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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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상을 '발견'했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그 대상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 도래하는가? 바로 오감을 총 동원하여 대상의 '모든 감각'을 습득했을 때, 이로써 어떤 진리를 도출해냈을 때다.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다. 하지만 시각, 청각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수용자가 빠트린 미각, 후각, 촉각의 정보들은 진실이란 퍼즐의 잃어버린 조각과 같다. 이를 뒤늦게 찾으러 길을 돌아가 보지만 이미 유실된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내가 접한 시각, 청각이 객관적인 사실이라 단언할 수도 없다. 이로써 발생한 빈틈 사이에 채워지는 '가설'과 '환상'이 우리를 진실로부터 유리시킨다. 본 진실의 딜레마를 쥐스틴 트리에가 <추락의 해부>에서 탐구한다.
1978년 페캉 태생의 쥐스틴 트리에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본 <추락의 해부>로 202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쥐스틴은 역사 상 세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영화감독이다. 트리에는 지금껏 적지 않은 ‘여성 영화’를 연출해왔는데, 매번 변호사나 작가, 영화감독 등 '전문직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공적 영역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그녀들, 하지만 그녀들은 오롯이 만족하지 못한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이 사회적 입지를 다져나감과 동시에 아내의 희생을 통해 가정까지 꾸려나가며 ‘두 마리 토끼’를 손에 쥔 것처럼, 쥐스틴의 전문직 여성들 또한 '사무실'과 '침실' 두 영역 모두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변호사가 주인공인 <빅토리아>의 원제에 ‘In Bed with’가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문직 여성들의 욕망은 순탄하게 성취되지 않는다. 쥐스틴의 작품은 항상 ‘소동극’으로서, 여성들의 욕망이 불발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여성들의 욕망이 불발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모성’이나 ‘이타성’을 여성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무조건 모성을 갖고 가정주부를 겸해야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내에서, 여성은 공적 업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남성과 달리 도와주는 이가 없는 여성들의 '딜레마'를 쥐스틴은 포착하는 것이다. 또 <시빌>에서 여성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지 못하는 와중에, 다른 환자들의 삶을 치유하는 '상담사'로서 사회적으로도 모성을 떠안는다. 그 책무에 의해 여성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주체성으로 도약하는데 난항을 겪는다. 이에 여성은 <빅토리아>에서처럼 '신경증'에 걸린다. 그래서 쥐스틴은 <빅토리아>에선 조력자 남성을 상정하거나, <시빌>에서는 ‘배우로서 남성’, 즉 겉모습은 멀쩡한 배역을 연기할지언정, 실상 뒤에선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의 민낯을 폭로한다. 쥐스틴이 남성들의 만행을 폭로하기 전까지 <시빌>에서처럼 착취당한 여성은 남성의 성취를 위해 은폐되어 있었다.
이렇게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전복하는 과정을 쥐스틴은 도발적이고도 과감하게 풀어낸다. 전근대적인 체계를 전면 뒤엎기 때문이다. <빅토리아>에선 목격을 진술하는 증인이 사람이 아니라 '유인원이다. 그간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괄시되었듯,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배제된 동물, 감성의 영역을 복권시켜 진실을 바로잡고 빅토리아의 커리어도 다시금 승승장구한다. <시빌>에선 여성이 만든 영화와 증언으로써 진실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지금껏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타인을 바라보던 여성, 그러나 이타성을 강요받는 현실에서 이탈한 반 가부장적인 영화에서 여성은 제 모습을 바로잡고 주체성을 찾아간다.
이번에도 쥐스틴은 진실을 추적하는 영화를 연출하는데, 가장 먼저 이 여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인간은 객관에 도달하고자 그리도 먼 길을 떠나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필히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만약 산드라(산드라 휠러)가 살인자인데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이는 사뮈엘(사뮤엘 테이)의 명예를 훼손하는 처사요, 반대로 그녀가 무고한데 누명을 쓴다면 마찬가지로 산드라에게 우를 범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찾아 헤매지만, 객관은 언제나 혼탁하고도 두꺼운 베일에 감춰져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왜 탁한 먼지 속에 뒤덮여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찾는 진실이 대체로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진실은 굳이 찾아 헤매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 실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파장을 미치고, 이를 직시하는 우리는 이미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진실은 다르다. 미궁 속에 덮여 있는 진실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고, 대처할 수 없는 진실은 큰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묵묵히 현재-미래로 흘러가며 과거를 짓밟는다. 이로써 진실은 유실되거나 변형된다. 영화에서 금세 녹아 없어지며 혈흔 증거를 지워버리는 '눈'처럼 말이다. 더불어 사뮈엘은 산드라와의 부부 싸움을 녹음했다. 발화는 대체로 정확하여, 청각만으로도 쉽게 시각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녹음 뒷부분이 다소 추상적이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롯이 식별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시간은 당시의 '시각적 진실'과 또 다른 당사자인 '사뮈엘의 증언'을 앗아갔으니, 산드라의 증언과 파편적인 녹취만 접하는 우리는 미궁 속에 빠진다.
즉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선 시간이 앗아간 모든 감각적 정보를 확보해야 한다. 어떤 하나라도 놓친다면 인식은 앎이 아니라 믿음에 그친다. 프롤로그에서 조에(카밀 루더포드)는 산드라를 취재한다. 그들은 비장애인이다. 오감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확보하는 기관, '눈'과 '귀'의 기능을 갖췄다. 그래서 이들을 포착한 '리버스 숏'에서 시청각은 완벽하다. 둘의 발화와 그 청각이 흘러나오는 입의 이미지가 합치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시청각을 종합하여 사실에 근접한다. 그런데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부정확한 시청각의 조합이 있었다. 청각은 두 여성의 인터뷰를 가리키는데, 시각은 이들과 전혀 관련 없는 스눕이 공을 줍고 있었으니 말이다. 직후 다니엘(밀로 마차도-그라너)이 스눕을 부르는 청각과 소년이 반려견을 씻기는 이미지가 조합되며 오류는 바로잡히지만, 촬영은 동공을 난감하게 만드는 ‘핸드 헬드’다. 부정확한 결합과 불완전하게 흔들리는 이미지는 소년이 확보할 수 있는 시각의 한계를 가시화한다. 시각 정보를 오롯이 확보할 수 없기에, 대신 촉각이나 청각을 동원해야 하는 다니엘은 먼 거리에 위치한 진상을 인식하기엔 한계가 있다. 시력이 부재한 다니엘, 이로써 시각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소년에게 사뮈엘과 산드라에 관한 상충된 주장들이 마구잡이로 들려오자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다니엘은 시력을 대체하고 보완할 만큼, 타 감관 기관을 발전시켜갔다. 소년은 촉각을 민감하게 활용하여 미끄러운 빙판길을 안전하게 건너뛰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한다. 더욱이 사뮈엘의 자살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증언은 소년의 후각에서 비롯했다. 이는 비장애인들이 확보할 수 없었던 증거다. 즉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각자가 가진 정보도 다르고, 맞닥뜨린 난관도 차이가 있다. 각자가 찾을 수 있거나 쥐고 있는 진실의 편린들은 무수히 다르다.
쥐스틴은 그 장애물들을 영화 속 다양한 장치로 가시화한다. 이로써 150분가량의 길고 긴 여정 끝자락에서도 쉽게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이유를 해제한다. 먼저 '언어',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지만 언급되는 국가는 더 많다. 산드라가 잠시 머물던 ‘영국’에서부터 고향 ‘독일’ 또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즉 영화의 배경은 여러 국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럽 연합'이라 말해도 전혀 과하지 않다. 연합에 속한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시대에서 유럽인은 더 많은 시각적 정보를, 이로써 더 확실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다. 그만큼 청각적 진실과 멀어졌다. 인간에 의한 청각은 문화나 언어를 습득해야지만 비로소 앎으로 전환되는데, 유럽 연합에선 각자의 자국어에 비한다면 비전문적이라 말할 수 있는 외국어가 만연하고, 또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해야 하기에 착오가 잦다. 이로써 산드라가 뱅상(스완 아를로드)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여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라고 항변하듯, 똑같은 시공간에 참여해도 청각에 관한 각자의 인식이 엇갈린다. 외에도 법정에서 산드라가 '단어'를 묻는 모습, 산드라의 발화를 순수하게 흡수하지 못하고 ‘통역’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받아들이는 장면 등이 언어에 의해 오염된 청각적 진실의 사례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부부싸움 또한 언어의 한계가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분명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두 사람의 말이 다르다. 용이하지 않은 소통에 의해서 사뮈엘은 산드라가 '강요'한다고 받아들였고, 산드라는 "내게 책임 없다"라고 판단했을 테다.
그 청각을 방해하고, 시각까지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은 '공간'이다. 가령 검사관은 사뮈엘의 '주검'에만 집중한다. 그 와중에 뱅상은 부부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쥐스틴은 공간을 담아낸 ‘필로우 숏’으로 뱅상의 시선을 가시화한다. 그래서 검사관은 공간과 무관한 육체를 분석할 반면, 뱅상은 공간에 의한 육체를 고민할 것이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대화를 증언하는 다니엘이 어디 위치했느냐에 따라서 부부의 성량은 달라지고, 이로써 둘의 대화가 일상적이었는지, 다툼이었는지 엇갈릴 수 있다. 다니엘이 산드라, 모니카(소피 필리에)와 대화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산드라와 다니엘, 모니카 사이를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다니엘과 모니카가 확보한 정보를 산드라는 모두 접할 수 없다. 후반부에 산드라와 다니엘의 물리적 분리도 동일한 사례다. 즉 똑같은 공간에 참여해도 어느 장소, 각도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판단과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나란히 서 있어도 서로 다른 ‘시선’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쇼트는 '팔로우 숏'이다. 단역 수준에 그치는 조에의 발걸음부터, 인간이 주목하지 않는 스눕의 궤적 등 다양한 발걸음을 팔로우 숏으로 추적한다. 이후 '시점 숏'을 이어내는데,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높낮이'나 '각도'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심지어 피사체를 담아내는 방식 또한 영화의 선명한 카메라, 영화 내 경찰의 불투명한 카메라, TV 등 다채롭게 교차하며, 시선에 따라 대상이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실제로 산드라는 높은 시야에서 사뮈엘의 토사물에 섞인 아스피린만 발견했다면, 다니엘은 낮은 시점에서 당시 의아한 행동을 하던 스눕을 목격했다. 각자의 상이한 관점을 통합해야만 사뮈엘의 자살시도 정황이 겨우 드러난다. 시선은 '언제'의 문제도 환기한다. 프롤로그 이후, 영화에선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담은 '사진' 여러 장이 인서트된다. '무수한 초당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움직이는 차원이 현재라면, 과거를 재현하는 사진은 오직 '하나의 프레임'만을 반영한다. 그리고 과거를 진술하는 각자의 시선은 사진처럼 단 하나의 프레임만을 주관적으로 채택하고, 이때 각자의 언제가 달라지며 진술에 차이가 발생한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객관의 조각을 통합하는 과정 역시 고행인데, 산드라가 사뮈엘을 묘사하는 표현처럼 각자는 ‘자기가 만든 기준’에 빠져 있기 때문이요, 더해서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인 ‘환상’과 ‘가설’을 사실처럼 호도하기 때문이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마땅할 볼렌 판사 또한, 보석 심사에서 산드라에게 유리한 성향을 가졌다고 거론된다. 검사(앙투안 라이나르츠), 변호인단, 기자의 이해관계는 더 노골적이다. 검사와 변호사는 승리를 위해 진실이 무엇이든 상대를 주저앉혀야 하고, 기자에겐 산드라의 유죄 판결이 황색언론의 관점에서 유리하다. 특히 검사는 산드라가 부부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환기하기 위해 항상 ‘포이터 부인’이라 칭하고, 그가 데려온 ‘중년 남성 전문가’들은 사뮈엘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며 연민하고 산드라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다니엘이 증인으로서 처음 법정에 섰을 때, 검사와 변호사의 질의에 따라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쪽이, 이로써 이미지가 상반된다. 이때 검사와 변호사는 상대측에 의한 다니엘의 얼굴을 보지 못하거나 않는다. 검사가 자꾸 가능성을 거론하자, 피고 측은 매우 희박한 확률이라고 반박하지만, 그런데도 검사는 작은 것을 커다랗게 부풀려서 과장한다. 그는 산드라의 불륜으로 인해 부부관계가 파탄 났다는 추론을 어떻게든 증명하기 위해 포악하게 행동한다.
뱅상 또한 '최초의 승리'를 어떻게든 거머쥐기 위해 산드라가 법정에서 내뱉을 ‘대사’를 정교하게 집필 및 ‘디렉팅’한다. 이때 쥐스틴은 입력된 대사를 내뱉는 산드라의 입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여기에 더해 영화에선 자주 '줌인'이 사용되어 피사체에게 근접하고, 심지어 피사체는 새하얀 ‘눈밭’ 위에 놓여있거나, 모두가 주목하는 ‘중앙 구도’에 위치하여 매우 또렷하다. 그렇게 확실하다시피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사뮈엘의 주검이나 사건을 둘러싼 여러 얼굴 등 단지 '물질'일 뿐이지, 그 물질 배후에 숨겨진 객관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물질이라는 진실을 알뿐, 그 물질을 해석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그 이상의 객관에는 근접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린 그 물질에 투영된 각자의 주관에 홀린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의 진술 또한 온전한 사실이라 확신하기 어렵다. 최종 증언을 앞둔 다니엘이 불안에 떨며 조언을 요청하자, 마르주(제니 베스)가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설령 믿음에 의거하더라도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라고 답한다. 이후 다니엘은 법정에서 사뮈엘의 자살 시도를 증언하는데, 그 당시를 재현한 시퀀스의 시청각은 다음과 같다. 분명 시각은 당시 동물병원에 가던 정황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청각은 사뮈엘의 것도, 당대 다니엘의 것도 아닌, 현재 산드라를 잃을 위기에 처한 다니엘의 목소리가 입혀진다. 그 발화가 사뮈엘의 것도, 당시 다니엘의 것도 아닌 이상, 우린 현재 다니엘의 진술이 참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한 ‘편집’에 있어 유리한 정황만을 이어내고 불리한 것을 덜어냈을 거란 추측도 가능하다. 이로써 진실과 거짓이 뒤집힐 수 있다. 해를 면하기 위해 찾아 헤매던 진실 대신에, 해를 면할 수 있는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꿰차며 말이다. 엄마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다니엘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선입견에 매몰된 각자의 시선이 진실에 닿지 못할 때, 또 몇몇 편린들이 영영 유실되었을 때, 예술은 산드라의 표현처럼 '삶의 연장'으로서 현실을 대체하거나 매개할 수 있다. 변호 측에서 보려 하지 않는 타살 가능성, 검사 측에서 인지하지 않는 자살 가능성이 ‘애니메이션’이나 ‘디오라마’로 재현되어 법정에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시각으로 존재하지 않는, 오직 청각이나 기억 등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정황을 예술로서 '영화'가 구체적으로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다소 부정확한 산드라와 사뮈엘 녹취록 후반부는 영상화하지 않으며, 뱅상이 “빈칸은 빈칸으로 두어야 한다”라고 말하듯, 책임지지 못할 거짓과는 거리를 둔다. 즉 예술은 진실이라는 퍼즐의 잃어버린 조각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쥐스틴은 예술의 긍정적인 기능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의 연장인 예술 또한 선입견이 마음대로 곡해할 수 있고, 어떻게든 제 가설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예술을 추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 평론가, 검사 등의 위치에 따라 사실로서 예술은 허구가 되고, 반대로 허구로서 예술은 사실처럼 호도된다. 감독의 전작 <시빌>처럼 말이다. 후자는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산드라가 사뮈엘을 낙하시키는 모습, 다니엘의 사뮈엘 증언 등을 본 작품이 사실마냥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서 산드라의 답변 일부를 ‘자르는’ 편집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영영 모른다. 결말에서도 산드라는 감히 “진실을 되찾았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단지 이겼다거나 끝났을 뿐이라고 말한다. 또 승리를 만끽하는 변호인단은 음주를 즐기는데, 이후의 음주운전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음주운전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아 보인다. 진실이 무엇이든 다만 승리하고 거짓을 진실로 대체하면 그만인 것이다. 쥐스틴은 사건을 둘러싼 인간과 동물, 심지어 사물과 공간까지도 빼놓지 않는 섬세한 ‘교차 편집’과 다양한 시선을 반영하는 촬영을 통해 제목 그대로 미궁에 빠진 추락 사건을 해부해보려 한다. 그러나 이 다양한 시선을 교차 검증하는 과정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불순해지고, 이렇게 도출된 결과를 감히 참이라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쥐스틴은 대신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도달하기란 벅차다 못해 불가능에 버금간다고, 판정 자체는 덧없고 편향되었다, 영화는 판단이라는 진실 대신 단지 물질이라는 진실을 전달할 뿐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