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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14. 2024

엠마누엘 니코, <러브 달바>

가부장제의 가스라이팅

엠마누엘 니코(Emmanuelle Nicot), <러브 달바>(Love According to Dalva) 

- 가부장제의 가스라이팅  

“무엇보다도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가렛 에트우드-

수천 년간 여성을 괴롭혀온 가부장제는 오늘날에 비교적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제가 공고한 국가들이 있나니, 해당 나라들의 특징을 보자 하면 대내외적으로 치안이 흉흉하여 '군사주의'를 띤다. 이를 페미니즘 및 평화 연구가인 '베티 리어든'이 연구해왔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좁게는 가정, 넓게는 공동체와 사회를 책임질 수 있는 '가장'이란 특권을 부여한다. 가장은 보호를 명목으로 지배 및 통솔하기에, 약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는 흉흉한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강하게 나타나고, 대내외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국가는 사회적 가장인 군인에게 많은 사회적 비용을 부과하기에 군사주의적 체제를 갖춘다. 이 가장들은 불안한 치안에서 쉽게 표적이 된 여성들을 보호해주겠다고 선언해왔다. 이 말은 곧 가부장제가 당위성을 위해 수동적이고 연약한 여성을 필요로 했다는 것, 많은 사회적 비용과 권력을 거머쥐는 가장이 되기 위해 남성이 의도적으로 여성을 위협하다는 얘기도 된다. 즉 가부장제에서 가장이자 군인은 명목 상 '보호하는 자'이지만, 정작 뒤에선 가장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를 흉흉하게 어지럽히는 '위선자'다. 여성은 유약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약해져야만 했다. 이렇게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남성의 가스라이팅과 여성의 위기를 엠마누엘 니코가 <러브 달바>에서 탐구한다.      


1985년 아르덴 주 세당 태생의 엠마누엘 니코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벨기에의 Institut des Arts de Diffusion을 졸업한 그녀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오가며 활동하고, <러브 달바>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다. 니코는 <러브 달바> 이전 <납치>(Snatched)라는 단편을 연출하였는데, 그녀는 단편에서도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하는 '통제'에 주목했고 이를 장편에서 길고 깊게 확장하는 것이다. <납치>에선 벨기에 영화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Institut des Arts de Diffusion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2년 전 개봉한 <플레이그라운드>를 연출한 로라 완델 역시 Institut des Arts de Diffusion을 졸업했는데, 니코 또한 <납치>에서 <플레이그라운드>와 유사한 핸드 헬드와 롱테이크를 접목한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해당 연출은 다르덴 형제, 루카스 돈트 등 오늘날 벨기에 영화를 선도하는 시네아스트들이 일찍이 보여줬는데, 니코는 벨기에 영화의 보편적인 연출을 따르되 무비판적으로 사용하진 않고, 자신이 탐구하는 소재에 맞추어 활용한다. 

니코는 잘리지 않는 길고 긴 롱테이크로 가부장제의 '집착'을 가시화한다. <납치>의 주인공 알리오와 라이사는 위탁 가정에 함께 머무는 단짝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알리오가 말도 없이 라이사의 곁을 떠나는데, 알리오는 남자친구 레니에 의해 임신하여 그와 머물기 위해서라고 둘러댄다. 알리오의 이 같은 발화는 오롯이 자의가 아니다. 그녀들은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아요, 경제 활동에 오롯이 참여할 수 없는 미성년자이기에 아주 불안정하다. 가부장제가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남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임신하여 육체적으로 취약해진 그녀는 레니에게 반강제로 납치를 당하고도, 그를 변호한다. 알리오는 레니에게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심지어 건강보험카드 또한 그가 쥐고 있는데도, 이 같은 부조리를 가부장적인 사회는 '합법적인 제도'라 말한다. 

이런 와중에 라이사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꽤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게 여성이 유능해지고 강인해져 더는 남성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당당하게 그들의 부조리에 맞서 알리오를 구출하러 온다. 한편 라이사 또한 힘을 지니니 알리오에게 과하게 집착하는데, 니코는 권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부장적인 태도를 경계한다. 여성이 가부장제를 극복하고 펼칠 관계는 서로 구속하지 않는, 동등하고 주체적인 연대여야 함을 내세운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게 향하는 돈, 특히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는 초년생의 권력은 미미하다. 알리오는 낙태 비용을 구하기 위해 남성에게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고, 라이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딜레마에 빠진다. 남성의 품에서 달아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그녀들의 경제력은 미약하기에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남성에게 귀속되며, 가부장제는 합법적으로 여성을 납치한다.      


니코의 장편에서도 가부장제는 여성을 위협한다. 도입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없지만 달바와 자크가 서로를 목 놓아 외치는 절규만큼은 확실히 가득하다. 청각만으로 서로는 매우 절절해 보이고, 둘을 갈라놓으려는 어떤 완력이 악역으로 유추될 정도다. 이윽고 카메라가 그들의 집을 포착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매우 드물다. 촬영에 사용된 위급하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와 이로 인해 촉발된 불안정한 '아웃 포커싱'이 본래 선명하던 피사체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집은 원래도 매우 어두컴컴하니 숏이 펼쳐져도 보이는 것이 당최 없다. 특히 주인공 달바의 신변과 부녀의 정확한 관계를 도무지 볼 수가 없다. 자크는 이혼 당시 양육권을 놓고 소송 중이던 전 부인으로부터 딸을 강탈했다. 니코의 단편에 이어 가부장제는 여전히 여성을 납치한다. 이후 딸을 가스라이팅하여 아동 성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질렀는데, 위험한 인물 자크 곁에서 당연히 달바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녀의 자아나 정체성을 침탈하기에 보이지 않거니와, 자크는 이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게끔 철저하게 은닉하기에, 달바는 어둠 속에 가려진다. 그래서 달바가 자크를 애달프게 부르며 친부의 손을 놓지 않을 때 영화 전체가 어둠 속에 파묻힌 것이 이해가 간다. 이후 경찰에 의해 억지로 달바가 자크와 분리될 때, 비로소 그녀는 잘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자크의 어떤 전략이 달바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가? 자크와 분리된 달바는 보호소로 옮겨진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땐, 달바가 위험에서 해방된 셈이다. 그러나 달바는 보호소에서 역으로 공포를 느낀다. 극의 후반부까지 직원 제이든에게 '무섭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이에 건장한 남성 제이든에게 구애하거나, 자기보다 키가 훌쩍 큰 셰리프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동등한 관계를 맺기 적합한, 쬐끄만한 꼬맹이의 손길은 거부한다. 달바는 우람한 남성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어 불안이 해소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달바의 기대는 실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셰리프가 달바에게 접촉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직원들이 둘을 분리하고, 제이든은 달바와의 접촉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에 항상 경계한다. 즉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여성에게 다가온 남성은 안전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위험을 안긴다. 니코는 달바가 자크와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수차례 비추며 그 사실을 부각한다. 달바는 귀를 막고 자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다 '교통사고'가 날 뻔 했다. 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베란다 난간'을 타며 위험천만하게 보호소를 탈출한다. 이후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흉흉한 풀숲을 거치거나, 불꽃이 튀는 아찔한 '공사 현장'을 관통하며, 그렇게 겨우 돌아간 집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곳곳에 널려 있다. 

즉 남성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여성은 위험천만해진다. 이렇게 위태로운 환경을 조장한 남성은 가증스러운 가면으로 면상을 바꿔치기 해 이젠 그녀들을 '사랑'한다고 호소한다.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가 말하길, 애정은 '내게 좋은 것', '필요한 것'을 느꼈을 때 샘솟는다. 이런 관점에서 달바가 자크 및 건장한 남자들에게 집착하는 이유 또한 참혹한 환경에서 자신을 포근하게 보듬어주며 보호해줬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거기서 샘솟는 감정이야 말로 달바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범죄학자 ‘개빈 드 베커’는 달바와 유사한, 폭력적인 남성 곁에서 범죄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도망치지 못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그녀들의 의아한 행동의 원인은 폭력이 지속되다가 이따금 멈출 때 발생하는 '안도감'이 매우 자극적이고 중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적인 남성을 방치하고, 또 위태로운 자신의 경제적 입지 또한 내버려둔다. 위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에 비례해 안도감 또한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달바가 자크와의 관계에서 느낀 성애적 감정의 기원이라 추측할 수 있다.      


즉 여성은 고의로 위기를 촉발한 남성에 의해 뒤틀리고 왜곡된 취향을 갖게 되었다. 이에 중독된 여성은 폭력적인 남성이 제 곁을 떠나는 것을 모순적으로 두려워한다. 고로 그 남성의 눈에 차 영영 곁에 머물게끔 '코르셋'을 단단히 조인다. 코르셋은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서 그들의 눈에 심미적으로 봉사한다. 달바는 영화 내내 아주 짙은 화장과 또래 아이들의 시선에서 촌스러운 복식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런 용모로 변신할 수 있는 도구를 자크가 ‘선물’했고, 이는 보호소 내 남자애들도 선호하는 눈치다. 그 소년들은 단순히 시시덕거리며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며 '성희롱'한다. 또 잔뜩 꾸민 달바의 곁으로 접근한 셰리프가 그녀의 가슴 부근을 접촉하려 하며 ‘성추행’을 시도한다. 즉 남성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서 선택한 코르셋은 되레 그녀들에게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온다. 보호를 과시하는 남성들의 이면에는 고의로 그녀들을 위험에 방치해놓은 범죄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들은 범죄자에게 보기 좋은 용모를 선택한 것이다.

니코는 코르셋을 찬 여성의 위기를 편집으로 가시화한다. 영화 내내 화장을 짙게 하고, 머리에 잔뜩 힘을 주며, 외설적인 의상을 입는 달바는 다음 숏에서 폐쇄적이거나 위협적인 환경으로 필히 진입하게 된다. 가령 학교에 갔을 때, 교칙 상 야시시한 의상을 포기해야 하지만 화장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 용모는 니코를 널따란 교실이 아니라 좁디좁은 화장실로 고립시킨다. 또 자크와 면회하러가는 과정에서 달바는 평소보다 더 짙게 화장한다. 오랜만에 만날 자크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코르셋을 꽉 조인 달바에게 사방이 벽과 철창으로 꽉 막힌 폐쇄성이 이어진다. 여성이 코르셋을 타파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코르셋을 위시한 여성의 미적 기준이 그녀들의 사회 진출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었음을 니코의 편집이 가리킨다. 그래서 가장이 악의적으로 선물해준 의상 대신, 룸메이트 사미아가 빌려준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을 때, 또 염색한 머리를 잘라버리거나 차츰 화장을 지워갈 때 달바가 향하는 장소는 개방적이다. 코르셋이 '오직 남성'을 위한 수동적인 환경을 불러온다면, 코르셋을 포기한 여성에게는 보호소나 학교, 자동차 등 선택의 여지로 가득 찬 넓고 탁 트인 사회가 이어진다. 

     

하지만 달바는 자유로운 환경을 거부하고, 자크에게 자꾸만 집착한다. 그 이유를 영화가 채택한 1.33:1 화면비와 해당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에서 찾을 수 있다. 니코는 형식으로 자크가 달바에게 가했을 가스라이팅을 암시한다. 영화의 화면비는 매우 좁다. 양 옆을 많이 잘라내서 배경이나 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1.88:1이나 2.39:1 화면비에 비해서 롱숏에선 탁월함을 보이지 못하는 화면비가 1.33:1이다. 대신 영화에서도 그렇듯 얼굴을 포착하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화면비보다 효과적이다. 정사각형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1.33:1 화면비는 인간의 얼굴을 '초상화'처럼 잘 담을 수 있는 구도다. 오직 얼굴만 딱 들어오기 좋은 화면비에서 감상자는 초상에만 집중하지, 다른 것에 집중을 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간 달바가 볼 수 없었던 것은 1.33:1 화면비에 의해 양 옆이 잘려나간 세계였을 것이다. 반면 지금껏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외부와 격리된 가정에서 동고동락한 자크의 얼굴, 그 자크에 의해서 코르셋이 조여진 자신의 얼굴뿐이다. 영화에서 '거울'이 반복 등장하는 것처럼, 달바는 자크에 의해 익숙해진 자신의 얼굴만을 쏘아보고 무기력하게 재현했었을 테다. 또한 자크는 익숙한 것들 외의 모든 것을 적대시하고 악마화했을 것이다. 당장 자크가 달바를 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달바를 버렸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을 보라. 이렇게 편향되고 협소한 구조에서 자란 달바에겐 악한 것이 선한 것으로 둔갑했고, 선한 것은 악한 것으로 뒤집혀, 진정 선해진 환경으로의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자크와 분리되자 익숙하던 자크의 얼굴이나 과하게 꾸며진 달바의 초상 대신, 다른 것들이 이어진다. 영화 초반까지 카메라는 끈질기게 달바만 쫓아다닌다. 흡사 <사울의 아들>처럼 달바의 그림자가 되어 추적하는 '팔로우 숏'이 특징이다. 그런데 달바를 포착하던 숏이 중단되고 서서히 다른 이의 얼굴이 이어진다. 달바의 코르셋을 벗겨 성범죄의 증거를 수색하는 검사관, 보호소의 직원과 사미아 및 친구들이 빠르게 교차된다. 이후 익숙한 달바가 중단되고, 낯설고 생경한 달바가 이어진다. 지금껏 코르셋을 찬 달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던 영화는 법의학자의 검사 이후, 그리고 학교에서 자크가 소아성애자 및 성범죄자라는 말을 들은 이후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녀의 맨살을 포착한다. 자크에 의해 코르셋을 차기 이전, 달바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달바가 자크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코르셋이라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 사랑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위험한 환경을 자처했다. 그런데 보호소에선 아무 대가 없이 생리대나 옷을 빌려주고, 달바에게 성희롱을 한 학생을 함께 비난한달지, 그녀가 어떤 용모여도 항상 옹호해주는 등 무조건 그녀를 사랑해준다. 달바 또한 더는 사랑받기 위해서 코르셋을 차거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아도 된다. 이로써 달바는 '자크에 의한 달바'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달바', '주체적인 달바'로 성장해간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두려운 밤을 극복해본다. 남성에게 마냥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인 직업이 있는 엄마와 화해하여 롤모델로 삼는다. 자크에게만 좋은 조건을 맞추기 위해 제 삶의 가능성을 모조리 축소하던 그간의 달바와 달리, 담배를 피워보고 술을 마시는 등 여러 가능성을 도모해본다. 이때 여성은 각성한다. 보호를 위탁했던 대상, 곧 남성이자 가장이자 군인이 실제론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스라칠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크와의 과거다.      


여성은 지금껏 그렇게 자라났다. 남성에 의해 '옷장'에 갇혀야 하는 존재로, 남성 없이는 '빛'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로 말이다. 그러나 달바가 옷장 속에 갇혀 있다가 '화재'로 오인한 사미아의 담배 연기를 보고 재빨리 혼자 탈출하려 한 것처럼, 그녀들은 혼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여성은 더는 코르셋으로 가득한 옷장 안에 숨지 않는다. 영화 내에선 1.33:1 화면비를 자비에 돌란의 <마미>처럼 넓히지는 못하지만, 자크의 재판이 끝나고 달바가 성장했을 때 그 화면비는 분명 넓혀져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넓은 곳에 참여하게 된 여성은 주체적으로 많은 것을 선택하고 누릴 수 있을 테다. 

이렇게 니코는 지금껏 가부장제에서 '보호자를 자처한 범죄자'의 선동에 의해 '피해자'로 양성되어 온 소녀들의 진실을 아주 상세히 분석한다. 동시에 남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성의 진실을 핸드 헬드를 동원한 리얼리즘으로 풀어낸다. 그 진실은 최근 급증하는 아이 영화, 그 중에서도 소녀를 대상으로 한 영화들 중에서 가장 충실하다. 그 소녀들의 진실이 범죄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은 매우 참혹하지만, 그럼에도 소녀이자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페미니사이드', 보고 싶지 않지만 어디선가 발생하고 있기에 어떻게든 직면해야하는 사실을 니코는 목도하게끔 만든다. 다만 2차 가해를 할 수 있는 영역들은 영리하고도 조심스럽게 피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보지 않아도 될 미래로 나아가기를 조금이나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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