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Apr 17. 2024

엠마누엘 무레,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에로티즘: 위반과 결합과 망각을 오가며

엠마누엘 무레,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 에로티즘: 위반과 결합과 망각을 오가며    

“결혼이란 집안의 재난이요, 그리하여 모든 숙취 후의 나머지 고통이 결혼 생활 속에 온존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분리되어 있던 별개의 두 사람은 어째서 ‘연인’이 되고 하나로 묶이는 것일까?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에 의한다면 사랑은 무언가에 ‘참여’하는 것,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에로티즘은 바타이유에 의한다면 ‘위반의 짜릿한 감각’이다. 이 둘을 합쳐 살펴본다면 ‘사랑은 위반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반에 참여하게 만들어준 대상을 사랑한다. 그런데 대상이 자극한 감각을 느끼는 주체는 나다. 그렇다면 두 연인은 별개로 느낄 텐데, 과연 하나로 묶일 수 있는가? 슈미츠에 의한다면 감각은 신체를 감싸고 엄습함에 발생한다. 그 신체를 감싸는 ‘분위기’는 집단적일 수 있고, 두 연인 또한 함께 참여한 분위기 속에서 감각을 비교적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별개였던 두 연인은 하나의 분위기와 결합한다. 분위기를 위해 협조하며, 좋은 감정을 제공한 서로는 ‘신의’로 묶인다. 긍정적인 감각을 위해 공동으로 요구된 것에 서로는 기꺼이 봉사한다. 그런데 각자가 감각을 받아들이는 민감함이 다르기에, 똑같이 받아들였던 하나의 분위기는 어느 순간 두 가지의 감정으로 양분된다. 또 참여한 분위기의 뉘앙스가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면, 두 연인이 느낄 감정은 충분히 나뉠 수 있다. 같았던 것은 틀어진다. 두 연인은 위반하고 파괴적인 ‘에로스’로 출발하여, 호의적인 결합과 화합을 의미하는 ‘필로스’로 발전하지만, 사랑을 지탱하는 감정이 에로스에서 샘솟기에 두 연인은 위반이 불가능해진 필로스를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끊어낼지 모른다. 그래서 결혼은 길지만 연애는 짧다, 이러한 신의와 위반을 다루는 시네아스트 엠마누엘 무레가 신작,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으로 돌아온다.      


1970년 마르세유 출신의 엠마누엘 무레는 지금까지 줄곧 멜로, 로맨스 장르를 연출해온 프랑스의 시네아스트다. 멜로 영화를 연출한다면 그의 작품은 "아주 감각적이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들 것이다. 그 기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틀린 점은 보통 멜로 영화에서 기대하는 황홀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무레한테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달콤한 사랑 대신, 사랑의 '변덕'에 집중한다. 제멋대로인 감각을 ‘편집’으로 구현한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의 시작은 아주 '짜릿'하고, 또 시작하기 전까진 '두려움'에 벌벌 떤다. 하지만 일단 사랑을 시작하면 감정은 '즐거움'으로 뒤바뀌는데, 한편 그 달큰한 감각은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즐거움은 항상 시들해진다. 또 다가갈 수 없고, 상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없어서 호기심이 일었고 신비롭던 대상은, 막상 다가가서 다 까발리고 정착해보니 평범해진다. 그래서 무레의 작품 속 인물들은 처음에는 그리도 간절하게 여겼던 사랑을 '컷'하고, 이내 곧 다른 ‘신선한’ 연인과 '바람'을 피운다. 헤어지기보단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약속과 법을 위반하는 짜릿하고도 자극적인 감각으로 도약한다. 이에 무레의 편집이 처음에는 '두 사람'을 오갔다면, 이윽고 그 두 연인이 확장하는 '정부들'과 편집이 교차되며 그물망과 같이 구성은 복잡해진다. 즉 무레는 아주 솔직한, 느끼지 못한 '금단'이기에 다가가고 싶은 사랑을 '편집'으로 구현하는 시네아스트이며, 프랑스 멜로극 대선배들이라 할 수 있는 필립 가렐이나 에릭 로메르처럼 여러 장소를 오가지 않는다. 익히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하나의 장소에서 일상을 위반하며 얼마나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이 꽃피우고 엉킬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그 가능성을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에선 도입부의 '물결'을 비추며 암시한다. 무레는 밤의 강물을 비춘다. 강은 도시의 조명을 받아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이윽고 강은 자신의 형체와 색채를 조금씩 변화한다. 때론 뜨겁기도 하고, 때론 차가우며, 잔잔하다가도 조금은 요동친다. 그것이 곧 위반하고 결합하고 다시 위반하며 사랑으로 인도되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같다. 가만히 멈춰있는 법이 없고, 시시각각 기존을 파기하며 변화를 지향하는… 

그렇게 위반하는 인류는 기존의 '맥락'에서 달아나고자 안간힘을 쓴다. 무레는 이를 영화 '구성'에 반영한다. 본 작품이 과감하고 참신한 이유는 감상자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승전결에서 '기'를 생략하고 '승'에서 시작하며, '발단' 없이 바로 '전개'한다. 무레는 주인공 샬롯과 시몬이 어떻게 만났고, 또 어떤 이유로 관계가 진척되었는지, 그 사랑의 '시작'을 비추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불륜'이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기'와 '발단'부터 준비한 관계가 기혼이요, 그렇게 서서히 쌓아나간 토대에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힌 것이 '필로스'라 말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 속한 인간은 처음에는 안정감을 느낄지 몰라도, 이내 곧 권태와 지루함을 느낀다. 그런 인간은 안정적인 맥락을 전격 이탈하여, 예상 불가하게 훅 들어오는 짜릿한 해방감과 경쾌함을 갈망한다. 

그래서 시몬과 샬롯이 선택한 맥락 이탈이 바로 불륜이다. 이들에겐 서로를 붙잡는 결혼의 '약속'이나 '의무' 등이 느슨해야 한다. 그래서 무레는 이들이 만나게 된 이유나 원인, 약속 등을 느슨하게 처리한다. 이후 관계를 유지할 때도 마찬가지다.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고, 시몬이 다시 만날 날을 잡자고 샬롯에게 말해도, 그녀는 잠이 들어 이 약속을 듣지 못한다. 이들은 꼭 만나야 한다는 의무가 자아내는 압박감보다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깜짝 만나는 짜릿함과 즉흥을 바란다.      


무레는 이를 영화 속 상징을 빌려서 말한다. 가장 먼저 '전시'다. 영화에선 인물들이 두 차례 '미술관'에서 데이트한다. 맨 처음 데이트를 한 곳은 20세기 초반의 미술 작품들이 모여 있는 '모더니즘 전시'고, 두 번째로 간 전시장은 19세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낭만주의 전시'다. 그리고 샬롯은 전자는 싫어하는 한편, 후자는 끝까지 감상한다. 전자는 쓰윽 둘러보고 회의 참석을 위해 사라졌다면, 후자에서는 '작품 속'에 참여한다. 양 전시는 결혼/불륜의 각기 다른 특징을 반영한다. 매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모더니즘 미술은 회화의 필연적인 2차원성을 부각하는 '평평함', '물성'만을 '본령'으로 삼고 전개했다. 또 매체의 순수한 고유성을 위해 현실이나 다른 장르에 빚지지 않고, 순수한 시각적 즐거움만을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기의 미술은 "회화란 무엇이다!"라고 아주 단단한 약속을 한 셈이다. 그것은 흡사 의무를 약속하는 결혼과 같다. 결혼을 거부하는 샬롯은 당연히 모더니즘 전시도 허위라며 비난한다.

반면 낭만주의 미술은 이와 다르다. 낭만주의의 특징은 '합리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역으로 '질풍노도 운동'을 일으켜서 예술가 개개의 개성 넘치는 주관성과 요동치는 감정, 영혼, 내면 등을 부각하였다. 이들은 '보편적인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신화나 전설 등에 탐닉하였고, 서구에서의 소재가 바닥나자 아시아로 눈을 돌리며 '오리엔탈리즘' 및 ‘옥시덴탈리즘’을 전개하였다. 즉 낭만주의 미술은 의무나 약속, 본질이나 사명 등을 '이성적'으로 골똘히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위반한다. 이는 법이나 안정성 역시 거부하기에 소용돌이치는 공포와 불안으로 휩쓸려갈지언정, 그렇게 위험이나 짜릿함에 다가서는 생생한 감정과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낭만주의 그림도 그렇다. 시몬은 도시가 아니라 ‘자연’에서 만족하고, 풍경화 또한 외재적인 원리가 아니라 ‘내재적인 원리’로 약동하는 자연, 일상을 초탈한 이상적이고도 이국적인 풍경이 수놓아져 있다. 또 성애, 그것도 이성애가 중심이었던 시대에 레즈비언 커플의 분방한 애무가 묘사되어 있다. 쓰리썸을 하기 위해 루이즈를 미술관에 불러낸 시몬과 샬롯은 이러한 작품들에 참여한다. 구속받지 않는, 계획한 적 없기에 예측 불가능하고 짜릿하며 우발적인 감정을… 

이후 시몬이 루이즈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즉흥적으로 꺼내어 펼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의 단어, 한 문장을 접할 때, 앞뒤 맥락에 맞춰, 처음부터 쭉 읽어온 해당 책의 선형적 흐름을 따라 해석 및 이해한다. 그런데 시몬은 문장이나 단어가 처한 맥락을 '무'로 만들고, 순수하게 단어와 문장의 ‘맨살’만 느낀다. 시몬은 그런 관계를 원한다. 결혼이라는 계약이 증빙하는, 외부의 의무나 책임이 얹힌 ‘맥락에 붙잡힌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내 감정과 대상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탈맥락'적인 사랑을 말이다.      


그런데 위반이 탈맥락이라면, 결국 위반하기 위해서 일련의 '맥락'이 필요하다. 영화 속 시각은 루이즈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거의 샬롯-시몬만 포착된다. 결혼, 불륜이고 나발이고 오직 둘에게만 집중한다. 시각은 둘의 감정에 집중하는 와중, 청각은 조금 복잡하다. 이들은 항상 ‘수다’스럽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둘의 감정, 현재만 얘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 여기의 카메라가 보지 못하는 '과거'나 '타인'을 ‘인용’ 및 ‘소환’한다. 해당 발화가 이들이 일탈하는 일련의 '법칙' 내지는 '규율'이다. 샬롯은 시몬과의 만남을 더 짜릿하게 하기 위해, 또 다른 데이트 상대를 이야기하며, '이중 불륜'으로 자신이 속한 시각을 위반으로 보이게 한다. 시몬 또한 마찬가지로 지인과 나눴던 얘기를 한다. 지인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괜찮아?'라고 묻는다. 하지만 샬롯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지인은 시몬을 생각해서 '괜찮아?'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상성이나 일반성에 맞춰 대상을 검열한 것이라고, 이러한 기준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루이스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각만 본다면 미혼인지 기혼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이후 그녀는 입을 떼서 자신은 유부녀로 남편은 집을 비웠다고 말한다. 해당 말이 얹히자 샬롯과 시몬이 가는 루이스의 집은 분위기가 달라진다. 언뜻 보기엔 그저 아름답고 평온해보였다면, 이젠 '흔적'조차 남기면 안 되는 아찔한 공간으로 변한다. 

즉 위반하기 위해서 법칙과 규율을 끌어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나 책임 등은 '청각'이라서 느슨하고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빽빽한 것을 청각으로 무효화시키고 대신 구체화하는 것은 불륜하고 쓰리썸하는 이들의 시각이다. 두 연인의 결합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구체화하는 시대 속에서, 이들은 위반과 짜릿한 바람을 구체화한다. 이로써 개인의 감정, 솔직한 쾌락이 단단해진다. 반대로 결말에서, 헤어진 루이스와 시몬은 재회한다. 이들은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갔거나 꾸렸다. 이때는 잉마르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이 구체적으로 보이고, 이들의 회고가 쉽게 흘러가고 지나가버리는 청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외부의 법을 위반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유한한 나 자신'도 위반한다. 이로써 나 혼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을 확장한다. 시몬과 샬롯은 정 반대의 성미를 지녔다. 시몬은 계획적이고 소심하며 세심한 한편, 샬롯은 즉흥적이고 과감하며 외향적이다. 도입부, 샬롯과 시몬이 위치한 술집에선 죄다 연애중이다. 그래서 속된말로 '쫄보'인 시몬은 눈치를 계속 살피긴 하지만, 주변인들이 다들 연애를 즐기니, “모두 다 연애를 한다면 나 또한 괜찮지 않을까” 싶은지 서슴없이 데이트한다. 그런데 샬롯의 집에 방문하니, 따라할 대상이 없어서 두려워진 모양인지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서성댄다. 그러나 주도적인 샬롯이 그를 리드하여 둘은 한 침대에 눕고 이불 속으로 정열적으로 다이빙한다. 즉 시몬 스스로를 위반하여 샬롯에게 몸을 맡긴 덕에 그 혼자서는 불가능한 짜릿함을 경험했다. 이는 샬롯 또한 마찬가지로, 준비성이 철저한 시몬이 '콘돔'을 지니고 있었고, 공간을 세심하게 잘 살피는 시몬 덕에 'CCTV 아래서의 키스', '전략'을 세운 사랑 등을 경험한다.      


또 이들의 사랑은 한때 법적으로 '금기시', 여전히 도덕적으로 '터부시'된다. 주변에서 입을 모아 하지 말라고 제동을 거니, "과연 그것이 뭐길래?"하는 '호기심'과 '신비로움'이 일어 더 해보고 싶어진다. 지금껏 넘어선 적 없는 금기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을 전해줄 것만 같다. 무레는 금기라는 ‘장애물’을 영화 속 여러 장치로 보여준다. 일단 공간을 ‘평면적’으로 포착한다. 수직적, 곧 3차원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구도가 입체적이고 유연하다면, 평면적인 구도는 뻣뻣하고 제한적이어서 본 작품에선 '기둥'이나 '구조물' 등이 시야를 방해하고, 서로를 차단한다. 가로막힌 이들은 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다. 시몬과 샬롯은 거리에서 달리기를 한다. 그런데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두 여인의 줄이 엉켜서 '줄넘기'처럼 이들의 동선을 방해하고, 이후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려니 '이삿짐'이 거리와 문을 가로막는다. 금기시된 곳에 가고 싶어서 안 그래도 안달이 났는데, 이를 더더욱 가로막고 있다면, 사람의 간절함은 배가 된다. 그럼에도 하고야 마는 위반은 '옆 차선'과 '중앙선'을 아슬아슬하게 침범하는 '곡예운전'이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이 목 끝까지 닥쳐온다면 더더욱 삶에 대한 간절함과 농밀함이 배가 되는 법이다. 위반해서 극한의 감정을 느끼려는 이유,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더라도 ‘살아있다는 것’, ‘솔직한 내 삶’을 느끼기 위함이다. 

두 사람의 배우자를 넘어서 세 사람의 배우자가 엮이게 된 '쓰리썸 불륜'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혼자선 불가능한 경험을 선사하는 '위반의 동지'는 함께 있어야 하기에 이들은 롱테이크,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긴다. 이들은 결혼이란 항구적이고 지긋지긋한 롱테이크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그렇게 위반한 서로한테 길게 머무르고 싶다. 상대가 자신의 프레임에서 멀어지려 한다면 아기 새처럼 버선발로 좇아가서 함께 머문다. 그런데 시몬 아내의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져서 프레임이 나뉘게 되거나, 또 각자의 '공적인 삶' 때문에 '사적인 삶'이 중단된다. 시몬은 샬롯이 직장에 방문하길 원치 않고, 샬롯은 회의 때문에 시몬을 잠깐 보고 만다. 또 이들은 서로의 몸에 클로즈업하여 밀착하고 싶다. 시몬이 이 관계에 확신이 없을 때는 그가 아득하게 작아지는 '롱숏'에 담겼다면, 샬롯이 확신을 주자 이들은 바스트숏, 클로즈업으로 가까워진다. 공원에서 시몬이 손을 샬롯의 배 부근에 올릴 때는 '거인의 손'인 것 마냥 익스트림 크로즈업되어 서로는 가깝고 거대해진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를 보고 낄낄거려서 다시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부도덕한 관계임에 함께 있는 프레임이 나뉠 수밖에 없거나, 상대의 시선이나 몸에서 내가 멀어짐에 이들은 다가가고 싶어진다.     


어찌됐든 이들은 롱테이크에 담긴다. 잘리긴 하더라도 한 번 담길 때는 비교적 긴 호흡이 유지된다. 그렇게 서로가 항구적으로 이어지다보면, 머물 수 없어서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이 줄어들지 않을까? 이들의 대사처럼 "열린 괄호는 언젠가 닫히게 된다." 시몬의 아내가 주말을 통으로 비워 시몬과 샬롯은 꽤 오랜 시간 데이트를 즐긴다. 간헐적으로 만날 때는 서로에게 달라붙고 싶은 롱테이크였다면, 정작 토요일과 일요일을 통으로 쓰자 숏의 길이가 아주 짧아진다. 흘려보내도 좋다는 듯이, 이제 '길게' 머무를 수 있으므로 '파편'만 간직해도 좋다는 듯이…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처음에는 아찔하고 아슬아슬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들키지 않는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자, 루이즈도 첫 만남에서 샬롯과 시몬이 단번에 연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즉 위법으로 시작했을지언정, 같이 있고자 길게 머무르면 이는 곧 ‘낡고 시시한 통속’이 되어 ‘새로운 위반’을 꿈꾸는 법이다. 시몬과 샬롯은 루이즈를 데려와 '이중 위반'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이중 위반을 시도해야지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관계라면, 지금 둘의 상태로는 무언가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얘기다. 시몬과 샬롯은 3주 동안 못 보게 되었다. 서로에게서 멀어졌는데, 영화의 카메라는 '줌인'으로 그들의 얼굴에 '엄습'한다. 무엇이 가까워진 걸까, 서로에게서 해방되면서 '자신'이? 아니면 '이별'이 그들에게 닥친 것일까? 그 3주 동안 샬롯은 루이즈와 관계를 진척했다. 지금껏 남성과 관계를 맺던 샬롯은 여성 루이즈와 레즈비언이란 지향성으로 이탈하며 새로운 감각을 느낀다. 샬롯에게 시몬이란 존재는 루이즈와 자신의 관계를 방해할까봐 불안한 시선으로 곁눈질해야하는 '연적'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위반으로 시작했을지언정 그 관계가 길어지면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상대가 내게 '방해꾼', '미저리' 수준으로 격하된다. 그래서 이별 당시 샬롯은 시몬에게 "이혼해줘"라고, 시몬은 샬롯에게 "이별을 다시 생각해줘"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해지면 더는 이를 지속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법이요, 오히려 그 곁을 떠나야만 내가 해방된다.

이후 이들이 머물던 전시회, 숲, 유적지 모두 다 ‘텅 비게’ 된다. 이후 2년 뒤에 재회한다. 당시에는 헤어져야 한다는 순리를 따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정말로 당시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까? 아니다, 이들은 서로가 공간을 한가득 채우던, 그래서 권태로웠던 기억을 망각했다. 이제 환기되는 것은 서로의 '공백', '빈자리', 다시금 불가능해진 서로이기에, 지금에 와서 당시에 순리를 거슬러야 했었다고 후회한다. 즉 ‘망각’은 가능했던 감각을 지워내고 쓸어내려 불가능이라 호도하고, 당시에 확고했던 생각을 아스라하게 지워내며, 그렇게 불가능하게 된 관계를 다시 잇게끔 유혹한다. 이제 샬롯은 루이즈를 배신하고 시몬의 손을 잡고 역으로 내달린다. 여기를 떠나 자연으로, 지금을 떠나 유적지로 향하며… 

이렇게 무레는 여전히 위반-결합을 오가는 사랑의 본질, 그래서 영영 '뱃사람'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연인들을 탐구한다. 지루해진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위반하고, 그 위반의 동지와 달라붙지만 그 과정에서 민감했던 감각은 둔감해지고, 결국 또 다시 그 곁을 떠났다가 시들해진 관계와 권태라는 기억을 시간이 '망각'시켜줬을 때 우리는 다시 기존의 결정을 번복하고 옛 연인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인간은 위반과 결합, 그 사이의 망각을 오갈 수밖에 없으리. 무레는 이를 현란한 영상 언어로 풀어냄과 더불어, 꽤 '곱상하다'고 말할 법한 미장센을 발전시켜 위반이 자아내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항상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층 발전된 무레의 도약이 느껴지는 신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리체 로르바케르, <키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