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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19. 2024

소피아 코폴라, <프리실라>

사랑에 홀린 여자는 다리를 잃었다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프리실라>(Priscilla) 

- 사랑에 홀린 여자는 다리를 잃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치 혜성처럼 미국 대중음악계에 등장해 당대의 여심을 뒤흔들었다. 그를 바라보며 전율하던 여성은 나이가 불과 14살에 불과하던 '프리실라 앤 볼리외'를 포함하였다. 그를 애달프게 선망하던 여러 여성들 가운데서 프리실라는 가장 운이 좋았다. 부모님의 인맥 덕분에 엘비스와 접촉할 수 있었고 이후 교제를 이어갔으니 말이다. 첫 만남 당시에는 행복했다. 쉽게 닿을 수 없는 유명인을 만났다는 경험과 더불어, 엘비스의 위트와 재력은 그녀를 안락하고도 즐겁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1973년 엘비스와 이혼하였고, 이후 1985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엘비스와의 교제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청소년과 성인의 연애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와 푹 빠지지 않고서는 못 배길 섹스심벌과의 사랑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그녀를 도취시켰지만, 훗날 이성적이고도 도덕적으로 검토해보니 쾌락은 끔찍함으로 뒤바뀌었다. 서서히 깨어나는 프리실라의 시야와 자아를 그녀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소피아 코폴라가 <프리실라>로 영상화한다.      


일반적으로 카메라는 피사체의 물질, 표면, 외관을 반영하는 기기다. 카메라는 물질을 꿰뚫고 들어가서 영혼이나 감정, 내면 등을 들춰내기 어렵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이용한 사진이나 영화에 기대하는 것도 호화스러운 물질이라 하겠다. 비가시적 영역을 재현하는 역할에 있어선 타 매체의 장점이 더 크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라를 가지고 비가시적 영역, 측량할 수 없는 요소에 주목하는 시네아스트도 있나니, 그 중 한 명이 바로 소피아 코폴라다. 

1971년 뉴욕 태생의 소피아 코폴라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며, 20세기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이기도 하다.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이니 만큼, 부친과 유사한 장엄하고도 방대한 규모의 블록포스터를 연출하지 않을까 자연스레 예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아버지가 탐구하는 거시적인 역사엔 별 관심이 없다. 그녀의 관심은 지극히 미시적이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역사극을 연출할 때도 개인의 '심리'만 파고든다. 물론 소피아가 탐구하는 여성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파헤치다보면, 자연스레 그러한 감정의 기원인 ‘가부장제’가 드러나며 거대한 제도를 간접 비추긴 하지만 말이다. 외에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느낄 수 있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어지러움과 낯섦, <썸웨어>에서의 권태나 외로움, <블링 링>에서 10대들의 반항심 등 그녀의 관심은 지극히 내면적이요, 호사스러운 물질은 그 수면 아래를 들춰내는 수단에 그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엄격한 고증을 포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소피아의 관심은 물질이 아니라 감정이나 분위기, 뉘앙스 등이요, 그래서 그녀의 영화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다.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감히 이성으로 유추하기 어려우며, 그저 느낌의 물결에 눈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의 영화는 무척이나 심미적이기에 “물질에도 관심이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아름다운 물질은 내면의 가시화일 뿐이다. 그녀의 카메라가 일차적으로 포착하는 피사체는 인간이 아닌 이상 그 배후나 얽혀있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 이제 소피아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내면을 비추기 위해 카메라를 송곳처럼 날카롭게 조정한다.      


본 작품은 도입부터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라는 것이 확연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블링 링>, <매혹당한 사람들>처럼 ‘붉은 색채’의 향연이 감미롭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피아는 '익스트림 클로즈업'까지 활용하여 감상자의 눈을 잡아끈다. 그녀는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아주 가까운 근거리에서 프리실라의 발과 자줏빛 카펫, 그리고 눈동자를 포착한다. 여기서 발과 눈이 카메라와 가까운 이유는 그야말로 다가서거나 보고 싶은 순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이 내딛은 카펫은 자줏빛이요, 촉감은 아주 푹신푹신하다. 서구 역사에서 자줏빛 염료는 구하기 아주 어려워서 '고귀한' 색채로 일컬어졌고 교황이나 황제 등 고위직들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푹신푹신한 자줏빛 카펫은 프리실라의 인생을 고양할 것만 같다. 실제로도 도입부는 프리실라가 엘비스와의 결혼식을 앞둔 장면인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녀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보던 희소한 욕망이 마침내 물질로 실현되어 눈꺼풀을 열고, 길고긴 기다림 끝에 성취한 욕망은 크나큰 행복으로 그녀를 휘감으리라. 

그래서 감미로웠던 도입부,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짧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할 색감이 뿜어내던 쾌는 어느 새 사라진다. 왜냐하면 영화는 '플래시 포워드' 구성을 취하며 프리실라가 결혼하게 된 과정까지 거슬러 내려가는데,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권태로웠다. 그녀의 발과 눈에 밀착하던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먼, ‘미디엄 숏’과 ‘풀 숏’ 수준으로 카메라는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물론 그와 만나거나 재회할 때, 카메라는 그녀를 다시금 줌인한다. 그러나 당시 엘비스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 무수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기에, 또 청소년이었던 프리실라는 학업에 집중해야 했기에, 만남은 짧았고 이별은 필연이었다. 그렇게 엘비스와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여 그와의 재회만을 고대할 때, 소피아는 프리실라를 하단 모서리에 소외시켜 공허한 ‘헤드룸’을 부각하거나 심지어 아예 그녀를 포착하지도 않는다. 그와의 만남을 증언하는 딱딱하고 차가우며 무감한 '사물'들만을 삭막하게 포착할 뿐이다. 즉 욕망의 성취/불발이 우리의 감각을 좌우하며, 소피아는 거리감과 피사체의 유/무를 활용하여 욕망의 정서를 가시화한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녀의 욕망은 분명 연인한테 다가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피아의 카메라는 프리실라의 눈에 가까워지는 엘비스 대신, 그녀의 육체에 접근한다. 그 이유는 욕망이란 객관적인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꿈꾸던 상대방, 곧 나의 주관적인 소망과 상상에 가까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객관적인 엘비스의 외관이 아니라, 그녀의 표정이 드러나는 얼굴이란 ‘통로’에 다가선다. 프리실라와의 첫 만남에서 엘비스는 그녀에게 구애하듯, 리드미컬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다. 그 과정에서 소피아는 엘비스 대신 프리실라를 줌인한다. 프리실라는 그에게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성사된 그와의 만남을 통해, 두근거리고 들뜬 자신의 감각과 가까워졌다. 물론 자신만의 즐거움은 아니다. 엘비스는 많은 손님들이 모인 거실에서 연주를 하고 있으니,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엘비스는 오직 프리실라만을 위해 윙크한다. 프리실라와 더불어 당시 무수한 엘비스 팬들은 그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이로써 무수한 연적들과의 혈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자신의 모습을 꿈꿨을 것이다. 그 환상을 프리실라가 성사했나니 비로소 그녀는 클로즈업되어 헤드룸을 물리치고, 프레임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제 인생의 떳떳한 주인으로서 당당해진다. 그래서 프리실라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또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좋아하기에, 엘비스의 진실은 그녀를 구속하거나, 심지어 이따금 폭력적으로 굴기에 말이다. 

즉 소피아는 여자의 사랑이 주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진단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느끼는 우월감, 당당함, 만족감과는 달리, 실제 그녀들의 객관적인 상태는 취약해지고 수동적으로 퇴보하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프리실라가 '군인' 집안의 자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그녀가 연인에게 기대했을 감각을 고찰한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여성이나 아이, 노인 등의 ‘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이 대가로 그들에게 힘과 부, 명예를 허락한다. 이 가부장제는 극도로 군사화된 사회에서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평화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베티 리어든'이 밝힌다. 군인의 수가 많거나 징병이 되어야 할 정도로 약자에게 취약한 사회일 경우, 그만큼 그들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가장이나 군인에게 향하는 사회적 비용이 커져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만든다. 또한 군사화된 사회에서 약자는 더더욱 취약해지는데, 군인 및 가장은 힘을 가짐으로써 약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무력으로 약자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요, 가부장제는 약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약자가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약자, 곧 가부장제의 여성은 남성을 위해 계속 나약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군인 집안의 여성은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영화 내 묘사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프리실라가 엘비스와 만나기 위해선 무조건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여성은 그들을 보호하는 남성에게 감히 일언반구도 할 수 없다. 도입에서 어쩌다 남성과 단 둘이 대화를 하는 순간 프리실라는 위협을 느낀 듯 불안해한다. 결국 남성을 설득하는 것은 또 다른 남성이자 군인이자 가장인 엘비스다. 여기서 아버지는 프리실라를 위협하거나 억압하기에, 그녀가 엘비스에게 기대하는 감각은 해방감과 안락함 등이다. 

그래서 가부장제에 속한 여자는 아버지의 규제를 철폐해주고, 또 그와 맞서는 강인한 남자에게 홀딱 반한다. 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연인은 부드럽고 감미로워야 하며, 이와 동시에 그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 그런 엘비스에게 프리실라는 홀린 듯 빠져들지만, 소피아는 그 사랑의 함정을 고찰한다. 바로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자신의 발과 다리를 잃는다며 말이다. 본래 아버지에게 귀속된 프리실라는 그가 허용한 학교 외의 외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학교 외의 장소로 초대하는 엘비스는 제 다리를 다시금 접합해주는 의사와 같았으며, 이에 엘비스와 만날 수 없을 때 사물이 그녀를 대신 반영한 것이랴. 사물은 그 자신에 의해서 작동하거나 이동하지 않고,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목적에 따라 운동이 결정되니 말이다. 그래서 엘비스와 교제 및 동거해도 프리실라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당장 고향에서 그녀는 주체적으로 엘비스에게 걸어갈 수 없고, 그의 초대와 아버지의 허락을 무기력하게 기다려야만 한다. 파티에서 다수가 북적거리는 거실을 떠나 엘비스가 독점적인 침실로 향할 때도 마찬가지며, 그와 멤피스, 라스베가스 등지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후반부에 그녀는 엘비스의 월드 투어에 따라 나서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치지만, 그와 달리 그녀는 주체적으로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할 수 없다. 엘비스와의 관계가 진척되면 진척될수록, 프리실라는 엘비스가 허용한 '침실'에만 더 폐쇄적으로 갇힌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야외를, ‘창밖’을 동경한다.     


소피아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다리를 잃어가는 이유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프리실라가 엘비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입대할 정도로 장성한 성인인 반면, 그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너무 어린’ 미성년자다. 그렇기에 둘의 관계는 두 주체의 동등한 만남이 아니라, 사회에서 입지를 다진 남자가 취약한 미성년자이자 여자를 보호해주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해 프리실라에게 엘비스는 대리인이자 보호자다. 엘비스의 화려한 언변에 설득된 아버지가 딸의 멤피스 이주를 허락하였다. 아버지는 프리실라의 독립이 아닌, 믿을만한 보호자에게 그녀를 위탁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미성년자였기에 성인이 되어가며 주체적으로 변할지 모르지만, 남자의 울타리에 갇힌 여자는 나태해지고 취약해져 성장을 꿈꾸지 못한다.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의존할 때, 그녀의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마스카라는 질질 흘러내린다. 이는 자신의 행색이나 몰골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로, 왜냐하면 그렇게 엉망인 자신이어도 보호자이자 대리인인 엘비스가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엘비스는 프리실라에게 약을 먹여 거동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디렉팅’이 그녀 육체에 반영되도록 유도하며,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시 폭력을 사용해 자아를 꺾는다. 프리실라의 성장은 엘비스를 만난 그 순간에 멈춘다. 그녀가 학업에 성실할 때, 비록 실패할지언정 부모에게 제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였다. 학교는 미성년자들이 사회에서 성숙하고 주체적인 구성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사회화하는 기관이요, 졸업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판가름한다. 이에 사랑에 푹 빠지지 않은 프리실라가 졸업 기준에 서서히 다가갈 때, 그녀는 다른 구성원과 동등한 자신의 권리를 떳떳하게 피력하였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그녀는 학업을 소홀히 한다. 이전까지는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가꿔 독립하고자 하는 야망이 컸더라면, 이젠 그 욕망을 엘비스가 대신해주니 더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엘비스의 권위를 빌려 친구의 시험지를 컨닝하고 겨우 졸업하는 장면에서, 프리실라가 건강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등한시하고 엘비스에게 과하게 기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에게 의존하는 그녀는 자신의 정서 대신, 엘비스의 비위를 고분고분 맞춰가며 그를 가꾼다. 

즉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자신을 소홀히 하고, 대신 제 삶을 보장하는 남성에게 충성한다. 가부장제에 의해 사회 참여가 허락되다 못해 드넓게 보장된 남성은 욕망을 집 너머로 확장시켜간다. 엘비스의 남근은 집안에 놓인 프리실라를 넘어 더 많은 여성에게 접근하고, 정신은 부와 명성을 초월하여 종교, 철학적 사색으로 뻗어간다. 엘비스가 마약에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욕망에 통달했나니, 이제 초현실의 욕망에 닿길 원한다. 그가 영향력을 설파하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일맥상통한다. 엘비스는 제 몸엔 조금의 불만도 없다. 그의 입과 배를 만족시켜줄 음식이 시간마다 대령되고, 그의 쾌락을 자극시켜주는 프리실라가 적재적소에 위치해있나니, 이제 그의 야망은 제 몸 너머의 타인에게로 향한다. 그는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주길 욕망한다. 그래서 엘비스는 타인을 뒤흔들 수 있는 '권총', '불도저', '경전' 등을 들고 설친다. 그런 남성은 '파일럿 복장'을 입고, 헐리우드를 넘어서 드넓은 세계로 나아간다. 그래서 여성은 불안하다. 제 목숨을 쥐고 있는 남성이 자꾸만 바깥을 나돌기 때문이다. 여성은 욕망을 남편 너머로 확장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엘비스가 마음이 식을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날까, 시선은 엘비스에게 고정되어 있고 질투심이 훨훨 불탄다. 이에 그에게 아이를 안겨다주어 만족시켜주려는 나머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배는 점점 더 무거워지며 거동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젠 엘비스가 의자를 집어 던지거나, 침대 위에서 폭력적으로 대응하더라도 감히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즉 가부장제에서 남성의 영향력은 본인에게 좋은 반면, 여성의 영향력은 남성에게 좋다. 남성의 영향은 제 욕망을 성취하는 반면, 여성의 욕망은 남성을 위한 희생으로서 그녀들은 그들을 위한 ‘아내’ 및 ‘비서’로만 유효하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건재했던 20세기 미국에서 미성년자 여성과 성인 남성의 사랑을 그 누구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것이라고 소피아는 본다. 그와 첫 만남 당시 프리실라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서 주체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웠고, 엘비스 같이 권위적이고 화려한 언변을 가진 남성에게 쉽게 그루밍 당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신장에 있어 엘비스를 연기하는 제이콥 엘로디는 196cm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거구인 반면, 프리실라를 연기하는 케일리 스패니는 155cm로 체격이 왜소하다. 이렇게 소피아는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감히 대항하지 못했을 것이란 걸 가시화하고, 그런 여성이 남성에게 필요했기에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 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그 유약한 정신과 신체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 하에 프리실라의 몸과 마음은 엘비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가 좋아하는 머리색깔과 의상이 마네킹처럼 입혀지고, 그녀 자신은 아직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며, 오직 그를 위해서 행동할 것이 강제된다. 

하지만 후반부에 프리실라는 자유롭게 운전한다. 그녀는 도장으로 향해 가라테를 배운다.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또 청소년기에 그녀는 엘비스와의 연애와 약물 오남용으로 인해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눈과 귀가 마비되고, 다리가 절단되다시피 묶인 그녀가 들을 수 있는 말이란 오직 엘비스의 발화만이 유효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사교'를 즐긴다. 엘비스가 아닌, 다양한 타인들의 관점과 소신을 접하며, 엘비스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의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법을 배워간다. 엘비스의 세계에 충성하는 것이 마냥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친 프리실라는 그가 자신에게 시도하는 부부강간을 뿌리치고, 또 엘비스에 의해 검게 칠해진 자신의 머리칼을 본래의 색채, 갈발로 되돌린다. 즉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정신과 신체를 만들어가며 프리실라는 엘비스에게 이혼을 고한다. 

소피아는 이번에도 달콤한 영화를 연출했다. 누구나 꿈꿔볼 법한 희소한 욕망이 성취되었기에, 그에 걸맞은 감미로움과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어째서 촉발되었는지, 그 관계와 현장에 오직 쾌만 있었는지를 동시에 의심한다. 거기엔 부조리와 불쾌가 있었으며, 이를 감미로움으로 뒤바꾸는 성차별적인 가부장제는 구밀복검이었다. 그 달콤함에 젖어 남성의 손아귀에 잠식되어갈 때, 여자는 다리를 잃는다. 그렇게 남의 다리를 자르는 남자는 결코 여자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나니, 달콤한 같은 백일몽에서 깨어나면 자신을 둘러싼 마수에 소스라치게 놀랄 지어다. 결국 여성 스스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각성을 요하고, 그것이 실현된 결말만이 진정한 여성의 쾌다. 다만 그 각성이 다소 갑작스럽게 발생하기에 설득력이 모자라다. 물론 이 전개는 자유로운 여성은 예고 없이, 대뜸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아쉬운 점은 러닝타임 4/5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폭발하는 프리실라의 일탈을, 지금껏 꾹꾹 눌러온 만큼 더 에너제틱하게 연출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돌함과 발칙함이 사라진, 다소 점잖아진 작금의 소피아는 그 치기발랄하고 도발적인 프리실라의 이혼 통보 정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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