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케 한다. 제도와 절차는 선진화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시간 여유가 많지 않은 프롤레타리아들은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다. 복지가 가장 필요한 존재에게 복지가 유리된다. 또 크리스텔은 약속을 잡지 않고 복지국에 찾아왔다. 공무원은 절차를 지키라고 그녀를 타이르지만, 크리스텔은 이를 듣지 않는다. 그녀는 절차를 따르며 체면을 세우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가 급박하다. 호소하는 크리스텔의 얼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어 화면에 꽉 찬다. 그녀 자신은 절차나 제도에 가까울 겨를이 없다. 당장 지금 나의 숨결과 아이들의 생활이 급하기에, 카메라는 그녀 자신에게 근접한다. 한편 마리안은 순서를 지켜 공무원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린다. 크리스텔에 비한다면 수동적이고 관조적이다. ‘바스트 숏’으로 포착된 마리안은 크리스텔이 포착된 숏에 비해 제도와 함께 보인다. 그것이 계급적 차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항상 조급하다. 일과는 막중하거니와,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도 '어머니'로서 업무를 연장해야 한다. 그녀들은 여유가 없고 자신에게 급하다. 공무원이 마리안에게 말하듯, 누구라도 떠맡기 싫어하는 고된 일자리가 그들에게 절박하다. 심지어 공백이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이력은 그 고된 일자리 하나 갖기도 힘겹다. 한편 마리안은 그 정도로 절박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가 복권이 당첨된 이후를 술술 상상하는 것과 달리, 만족스러운 그녀의 삶은 복권 당첨의 기쁨을 상상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시간이며 자본이며 여유롭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상사이기에 “언제까지 일을 하라”고 보채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부르주아가 경제 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절박한 삶을 먼 거리에서 논한다면 위선이다. 자신의 표상과 계급적 아비투스를 뛰어넘어야 논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카메라는 쫓아다니고, 리버스 숏으로 열심히 인터뷰하며 이를 체화한다.   


마리안은 누가 요구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쓰고 싶은 자신의 내재적 원리를 따른다. 파리를 뒤로 한 채 위스트르앙으로 향한 것도 타의가 아니라 자의다. 부르주아는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가며 담론을 선도하고자 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리대상이다. 취업 시장에서 마리안은 면접관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가꿔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또 청소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데, 노동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선 내 기분과 몸 상태가 어떠하듯, 항상 방긋방긋 미소 짓고 인사해야 한다. 영화 후반, 쥐스틴의 인생 2막을 축하해주는 파티가 열린 직후, 한 노동자의 컨디션이 다소 좋지 않다. 이 때 내 몸에 의해서가 아닌, 상사와 돈에 의해 몸을 일으켜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다. 다시 청소부 교육으로 되돌아가서, 마리안은 산업용 청소기를 직접 다뤄본다. 그러나 힘이 너무 세서 그녀가 통제하기 매우 까다롭다. 청소기에 의해 그녀의 움직임이 강제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발과 다리가 아니라, 타인과 사물에 따라서 움직인다. 부르주아에 의해 지배되고 관리되며 쉽게 해고된다. 마리안도 해고를 당한다. 이에 따라 나데주의 ‘동상 놀이’처럼 노동자의 재능은 조각처럼 '굳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조각이 아니다. 감정은 조각이 아니라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전후가 계속 잘리고 변화하며 운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노동자에게 감정이 허용되지 않는다. 노동이라는 하나의 상태로 굳을 것을, 외부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받는다. 나데주의 동상 놀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임이 장기화되면 누구라도 획득할 수 있는 비극적인 재능이다. 

분명 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의 카메라와 구도는 움직이며 수직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수평적 구도에서 포착되지 않던, 수직적 구도로만 확인할 수 있는 그 프레임 너머가 막혀있다. 벽이나 가림막, 변기에 의해서 말이다. 그 이상의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도시에 비해 인간의 발걸음은 역동적이나, 그 발걸음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에 의해서 못 박힌다.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가 트래블링 숏으로 바뀐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삶과 계급을 떠나고 싶어 하는 크리스텔과 마릴루의 열망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미약하다. 이들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영화 결말까지 위스트르앙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노동을 요구받기에 가로막히는가. 마리안은 청소부가 되어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한다. 그러나 성취감이나 뿌듯함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지적하길, 분업화되지 않은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이나 농사는 성취감을 동반했다. 노동의 결과가 내 손에 잡혔고, 그것은 업무를 수행한 노동자의 소유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은 분업화되어 노동자는 최종 결과물을 접할 수 없고, 특정한 부품만 계속 만들게 된다. 또 노동자와 생산품을 소유한 부르주아가 이를 무위도식한다. 영화의 배경은 공장은 아니기에 분업화, 파편화는 도드라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유사한데 바로 노동의 성취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안은 화장실 바닥을 깨끗하게 닦는다. 그러나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할 새도 없이 곧바로 발자국이 찍혀 더러워진다. 당장 깨끗하게 해놓더라도, 사무실이며 페리며 내일이 되면 곧바로 난잡해진다. 해변에서 크리스텔의 아이들이 세운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 다시 모래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즉 마리안은 노동으로 세상이나 삶이 나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음에 지쳐 간다.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럽히며 노동자들에게 불쾌감을 선사하고 힘을 과시한다면,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멸적으로 웃어야 한다. 

또 이들은 너무나 쉽게 해고되고, 그 자리는 손쉽게 대체된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대체될 수 있는 사물이자 일용직으로 느껴지지, 살아 숨 쉬는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임을 환기하기 어렵다. 마리안이 새벽에 일을 나가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4~5시쯤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집에 돌아오면 고된 노동에 지쳐서 뻗어 버린다. 여가를 즐길 여유도 없이 집에 갇힌다. 그리고 그 집은 아파트다. 서로가 사는 방이 벽으로 단절되어 있다. 그 벽을 뛰어넘을 여유가 프롤레타리아에겐 희소하다. 그래서 영화에서 노동이 담긴 시퀀스는 '길지만 짧다.' 분명 24시간 중 다량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자체가 전부 부질없다는 듯, 노동 행위의 핵심만 비추고 재빨리 넘어간다. 

특히 본 작품의 노동자는 주로 '여성'이다. 마리안은 실제 노동자들이 믿을 만한 설정을 자신에게 부과한다. 본래 부유한 남편의 아내였는데, 혼자되어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회계를 맡았으며,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됐었다. 부르주아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이란 '배역'을 모방하고 있다. 또 쥐스틴은 본래 양성구유로 태어났고 병원에선 양성 중 남성을 강요하였으며, 이후 여성이라는 성을 스스로 선택하였다. 쥐스틴은 제도가 부여한 젠더 대신, 스스로 바라는 젠더를 선택하고 수행한다. 이렇게 마리안과 쥐스틴의 여성성 모방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성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경제 활동을 책임지는 여성의 경우, 사회에서 가장 고된 노동을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고된 노동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최저임금'뿐이며, 그마저도 비정규직인 그녀들에게 안정적으로 지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벽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편집에 비해 실제 시간은 짧지만, 노동보다 더 길게 포착되는 숏은 볼링장에서의 만남, 파티, 일등석에서의 일탈 등이다. 그 시간은 짧지만 더 길게 자신에게 남는다. 노동 현장에서 부여된 업무만 하고, 일과 이후에는 분절된 아파트에 고립되던 서로는 이윽고 함께 차에 타고, 볼링장에 가거나 파티를 즐긴다. 고립된 당시에 이들은 노동자의 소임만 반복하였다. 그러나 서로 대화하며 삶을 느끼고, 또 각자의 몸이 요구하는 '연애'를 환기하며 즐겁게 낄낄거린다. 고객을 위해 강제된 웃음이 아니라, 내 몸이 반응하는 솔직한 웃음을 내뱉는다. 또 객실을 청소하던 객체에서 일탈하여, 일등석을 누리며 존귀한 존재임을 환기한다. 

그렇게 일탈하고 경계를 뛰어넘으며 고유한 개개인이 깨어난다. 마리안과 크리스텔의 관계가 그렇다. 마리안은 크리스텔을 차에 태워주며, 평소 일터-집을 걸어 다니며 발생한 과다한 업무 시간을 줄여주고, 어머니로서 짐 또한 내려놓게 만든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활용하게끔 여유를 제공한다. 크리스텔 또한 마리안의 생년월일을 확인하여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는 기계나 공장의 부품 같은 일용직이 아니라, 고유한 탄생과 삶을 축복해주고, 그녀를 위해 선물을 건네준다. 배려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을 되찾는다. 즉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와 상대를 알기 위해서 경계를 넘어야 하지만, 계급 내에서 제한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유한한 기존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쌀이 수분을 흡수한다는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하며 물에 빠진 핸드폰을 고쳐주고, 반면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는 늘 재촉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을 픽업과 육아로 넓혀준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영국을 오가는 해협의 항구 도시 위스트르앙다. 마리안이 청소하는 페리는 영국에 속하기도 하고, 프랑스에 속하기도 한다. 둘 다 될 수 있음과 동시에, 한편으론 어느 한쪽에 온전히 머물지도 않는다. 그래서 카레르는 위스트르앙을 선택한 것이랴. 자신을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으로 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예술가는 영화의 배경인 위스트르앙과 같은 곳에서 양 차원에 동시에 살면서도 오롯이 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실제로 산다. 물론 기만적인 예술가도 있지만, 다루고 창작하는 대상에 책임이 있는, 본 작품의 마리안과 같은 예술가는 감정을 느끼고, 실제로 노동하며 끊었던 담배도 피운다. 이와 동시에 오롯이 진실이 될 수 없다. 본 작품은 다큐멘터리도 모큐멘터리도 아닌, 픽션이다. 비전문배우들을 섭외했지만 그들 앞에는 카메라가 놓여있고, 이들은 분명하게 연기한다. 영화가 아무리 노동자들을 배우로서 섭외했다고 한들, 카메라 앞에서 노동자는 노동자를 연기한다. 그것은 가짜다. (한편 노출된 카메라는 오늘날의 인류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여 여성이나 노동자임을 '연기'하고 이로써 '픽션'이 되는, 거짓된 세계임을 가시화한다) 마리안을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는 오랜 시간 연기 활동을 해오며 숨길 수 없는 특유의 습관이나 어투가 굳었다. 그러나 본 작품에서 비노쉬는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완벽하게 연기자로서의 아비투스를 지운다. 배우 이전의 인간으로 되돌아가지만, 이와 동시에 여전히 카메라가 앞에 있다. 연기자다. 감시하고 바라보는 카메라, 이를 의식하는 배우들은 결국 가짜로서 아비투스를 흉내 낸다. 어쩔 수 없이 기만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그렇듯, 마리안이 동료에게 느꼈던 우정은 진심이었고, 마리안이 작가임을 알게 된 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해준다. 마리안은 가짜였지만, 가짜로써 그녀가 담은 것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술의 사명이다. 가짜지만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진실을 매개하고, 이와 같은 효과를 창출한다. 그러나 오롯이 진짜는 아니다. 결말에서 마리안은 서점을 떠나 크리스텔을 만나러 가지만, 이와 동시에 페리에도 타지 않고, 그 사이에 남는다. 외면하는 크리스텔과 마릴루를 서운해 할 수 없다. 마리안은 페리를 이용하는 친구가 있는 부르주아이자 작가이지, 페리를 청소하러 더는 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점과 페리 그 사이, 작가이면서 작가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였지만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카레르는 그것이 숙명이라는 듯, 가짜지만 진짜인 예술을 긍정하는 노동자와 진짜지만 가짜인 예술을 부정하는 노동자, 어느 한 편을 들지 않는다. 예술이란 두 멍에를 다 짊어지고 살아야 하므로, 다만 가짜라는 특정 편에 쏠리지 않고 진짜와 가짜 사이에 머물기 위해서 예술가는 뛰어다녀야 한다. 표상과 주관, 계급을 뛰어넘는 본 작품은 카레르의 예술론을 드러냄과 동시에 <콧수염>의 반성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다만 두 차원을 넘나듦에도 불구하고 다소 한 차원에만 머무르는 듯한 상투적인 연출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쥐스틴 트리에, <추락의 해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