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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04. 2024

카트린 브레야, <라스트 썸머>

착의와 탈의 사이에서

카트린 브레야(Catherine Breillat), <라스트 썸머>(Last Summer) 

- 착의와 탈의 사이에서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s://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593

오늘날의 소녀(세레나 허)는 생일파티에서 인형 대신 물총을 선물 받고, 유도로 남성을 제압할 정도로 능동적이게 자라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쾌락만큼은 아직 그녀들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1948년 브레쉬르 태생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카트린 브레야는 인생 내내 위험한 가장과 동침해야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딜레마를 예술로써 탐구하며, 여성이 본인의 섹슈얼리티에 닿을 수 없는 구조적 원인을 분석해왔다. 특히 성인으로 갓 진입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여성 청소년이 성인으로의 진입하는 문턱을 ‘문지기’로서 남성이 감시한다. 초기작, <36살의 작은 소녀>에서 남성은 폭압적인 가장, 드라이버, 경비로 등장한다. 이들은 사춘기 소녀 릴리의 이동, 출입을 통제한다. 결정권을 가진 남성과 달리 여성이 가진 것은 유약한 몸뚱이뿐이다. <완전한 사랑>에서 남성은 폭군이자 범죄자요, <어뷰즈 오브 위크니스>에서 브레야는 뇌졸중을 앓아 육체 절반 가까이가 마비되어 극도로 연약해진 자신을 반영한다. 그런 와중에 남성은 멀쩡하게 바깥을 활보하거나, 불안정해진 여성의 정신을 잠식하는 '사기꾼'이다. 

브레야의 여성들은 남성이 '금기'로 규정한 문을 과감히 박차고 나선다. 그래서 브레야의 작품은 항상 '에너제틱'하다. 연출 자체는 평범하고 투박할지언정, 담담한 프레임 내에서 묘사되는 행위들은 아주 대담하고 적극적이다. 그 이중성이 여성을 담는 그릇과 이를 거부하는 여성의 긴장감과 투쟁을 암시한다. <36살의 작은 소녀>에서 남성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소녀는 가장의 손아귀를 거부하며 줄곧 바깥으로 외출하고 ‘도로’로 뛰어들며, 남성들을 '도발'하고 주체성을 회복한다. <어뷰즈 오브 위크니스>에서 마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모드는 어떻게든 혼자서 '거동'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미소'를 지으려 안간힘이다. 

여기서 여성들이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남성들을 '이용'해야 한다. <어뷰즈 오브 위크니스>에서 모드가 외출을 하고 이동하려면 남성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더욱이 이성애자인 여성들의 육체가 향하는 곳은 그녀들을 옥죄는 권력자 남성의 품이다. 그래서 브레야의 작품은 여성이 자신들을 제압하는 대상과의 욕망에 오롯이 빠져들 수 없는 긴장감과 충돌로 가득하다. <36살의 작은 소녀>에서 릴리는 남성이 자신에게 매달리게끔, 또 호락호락 당하지 않으려고 주도권을 부여잡지만, 정작 사랑을 마쳤을 때 남성은 그녀를 매몰차게 버린다. 그래서 남성에 의한 여성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릴리는 항상 '선수 쳐서' 상대를 배신한다. 반면 <완전한 사랑>에서 여성은 가부장적이고 권태로운 결혼 제도에서 도망쳐 분방하고 도발적인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남성은 또 다른 '가장', 곧 폭군이다. 그래서 '이성애자 여성'의 반항은 영화 속 표현으로 또 다른 '늑대'나 '양아버지'를 불러오며 지배를 자처한다. <어뷰즈 오브 위크니스>에서 모드는 솔직한 직감을 따라 사기꾼 빌코를 영화에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장이자 사기꾼 남성을 끌어들인 모드가 그를 통제하지 못하고 역으로 지배를 당하며 모드의 육체는 솔직할 수 없게 된다. 즉 브레야는 가부장제에 반발하며 몸의 욕구를 따르는 여성, 한편 그 과정에서 폭압적인 남성의 지배를 답습하는 딜레마를 분석하는데, <라스트 썸머>에서 가장의 지배에 처하던 젊은 여성은 '중년 여성'으로 나이를 먹었고, 그 여성이 사랑하는 대상은 '남성 청소년'으로 뒤바뀌며 '권력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본 작품의 주인공 안느(레아 드루커)는 청소년 범죄를 전담하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가부장제의 수혜를 입는 남성의 지위나 경제력에 버금갈 것이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안느, 한편 아직까지도 쾌락만큼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 내내 ‘착의’는 노동 및 업무와 연관하여 쾌락의 근원인 몸을 봉한다. 반대로 ‘탈의’는 본성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 탈의가 영화 내내 안느에게 제한된다. 안느의 변호 덕분에 여성 청소년 사라(릴라-로즈 질베르티)가 친부 에브라르와 함께 살게 되는 시퀀스에서, 에브라르가 너무 감격스러워하는 나머지 안느에게 커피를 쏟았고, 그녀의 하얀 옷엔 흉한 얼룩이 묻었다. 이로써 불쾌해진 안느는 탈의해야만 일련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지다. 하지만 그녀는 옷을 아예 벗지 못하고 금세 갑갑한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영화 초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그녀는 속옷 상태로 잠시 동안 노출되지만, 순식간에 온 몸을 다시 싸맨다. 왜냐하면 피에르(올리비에 라보딘)와 함께 안젤라(안젤라 첸)와 세레나를 입양했어도, 또 부부가 똑같이 밖에서 고된 일을 마치고 귀가했더라도, 양육은 안느가 독박쓰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붓아들 테오(사무엘 키르셰)까지 그녀의 몫이다. 그래서 안느는 퇴근 이후에도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업무를 연장하며, 커피 얼룩이 진 옷이 자아내는 긴장감과 불쾌, 텁텁함을 어떻게든 참아내야 한다.

물론 착의는 나 자신을 보호하거나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테오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은 이후 안느가 입은 불그죽죽하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심리를 표현한다. 그녀의 피는 들끓고 욕망은 만개하였다. 하지만 노동과 관련한 착의는 타인의 감시와 검열로 결정된다. 노동자 여성의 착의를 결정하는 상사들은 ‘남성’으로, 이들은 항상 '프레임 바깥'으로 자유롭게 빠져나간다. 피에르와 미나(클로틸드 쿠로)의 남편이 대표적으로 그들은 감시에서 자유로운 반면, 프레임에는 그들의 아내인 안느와 미나가 남겨진다.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 미나의 남편은 ‘한량’이라고 표현되고, 안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테오가 피에르에게 모든 걸 고백할 정도로, 누군가가 쳐다보지 않는다면 존재는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반면 직장에서부터 집까지, 계속 ‘촬영’되는 그녀들은 절대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미나는 손님에게 미용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아들까지 돌보고, 안느는 퇴근 이후에도 열심히 집을 쓸고 닦는다. 이후 남자들이 집에 돌아오면 여성에게 '정상적인 와이프'로서 유니폼을 입힌다. 안느는 지루하고 뻔한 피에르의 투정을 묵묵히 들어줘야하고, 심지어 손님들의 비위까지 맞춰야하니 테오를 따라 몰래 집밖으로, 곧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심리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피에르가 요구한 TPO를 거부한 안느는 귀가 이후 질책을 당하나니, 탈의를 원하는 여성의 욕망은 항상 가부장제에 의해 좌절되는 것이다.

그래서 안느는 테오에게 이끌린다. 그들의 첫 만남, 소년은 상의를 훌러덩 벗고 있다. 탈의 상태가 찰나에 그치는 안느와 달리, 테오는 굳이 옷을 입으려고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 이 순간 안느에게 가히 유일하게 '핸드 헬드'가 사용된다. 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는 안느의 몸은 반라의 테오를 보며 간접적으로 욕망을 해소하고 전율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지금껏 안느에게 동봉된 흥분과 떨림의 가시화다. 이후에도 테오는 상반신을 자주 노출하고, 관념적인 옷이라 할 수 있는 ‘비건’이라는 사상 역시 훌러덩 벗어 빅맥을 먹으며 호수로 뛰어든다. 또한 탈의를 제게 국한하지 않고 안느가 입은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거나, 수영복을 입도록 협조하거나, 원피스를 들추는 등 살갗이 드러날 수 있도록 조력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느는 변호사이기에 피에르에게 크게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안느가 피에르에게 크게 쩔쩔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피에르를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눈치다. 그렇다면 왜 정상에 올라간 여성마저도 가부장제에 굴복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유년기의 사랑’에서 기인한다. 어렸을 적 우리의 뇌리는 백지장과 같다. 거기엔 '사랑', 그것을 좌우하는 '좋은 것'에 대한 어떤 규정이나 경험도 적혀 있지 않다. 그러다가 서서히 좋은 것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하며 개념을 확립해 가는데, 새하얀 백지에 새겨진 첫 경험은 매우 강렬하여 잊히지 않는다. 첫 경험으로 얼룩진 뇌리 위에 덧입혀지는 두 번째, 세 번째, 그 이상의 경험이 희미해지는 것과 달리 말이다. 그래서 성장 이후에도 우리는 첫 번째 사랑을 진정 좋은 것이라 인식하는데, 안느의 첫 번째 연인은 바로 ‘연상’이었다. 14살에 그녀는 엄마의 친구였던 33살의 남자를 좋아했으며, 역겨움과 동시에 매력을 느꼈다. 늙으면 늙을수록 육체적 매력은 저하되는 것이 당연하니 역겨움은 본성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느낀 매혹은 여성, 그것도 ‘소녀’라는 취약한 위치에서 비롯된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었을 테다. 그 아저씨는 힘과 지위가 나약한 소녀를 지켜줄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췄기에 말이다. 그 첫 경험이 현재 볼품없는 육체를 가졌지만 경제력은 봐줄만한 피에르를 인위적으로 선망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남녀의 임금 격차가 지위가 높은 여성조차 본능 대신,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감정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안느와 피에르의 임금 격차는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성탄절 시퀀스의 상징으로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변호사로서 안느가 마땅히 신변을 보호해준 사라(릴라-로즈 질베르티)는 '꽃다발'이라는 선물을 건넨다. 그것이 변호사로서 그녀가 받을 수 있는 대가다. 이후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선물을 개봉하는데, 피에르의 트로피 와이프로서 안느는 꽃다발보다 훨씬 비싼 '보석이 박힌 팔찌'를 선물 받기에 그녀는 영화 속 표현 ‘노땅’을 사랑한다.

동시에 안느는 지위가 높기에, 그녀의 욕망은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형태를 띤다. 도입부, 안느와 고객의 얼굴이 프레임 한가득 '클로즈업'된다. 똑같은 촬영, 그러나 동일한 형식에 담긴 얼굴, 특히 ‘눈동자’는 정반대다. 고객의 동공은 카메라까지 요동칠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반면, 안느는 날카롭고도 강인하게 소녀를 응시한다. 클로즈업으로 양자 모두에게 근접하더라도, 여성에게 ‘힘’이 어떻게 가까운지는 천차만별이다. 안느는 피해자인 고객을 가해자로, 또한 대상의 모든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제 권력에 밀착한 반면, 고객은 자신에게 엄습해올 수 있는 폭력과 가깝다. 안느가 안젤라와 세레나를 '입양'한 설정도 그렇다. 임신을 원하긴 했지만, 임신 중절을 하여 불임이 된 그녀는 남성에 의해 육체가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나 강아지가 제 가족이 될지 말지 몸소 선택할 수 있는 ‘지배자’다. 타인의 힘이 제 몸에 침투하는 ‘타투’를 싫어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는 피에르의 아내로서 종속되긴 하지만, 동시에 제 육체가 타인에게 지배되는 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안느는 테오를 사랑한다. 피에르는 고분고분한 남자가 절대 아니다. 안느 마음대로 바깥을 나돌도록 허락하지 않고, 결말의 피에르가 '침묵'을 요구하니 그녀가 그대로 입을 싹 닫는 것도 위계를 드러낸다. 피에르가 안느에게 테오와의 관계를 다그치자 그에게 붙잡히지 않고 달아나긴 했지만, 이때 그녀는 자신의 ‘변호력’을 피에르가 기대하는 정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사용한다. 외에도 섹스를 앞둔 피에르는 제 옷을 스스로 벗는 반면, 안느는 그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남편에 의해 옷이라는 포장지가 벗겨진다. 이후 그와의 관계가 영 시원찮은지 안느는 유년 시절 연애 이야기를 하며 그의 지배에서 간접적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그 시도는 늘 실패한다. 

이런 와중에 청소년 테오는 안느가 지배할 수 있는, 아직 힘이 모자란 매력적인 남자다. 그녀가 호수에서 테오의 얼굴을 수면 아래로 담가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안느는 별장에 도둑이 든 정황을 목격하는데, 이 소동의 근원이 테오라는 증거를 확보한다. 안느는 테오의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가족에 잘 녹아들어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그녀에게 컴퓨터까지 선물 받는 테오는 ‘목줄’이 채워져 꽤 고분고분해진다. 또한 피에르와 달리 테오는 안느의 옷차림을 좌우하지 않아서, 소년 앞에서 그녀는 아무렇게나 탈의한다.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하는 피에르와 달리, 공상과학 만화를 보는 테오는 충분히 재밌다. 그녀는 리드 당하지 않고 '차'를 몰고 직접 이동하며 테오의 눈동자라는 목적지에 다가간다. 안느가 그 소년과 행하는 입맞춤은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어 쾌락에 아주 가까워지고 ‘롱테이크’는 완전해진다. 지금껏 피에르와 섹스할 때 내던 그녀의 신음은 현재 남편에 의한 것인지, 과거 회고에 의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테오와의 섹스에서 발생한 헐떡임은 현재 그녀의 몸에서 정확하게 출발하며 아주 길게 이어지고, 또한 유년기의 사랑 이야기와 같은 ‘부연 설명’이나 ‘대리인’이 필요 없다. 자신의 몸과 연인 자체로 아주 만족스럽다. 웃음 역시 피에르와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형식적이고 작위적인 웃음이 아니라, 실실거리는 웃음이 테오와의 데이트 이후 숨겨지지 않고 새어나온다.

그런데 테오가 순순히 지배를 당하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사춘기의 남성 테오는 피에르와 안느가 아무리 노려봐도 클로즈업된 동공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주관이 강하고 반항적이다. 특히 자신을 지배하려는 피에르에게 더더욱 공격적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담배는 밖에서 펴라, 이제 곧 졸업이니 시험을 신경 쓰라며, 아들을 제 의도대로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테오는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주 매서운 눈빛으로 그와 대립한다. 그래서 테오는 안느의 이중적인 욕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녀가 리드하는 지점에서는 충분히 청소년다웠던 반면, 안느가 리드 당하길 원하는 순간엔 전동킥보드 뒤에 그녀를 태워 이끌었다. 그래서 상호 욕구가 일치하지 않을 때 테오 역시 안느와 대립한다. 지배자로서 안느는 지금껏 가꾸어놓은 일상이 테오에 의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지만, 소년은 순순히 떠나지 않고 ‘유령’처럼 그녀 주위를 뱅뱅 맴돈다. 이후 그녀와의 관계를 피에르에게 모조리 폭로한다. 결별 직후 피에르는 별장을 떠나거나, 변호사 사무실에 홀로 남는다. 이때 카메라에서 멀리 위치한 안느의 얼굴은 나무에 가리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나간다. 피에르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안느의 의도가 가시화된다.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피에르는 소송을 준비한다. 이로써 그녀 얼굴이 다시금 자신 앞에 나타나도록 상황을 지배한다.

      

지배자의 특권은 타인을 제 욕망화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피에르와 안느는 지배자로서 조건이 불충분하기에 욕망 역시 불완전하다. 피에르는 청소년이기에 보호자에게 지배되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테오의 친모가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들의 구류를 막지 못하는 것처럼, 여성 또한 지배력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사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로 따졌을 땐 지배자임이 확실하나,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권력자임을 망각하는 안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성 역할이자 관행인 '보호자'를 수행해야 한다. 지배자와 달리 보호자는 제 욕망을 유예하며 돌봄을 받는 대상의 욕구에 봉사·희생한다. 변호사인 그녀는 여러 의뢰인 중에서도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인 청소년 피해자들을 전담하기에, 가정 바깥에서도 어머니의 옷을 이어서 입는다. 이런 그녀가 청소년을 유린하는 지배자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여성으로서 지위를 위협받을 것이다. 그녀가 생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보호자라는 옷을 사적에서든 공적에서든 착의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체의 여성은 침대 위에 걸린 액자 속 ‘그림’에만 그친다. 현실의 그녀는 남성 없이도 가운을 걸친다. 그녀로서 생존하기 위해 거짓말하며 테오를 멀리하고, 그와 속전속결로 합의한다. 운전과 동시에 통화를 하려다가 사고가 나는 등 지배에 미숙한 모습을 보인다. 미나와의 ‘자매애’를 테오가 아닌 피에르에게 이용해서 가부장제의 울타리로 되돌아간다. 남편의 품에서 롱테이크로 아주 길게,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분명 여성은 어머니이자 보호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여성의 거부할 수 없는 천성이자 본능은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낸 관행이기에, 여성은 충분히 방탕하고 욕망에 솔직할 수 있으며 잔혹한 지배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안느는 성 관행에 따라 테오를 밀어내지만, 동시에 본능을 택해 테오의 입술에 제 혀를 밀착하고 끝끝내 끌어당겨져 소년과 또 한 번의 섹스를 가진다. 하지만 자연에서 다시 사회로, 피에르에게 되돌아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또다시 테오를 밀어낸다.

즉 브레야는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의 부정직한 욕망과 그녀들 몸에서 샘솟는 솔직한 욕망 사이에서 샘솟는 고뇌를 첨예하게 분석한다. 길게 머물고 싶은 대상과 길게 붙잡혀야 하는 대상을 상징하는 롱테이크, 각기 분리된 프레임의 포개짐과 밀쳐냄의 연속, 솔직한 감정이 드러남과 동시에 상대의 지배가 투영되는 얼굴 클로즈업이 여성과 남성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감각적으로 가시화한다. 그 길고긴 싸움과 방황, 번뇌 끝에 ‘열린 결말’이 놓여 있다. 브레야가 결말은 감상자의 손에 달렸다고 직접 말한 것처럼 침묵할 것이냐 말할 것이냐, 말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이냐, 거기에 여성이 제 몸을 따를지, 아니면 가부장제에 순응할지 그 운명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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