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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19. 2024

모니아 초크리, <사랑의 탐구>

사랑은 모순과 방황의 동의어

모니아 초크리, <사랑의 탐구> - 사랑은 모순과 방황의 동의어     

선과 악은 상대적이고 입체적이며 복합적이다. 가령 우리가 타인에게 선하기 위해선 때때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내가 가진 돈을 내어주거나, 자신의 편의를 포기하는 등 스스로에게의 좋음과 타인을 위한 선함은 같이 가기가 다소 어렵다. 반대의 경우도 매우 흔하다. 내가 삶을 유지하고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선 외부의 희생이 필요하다. 먹는 즐거움을 위해 다른 무언가가 죽어야 하고, 내가 즐겁기 위해 상대방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 선과 악의 딜레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내부에서도 '사랑'이라는 형태로 발견된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입히지만 동시에 감성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두 마리 토끼 다 잡고 가는 경우가 드물어서, 어떤 관점에서는 선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악하다. 그래서 삶과 사랑이란, 선한 것이 악하고 악한 것이 선한 '모순' 그 자체다. 그 사랑의 본성을 모니아 초크리가 신작에서 '탐구'한다.     


1982년 퀘벡 태생의 모니아 초크리는 캐나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배우로서 그녀는 자비에 돌란의 <하트 비트> 주연으로 유명하고, 영화감독으로서 2019년 <브라더스 러브>로 장편 데뷔하였다. 그녀의 영화는 대체로 도입부의 상황이 아주 시끌벅적해서 감각적이다. 여기에 자극적인 클로즈업까지 더해지는데, 심지어 이를 빠른 편집으로 쉴 새 없이 전환하며 감상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녀가 배우로서 호흡을 맞춘 자비에 돌란의 영화처럼 아주 감각적이지만, 연출의 동기는 첨예하게 다르다. 초크리의 영화는 늘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의 전환기 내지는 분기점 사이에 서있는 존재를 포착하기에, 그 어지러움을 가시화하는 감각성이다. 영화 속 현장에선 가부장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맨스플레인과 여성혐오, 반면 주체적인 여성들의 첨예한 대립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아직까지는 남성이 승리를 거둔다. 가부장제가 숭상하는 물리적 힘으로써, 지금껏 법이 수호해온 성폭력으로써 말이다. 그 결과로 패배한 여성의 곁엔 아기가 놓인다.

그러나 동시에 초크리는 굴하지 않는 전환기의 여성을 포착한다. 가부장제의 부조리에 여성은 순순히 낙담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사과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이를 거부한다면 두터운 세를 조직하여 그를 공적으로 비판한다. 이로써 여성이 경제적 주체로 올라서고, 사회에서 추방당한 남성은 가정주부로 전락한다. 하지만 옛 영광을 놓지 못하는 남성은 가사 및 육아를 전담하는 여성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고, 본인은 작가로서 명예를 되찾으려 한다. 이 또한 순순히 당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이 고용한 베이비시터의 수혜를 대신 가로채지만, 동시에 집안의 가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누군가는 가부장제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누군가는 이를 꺾으려는 싸움이 끝이 없다.

그래서 초크리는 남성은 변화한 시대상 속에서 제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여성 역시 가부장제가 그려온 가장의 모습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갈등을 봉합한다.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여성 역시 가장을 목표로 삼기 보다는 단지 자립하는 주체로만 거듭나면 충분하다. 즉 초크리는 여성이 원하는 삶과 사회의 형태, 동시에 남성에게도 좋은 비전을 아주 감각적인 연출로 고찰하는데 그 작업이 <사랑의 탐구>에서 이어진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그 곳은 바로 '혼돈'이라고 초크리는 도입부에서 돌려 말한다. 영화는 초크리 본인이 연기하는 프랑수아즈의 자녀들이 시청하는 애니메이션을 비추며 시작된다. <루니툰>, <톰과 제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이기에 주인공은 '동물'이고 열심히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연이어지는 가운데, 동물을 비추던 카메라는 이윽고 그 동물이 진화하고 발전한 초창기 원초적인 인간의 형태, '유아'를 촬영한다. 동물들이 서로를 해하기 바빴던 것처럼, 갓 동물의 모습에서 벗어난 아이들 역시 본인들의 기분과 욕구만 중요한 나머지 귀 따갑게 자기 할 말만 떠들고 서로의 영역을 자꾸만 침범한다. 동물과 초기의 인간으로만 구성된 혼돈은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내 이익을 위해 자꾸만 상대를 해하게 되는 그런 사악한 상태다. 

이렇게 동물, 아이를 거쳐 비로소 '성인'들이 등장한다. 아이를 포착할 때까지 영화는 ‘롱테이크’로서 동물적인 상태/인간적인 상태, 나/너는 각자 독립적인 숏으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숏에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가 성인들이 숏의 주인공이 되자 비로소 각자는 독립적인 숏을 점유하기 시작한다. 충분히 교양을 쌓은 이들은 충동적으로 고함치거나 상대를 비난하기 보단, 정중하게 격식을 갖춘 '토론'으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한데 뒤섞인 혼탁한 세계에서 '질서'를 규명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을 논리로서 찾고자 한다. 

하지만 숏의 분화는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하자마자 단번에 발생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식탁에 둘러앉은 롱숏이 잠시 포착된 이후에야 롱테이크는 막을 내리고 개개의 얼굴이 맞댄 리버스 숏으로 변화한다. 즉 성인들 역시 처음부터 이성적이진 못하고, 동물과 유아적인 상태에 파묻혀있었다. 실제로도 마찬가지다. 어른들끼리 있을 때는 비교적 질서가 유지되다가도 그 현장에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켰음을 알리는 귀 따가운 고발의 소리가 들리자 다시금 혼돈에 빠진다. 또 술에 취한 상대가 와인을 엎질러서 성인들끼리 있는 현장 역시 혼돈으로 얼룩진다.      


이 혼돈은 내가 나인데, 심지어 여전히 살아있는데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잊게 만든다. 실비가 소피아에게 한탄하는 '치매'가 대표적인 혼돈의 영향이다. 내게 좋은 것들을 잊게 만들어, 선과 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로 격하시킨다.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가 끝난 이후엔 영화의 주인공, 소피아가 별장을 수리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는 시퀀스로 이어진다. 별장은 본디 소피아만의 책임이 아니다. 또 별장이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도 소피아의 탓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무관한, 실뱅이 귀 따갑게 떠들어대는 그 무거운 책임을 그녀가 힘겹게 짊어져야 한다. 이로써 자신의 시간을 침해받게 생긴 소피아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혼돈은 그렇게 나를 잃게 만들지만, 이 와중에 실뱅이 호수에서 아주 크게 고함을 쳐보라고 제안한다. 그녀는 그를 따라 고함을 치는데, 이때 실뱅과 소피아는 '줌인'된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타인을 위해 참기보다는, 있는 힘껏 터트리며 제 감정에 기여하고 '가까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혼돈에서 구제해주는 상대방에게 취한 듯 홀리고야 만다. 즉 줌인이 가리키는 사랑이란 혼돈 속에서 잃게 생긴 나를 붙잡아주는 '자기 보존'이자, 뒤섞임 속에서 잊힌 나를 다시 '기억'하며 가까워지는 행위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줌인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줌인된 것은 객관적인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한 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실뱅과 첫 번째 데이트를 즐기는 술집에서 신경을 써볼만한 장면은, 초크리가 음악을 틀어주는 직원을 호의적으로 줌인할 때다. 그 카메라는 소피아의 시선에 상응하는데, 자신이 선호하는 7080음악으로 가득한 바에서 그녀는 장소와 직원에게 배려 받는다는 감정을 느끼지만, 실상 그 직원의 표정은 띠껍고 심드렁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감정에 좋기에 그녀가 가까이서 나를 위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하는 것만 같은 상대와 가까워졌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상 가까워진 것은 내 감정이자 착각일 뿐이요, 실제 상대방과는 아득히 멀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줌인도 가볍고, 줌아웃 역시 경솔하게 불러온다. 실뱅이 자비에의 코트를 보고 억측 및 오해하며, 소피아 역시 실뱅과 함께 춤을 추는 ‘사촌’을 자꾸 의심한다. 중요한건 해명으로 드러나는 사실 여부가 아니라 내 기분인 것이다. 이에 영화에선 앞으로 후술할 여러 이유로 인해 줌인이 되지만, 결국에는 줌아웃에 의한 도입의 카오스로 서서히 되돌아가며 '수미상관'을 이루고야 만다. 가장 큰 이유는 소피아를 위한다고 말하는 실뱅이 정작 저 자신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한다면서 선물한 속옷은 '포르노 스타' 같은 그녀의 외관을 보고 싶은 자기 욕망에게 전한 선물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정서를 배려하며 청혼하기는커녕, 찝찝한 부엌과 끈적거리는 고무장갑을 낀 상태에서, 심지어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민망하고, 프랑수아즈의 아이들이 칭얼대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는 끔찍한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싶은 제 감정만 중시하며 소피아를 난처하게 만든다. 마치 그를 위해서 기꺼이 굳은 일을 다해달라고 초대하는 것만 같다. 그에 의해서 그녀의 세계는 침식당하고, 이렇게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혼돈이 연이어지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여러 이유로 다시 홀로 된다. 첫 번째로 혼돈 속에서 수립한 질서가 본디 외롭다. 도입에서 유의할만한 대사 중 하나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에게 온전히 선할 수 없다는 문장이다. 숨 쉬는 것조차 자연에겐 아주 약소한 해를 입힌다고 한다. 즉 우리는 함께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또 어떤 수준으로든 상대에게 해를 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이성으로써 파악한 식자들은 늘 분리된 형태로 나타난다. 도입의 소란스러운 파티가 끝난 직후 이어지는 장면엔 귀가한 소피아와 자비에의 모습이 담기는데, 이들은 각방을 쓴다. 상호 존중할 수 있는 최적의 논리는 공간을 분리하고, 언행조차 상대를 최대한 배려하는 것, 그래서 서로는 클로즈업에서 롱숏으로 멀어져만 간다. 소피아의 불륜이 탄로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자비에는 동침하기 싫어하는 소피아의 뜻을 지켜 그녀는 침대에, 그는 딱딱한 바닥에 누어 영역을 분리하고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다. 즉 공존의 질서를 수립하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본성에 걸맞지 않게 고독을 자처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은 그 기분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질서는 정신과 관념의 영역으로서, 질서를 따르게 될 시 육체가 소홀해진다. 또 질서는 서로 간 가능한 접촉과 부적절한 접촉을 판가름한다. 그래서 가능한 접촉에 의해 육체의 어떤 부위는 둔감해지고 뻔해질 정도로 굳은살이 베기는 반면, 어떤 부위는 그 존재가 환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에 소피아는 물질과 멀어지는 롱숏을 거부하고, 소외되어있던 육체와 가까워지는 클로즈업와 줌인을 바라는 것이다. 또 그녀는 자비에와 헤어진 직후 숲을 헤맨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질서를 수립했지만, 그 결과는 타인한테서 '망각'되어 미아로 전락한다. 또 다른 유형의 혼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에 그녀는 만져지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기대며 존재를 보존하고 느끼기 위해 실뱅과 가까워진다. 그는 ‘블루칼라’로서 머리보다는 '손'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손이 그녀를 붙잡고, 소외된 그녀의 부위를 애무한다. 롱숏으로 멀어져있던 그녀는 이제 그와 클로즈업으로 가까워지다 못해, 그녀의 입술과 눈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식자로서 강의하고 토론만 하던 용도로 사용되던 입은 키스를 위해 가까워지고, 마찬가지로 책만 읽던 눈 역시 육체를 훑는 눈으로서 새롭고도 짜릿한 감각을 환기한다.     


이러한 에로스, 곧 육체에의 끌림을 초크리는 연출로써 가시화한다. 본 작품은 아주 감각적이기 위해서 촌스럽다. 일단 시대상이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현재에 과거를 가시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감각적이기 위해 ‘이전 시대의 유물’인 35mm 필름을 사용한다. 35mm 필름을 이용해 촬영하는 기법 역시 20세기에 주로 활용하던 장치로 가득하다. 본 작품에서의 줌인은 다가감과 멀어짐이 은근하고 자연스럽기보단, 우악스러울 만치 눈에 띄는 '크러쉬 줌'이다. 또 담배를 피우다가 아주 작위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 역시도 20세기 중반의 뮤지컬 영화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형식이 사용되어야 할 이유는 이성적으로는 전혀 없어 보인다.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 대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의 감상주의와 서정성이 부각되는 것처럼 단지 감각적으로 신선하고 즐겁기 위함이다. 

연출이 이성적으로 따졌을 땐 불필요하거나 부적합한 것처럼,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실뱅 보다는 자비에가 훨씬 나은 남자다. 아무리 소피아 본인이 자처해서 목줄을 구매했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사용하며 여성을 '암캐'로 전락시키는 남성, 심지어 생일날 소피아를 포르노 스타로 만드는 속옷을 선물하는 남성과 트럼프 시대를 우려하는 남성 가운데서 누가 여성인권에 더 도움이 되겠는가? 하지만 에로스란 기후 위기 앞에서 아이를 낳는 일을 주저하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섹스를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 용감한 것이다. 에로스한테 중요한 것은 이성적으로 따졌을 땐 무용하더라도, 느낌과 기분에 있어선 한도 끝도 없이 충만해지는 감성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복고적인 연출을 열렬히 사랑했던 젊은 날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소피아의 욕망으로 해석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향수란 몽글몽글해지고 아련해지는 기분 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크리는 비이성적인 사랑을 연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담긴 이미지로도 부각한다. 실뱅과 소피아의 사랑이 점차 진해질 때마다 초크리는 풍경이 아주 멋들어진 장소로 이동한다. 연인들은 고층 빌딩에서 사랑하고, 거기서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우아하게 출렁거리는 바다를 구경한다. 또 숲속으로 이동하여 형형색색의 단풍을 하이앵글로 굽어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기상천외한 개구리, 엘크 등의 동물을 관찰한다. 진화심리학을 따르면 우리가 동물을 구분하는 즐거움, 높은 곳을 내려다볼 때 느껴지는 쾌감, 산이나 바다를 선호하는 감각 등은 선조가 후손들에게 선물한 선천적인 지혜일 가능성이 높다. 동물들을 구분해야만 생존에 유리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지만 위험에 대처하기 용이하며, 산이나 바다는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거주지다. 그래서 감각은 이성적으로 타당할지 모르나, 다만 해당 감각들이 연애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즐거움의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단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 연애다.      


즉 사랑이란 이율배반적이다. 소피아는 철학 강사다. 특히 그녀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철학 강의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철학자의 사랑 이론을 꿰고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을 정작 제 사랑에 실천하지 못한다. 사랑이 끝없는 결핍이자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실뱅과의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완성하고자 손을 뻗는다. 파멸이라고 말하면 달콤하고, 반대일 경우에는 씁쓸하며 힘을 부여하려 할 땐 소진한다. 초크리는 그녀가 말하는 청각과 반대되는 시각을 늘 부각한다.

그래서 영화에선 ‘숨겨진 이미지’가 잦다. 그녀가 자비에를 배신하기에, 또 소피아가 엄마에게 의심당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온전히 떳떳할 수 없기에 숨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다닌 '정의' 및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용어가 가리키는 현상이 정작 반쪽짜리이거나 뜻과 모순되기에 숨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에 그림자로만 표현되는 두 연인의 실루엣, 구조물 사이에 숨어 실뱅과 통화하는 소피아, 자신이 강의하는 학생의 터치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 룸미러에 가려진 실뱅의 얼굴 등 소피아가 지칭하려 하는 사랑이 영화에선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한편 그렇게 관념을 배반한 나머지 실뱅과의 관계에도 서서히 혼돈이 찾아온다. 관념이야말로 실타래처럼 얽힌 혼돈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홀로 되는 두 번째 이유다. 관념을 거부함에 발생하는 혼돈은 실뱅의 엄마 및 케빈, 카린과 함께 하는 식사부터 스멀스멀 부상한다. 질서를 수립해서 서로 간의 경계를 구분하고 허용되는 발화의 범위를 규명하기는커녕,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는 현장에 가득한 혈투와 충돌은 매우 어지럽다. 클라이막스에서 소피아의 생일파티를 어지럽히는 실뱅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타인과 공존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는 관념이 그리워진 소피아는 실뱅이 선물한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서 물질을 거부하며 또 다시 혼돈의 현장에서 이탈한다. 그래서 초크리가 탐구한 사랑의 본질이란 두 형태라 하겠다. 하나는 ‘모순’이고 하나는 ‘방황’이다.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좋은 것이 도무지 좋지가 않고, 이성적으로 나쁜 것은 왜 그리도 좋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은 좋음이기에, 에로스 어느 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나쁨이 차올라 어느 순간 이성적인 좋음을 바라게 되지만, 정작 다른 형태의 좋음을 찾게 되면 또 다시 결핍을 느낀다. 관념적으로 완벽하면 육체가 부실하고, 육체가 매력적이면 관념은 공허한, 사랑하기에 혼돈 그 자체인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반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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