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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5. 2024

알리 압바시, <어프렌티스>

위대한 미국(또는 신방종주의)의 화신

알리 압바시(Ali Abbasi),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 

- 위대한 미국(또는 신방종주의)의 화신     

그는 부동산 재벌 2세이자 셀럽이었으며 작가이기도 했다. 보통의 일생 동안 그저 꿈만 꾸고 상상만 해봤을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성취해본 자의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다. 이런 그에게 남은 유일무이한 목표는 물욕도 육욕도 아닌 오직 명예뿐이었기에, 그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끝끝내 당선되기에 이르렀고, 글을 쓰는 2024년 10월에는 재선을 기대하고 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해내고야 마는 정력가 내지는 괴물의 일대기가 영상화된다. 트럼프 젊은 날의 일대기, 더해서 그를 괴물로 키워낸 ‘로이 콘’의 전기를 알리 압바시가 연출한다.     


1981년 테헤란 출생의 알리 압바시는 덴마크-이란 이중 국적의 영화감독이다. 테헤란에서 나고 자란 그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이주하였고, 진로를 바꿔 덴마크에서 영화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스웨덴과 이란을 오가며 활동하던 압바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본 신작을 연출한다. 그래서 압바시의 기존 색채와 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차이는 단순히 제작 환경에만 있지 않다. 그가 다루는 인물의 속성 역시 지금까지 다룬 인물들과는 다소 상반된다.

압바시는 지금껏 주류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타자'와 ‘약자’를 다뤘다. 물론 <설리>나 <성스러운 거미>에선 북유럽에서 타자인 동유럽인, 가부장적인 무슬림 사회에서의 여성이 주인공이었음과 동시에, 보편자이자 권력자인 북유럽인과 무슬림 남성이 교차됐었다. 그래도 주인공들은 언제나 이질적인 타자이자 소수자,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철저하게 박해받는 약자였다.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못생겼다”, “역겹다”라는 인신공격을 당하는 <경계선>의 트롤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타자들은 보편자들과 다른 특유하고도 고유한 능력을 지닌다. 무시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유럽인은 세계에서 환영받는 금발 벽안 백인인 북유럽인의 대리모로, 트롤은 인간의 공권력과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의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희생된다. 또한 몇몇은 살아남기 위해 공모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와중 보편자들은 '위선자'로 등장한다. 분명 타자들에게 적법한 보상을 취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실상 뒤에서 이들을 혹독하게 착취하고, 공권력이나 법은 스스로가 악덕을 자행하거나 정의가 아닌 부조리를 수호한다. 그렇기에 압바시의 <어프렌티스>가 소재부터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압바시는 보편자들이 왜곡한 타자들의 진실을 발굴한다. 인간 기준으로 악마의 아기라 일컬어지지만, 아기 자체로는 굳이 악하지 않은 존재가 그저 성장할 수 있게, 또한 트롤이라는 종족 자체의 특성과 일상을 회복하며 그들 역시 번식하고 미래로 이어지게끔, 가부장제에서 지워지는 여성의 피해를 발굴하도록 조력한다. 그렇기에 압바시가 신작에서는 어떤 진실을 밝혀낼지, 오히려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하는 메커니즘이 폭로되지 않을지 호기심이 생긴다.      


압바시가 그려내는 젊은 날의 트럼프는, 만약 현재 그가 대통령이었다면 당장 상영 중지를 요청했을 법한 초상화다. 지지자들의 시선에서는 당당하고 강한 이미지, 반면 상식적인 시선에서는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불한당 이미지와 정반대의 초상이 영화 초입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초상은 감히 '파파보이'라 칭해도 절대 과하지 않다. 지금의 그가 기후위기에 대한 온갖 허위사실을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파렴치하게 떠벌리는 것과 달리, 작품 속 묘사된 젊은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을 자꾸만 인정받으려 전전긍긍한다. 도입부에선 데이트하는 여성, 이후에는 로이 콘과 아버지, 투자자 등에게 말이다. 사실 당시의 트럼프도 지위가 낮진 않았다. 오히려 아주 높은 편으로, 부동산 재벌 2세인만큼 굳이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떠받드는 사람들이 많았을 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이 사회의 인정이 고달픈 약자나 소수자들처럼 끊임없이 타인의 승인을 갈구한다. 

젊은 트럼프의 초상으로부터 압바시는 가부장제의 특징을 탐구한다. 가부장제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민주주의와 정 반대되는 이념이자,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가정적 형태라 칭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힘을 가진 가장, 보편적으로는 남자들에게 약자를 지킬 의무를 부여한다. 동시에 그들이 약자를 지키는 조건으로 무수한 권리를 허락한다. 의무를 위해 필요한 자원을 몰아주고, 그들 관할 내 약자들의 권리를 가장이 대신 행사하는 권리마저 수여한다. 그래서 가장의 권리는 피보호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또 피보호자가 계속 나약할수록 정점에 달한다. 

여기서 트럼프 일가에서는 아버지 트럼프가 권좌의 정점에 앉아있다. 장남 프레드는 영 석연치 못하고, 도날드는 집세나 받는 말단이며, 가부장제에선 딸들에게 권리를 감히 수여하지 않으니, 여전히 아버지가 가장 큰 권한을 갖고 있다. 이후 사회에서는 그 자리에 로이 콘이 앉아있다. 그는 가부장제가 크나큰 권리를 부여하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최종적인 승리자다. 가장들을 주저 눕힐 수 있는 여러 카드를 손에 쥐고 있고, 그가 익힌 태도는 가부장제의 법칙에 가장 적합하다. 이에 아직 어떤 피보호자도(심지어 그 피보호자는 도입부에서 화장실을 핑계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명의의 자원도, 상대를 쓰러트릴 카드도 쥐고 있지 않은 트럼프는 가장들에게 절절매는 파파보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가장의 자리를 도저히 넘볼 수 없다면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 권리의 일부라도 되찾아야하고, 힘을 키웠다 싶으면 그 자리를 넘보며 아비를 깔아뭉개야 한다. 크로노스의 뱃속에 갇혀있던 자녀들이 일으킨 반란은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기세등등한 아버지들에게 억눌린 유약한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또한 권좌를 차지한 이후에도 아버지의 탈을 어색하게 쓴 불완전한 모습이 지속된다는 맥락에서, 본 작품의 핸드헬드가 단순히 르포적인 역할이라고 속단해선 안 된다. 압바시는 트럼프를 우스꽝스럽고도 풍자적으로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와 로이 콘을 꽤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핸드헬드는 마치 그들을 어디선가 몰래 훔쳐보는 듯한 리얼리즘에 동조한다. 더욱이 후반부로 갈수록 구도가 적나라하긴 해도(이는 아마 당시의 트럼프가 충분히 매스컴을 탔기에, 더는 몰래 지켜볼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반부의 트럼프가 숨기고 싶을 과거를 묘사할 때 촬영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은밀하게 추적하고자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는 듯한 구도를 형성한다. 이에 핸드헬드는 촬영자의 덜덜 떨리는 손 내지는 적발될까봐 두려워서 쿵쿵 뛰는 박동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핸드헬드는 피사체를 포착하기에 완전무결한 촬영이 아니다. 스테디캠으로 완벽하게 고정하고, 또 숨지 않고 당당하게 피사체를 따라다닌다면 그만큼 감상자는 온전한 이미지를 접할 수 있다. 그것은 아웃포커싱되지 않은, 세밀하고도 정밀한 초상화나 정물화다. 그러나 핸드헬드는 단 한순간도 완벽하지 못한 채로 쉴 세 없이 흔들리기에 포커싱이 늘 불완전하다. 이에 우리는 대상의 완벽한 이미지를 볼 수 없는데, 그렇게 불완전하게 재현되는 것이 바로 트럼프다. 그것은 젊은 날의 트럼프에 대한 진실을 점점 더 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시화한다. 동시에 천문학적인 금액의 장비와 전문적인 촬영자에 의해 완벽하게 포착될 필요가 없는, 누구나 찍을 수 있고 심지어 무성의하게 찍혀도 상관없는 '별거 아닌' 존재가 바로 트럼프라는 사실도 가시화한다.       


이에 트럼프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갈망한다. 물론 트럼프도 저 높은 곳이 마냥 멀진 않다. 도입부의 웅장한 빌딩과 그가 집세를 받으러 다니는 높다란 아파트들이 전부 다 그의 소유다. 하지만 아직 온전히 트럼프의 것은 아니다. 당시의 그가 건물들을 갖고 관리하기에는 아직 벅차다는 사실을 안 그래도 거대한 건축물을 더 숭고하게 포착하는 '로우 앵글'로 가시화한다. 트럼프는 자기 마음대로 호텔 사업을 벌일 수도 없고, 집세를 받아야 할 사람들한테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로써 낮은 곳에 위치한 그는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가 파악하지 못한 사각지대에선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이 날아와 그를 위협한다. 이처럼 밑바닥에선 나아가야 하는 저 위를 올려다보기도 벅차고, 시야가 넓게 보장되지도 않으며, 온갖 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게 무시당하다가 로이 콘의 도움을 받아 맨 아래에서 한 층 위로 올라간다. 이제 로우 앵글은 트럼프를 좀 더 거대하게 포착하는데, 이때 그는 저 위에서 점잖은 척을 떨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이상형 이바나를 발견한다. 그마저도 아주 아름다운 여러 여성 모델 가운데서 이바나만을 콕 집었다. 이바나가 밑에서 호텔 출입을 못해 쩔쩔맬 때, 트럼프는 교활하고도 영악하게 로이 콘의 이름을 팔아 그녀의 입장을 허락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바나에게 퇴짜를 맞는데,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여 따라다닌다, 높은 곳에서 무수한 것들을 굽어보며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심지어 후반부의 그는 드넓은 미국 전체를 헬기에서 내려다보며 어디가 자기 사업에 가장 적합한지 결정한다. 즉 많이 보기 위해서, 그렇게 더 많은 기회를 얻고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기 위해 사람은 높은 자리에 가길 원한다.      


그렇다면 권좌에 오른 인간, 정확히 가부장제의 남성은 무엇을 위해 그리도 목을 매는가? 이는 생각보다 하잘 것 없다. 가부장제의 표준적인 기준 ‘이성애자 남성’한테는 여성, 성 지향성은 달라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반쪽 수혜를 입는 ‘게이’에게는 남성이 목표다. 도입의 트럼프는 분명 여성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싶은, 또한 인정받고 싶은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덩그러니 홀로 남는다. 단순히 고립된 것이 아니라 로이 콘에 의해 바라봐지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사르트르나 푸코가 논하듯, ‘시선’에는 바라봐지는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 시선의 권력을 가부장제에선 가장이 지닌다. 당시 유약한 트럼프는 로이 콘에게 바라봐지며 그의 곁으로 인도된다. 물론 트럼프도 로이 콘을 만나고 싶어 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동등한 가장으로서 만나고 싶었지, 로이 콘이 허벅지를 만지고 나중엔 엉덩이 크기를 평가하는, 성추행을 당하는 성적 대상으로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즉 여성을 바라보기 위해서, 또 성적 대상으로서 바라봐지지 않기 위해 그리도 권좌에 오르려 안달인 것이다. 

트럼프와 어머니의 관계도 그렇다. 트럼프는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하고, 성공하여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자신의 편을 들 때 꽤 흡족해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이성애자 남성은 어린 날에 어머니를 연인으로 삼고, 그 짝사랑을 앗아간 아버지를 원망의 대상이자 연적으로 여긴다. 트럼프의 무의식에도 어떻게든 아버지를 물리쳐 어머니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와 이바나의 약혼자를 물리친다는 것은 시선의 강화를 의미한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정복욕구, 성취감을 고취시킬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가장 중의 가장'들은 더 범상치 않은 섹스를 즐긴다. 로이 콘 및 트럼프와 대립하던 판사는 동성애자다. 이는 실제 그들의 성 지향성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가부장제에서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한 성 역할을 세뇌당하는 여성과 달리, 남성들은 자존심이 세다. 이런 그들을 꿇어 앉혔을 때 가장들은 더 큰 정복욕을 느낄 수 있다. 비록 동성애자는 이성애 중심적인 가부장제가 배태하지만,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힘의 기준에 다다랐거나 넘어섰다는 성취감 역시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성애 설정을 부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범법적인 쾌락 역시 마찬가지다. 법을 따르는 일개 시민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제왕이 된 듯한 정복욕을 느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오히려 굳이 동성애를 하지 않은 것 같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여성의 주체성을 인식하던 이바나는 그에게 꺾어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고, 영화에서 트럼프는 자신에게 맞서는 이바나를 강간하며 자존감을 채우니 말이다.     

 

그래서 좌파와 우파, 너나 할 것 없는 남자들이 수호하는 것은 제 욕망이다. 미국다운 가치를 운운하는 보수주의자들의 파티는 웅대한 관념이나 이상이 아니라 불그죽죽하고 거무튀튀한 '홍등가'와 여성혐오, 난교를 지지한다.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정의를 떠들지만, 제 사사로운 이익과 욕구를 지키기 위해서 로이 콘의 협박에 무릎 꿇는다. 그들은 욕망에 가까워지기 위해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이요, 트럼프가 진정 기쁨을 느끼던 이바나의 얼굴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그 천한 것을 부정하면서 그 자리에 올라왔다. 동성애자여서도 안 되고 육체에 굴복할 만큼 멍청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이 바라는 것은 속되고 천하고 경박한 것이기에 이들은 동성애자이면서도 호모포비아인 척을 할 수밖에 없는, 끝없는 자기 부정의 늪에 빠진다. 심지어 게이 중에서도 삽입을 하는 역할이 아니라 삽입을 당하는, 가부장제에서 더더욱 무시하는 ‘바텀’이 로이 콘이기에 그 간극은 어마무시하게 벌어진다. 트럼프에겐 로이 콘의 '견습생'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바로 시작된다. 트럼프는 자기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로이 콘의 밑으로 들어갔지만, 그 아래서 로이 콘이 강요하는 음주를 하며 자아를 포기한다. 로이 콘이 써준 각본을 그의 디렉팅과 스타일링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격, 부인, 승리”라는 3원칙을 따르며 이행한다. 문제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자유로워지고, 제 눈앞에서 여성이 떠나가지 않는 삶을 위해 트럼프는 로이 콘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목적이 삶을 잡아먹는다. 아버지와 대립 수준을 넘어서 그를 착취하고, 겨우 가까워진 어머니와 반목한다.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이바나에 대한 감정도 식는다. 이바나와의 어떤 삶을 원해서 결혼한 트럼프지만, 정작 그녀가 해주는 위로도 거부하며,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을 하대한다. 그놈의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스승인 로이 콘을 부정하고, 그 끔찍한 인물에게 동정심이 들 정도로 모질게 굴며, 끝자락에는 제 육체마저 스스로가 부정한다. 삶을 위한 승리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승리를 위해 끝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트럼프, 이런 그가 2020년 재선 실패를 했을 때 부정 선거를 외치고 다닌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는 유약하고 조언가들 없이는 무능한, 그럼에도 센 척하는 마초가 부동산에 절절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초반의 트럼프는 일면식 없는 시민들한테도 온갖 무시를 당한다. 그들에게 나름 센 척을 해보지만, 직접 얼굴을 대면한달지 가까이서 맞서진 못한다. 문이 닫혔을 때나 쾅쾅 두드려 보고, 멀리서나 “꺼져!”라고 외친다. 그는 강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강하지 못하다. 그가 제일 잘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약자다. 허리가 굽은 아버지, 중병에 걸린 로이 콘, 무력에서 불이익을 타고난 여성한테나 비등비등하다. 반면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이들과 '서식지'가 겹치면 불안에 떤다. 만인이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공원이 가장 싫고, 공공주택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잘 아는 고위층들이 많은 돈을 써줄 수 있는, 트럼프가 인파를 선별할 수 있는 호텔이 지어져야만 한다. 시민들이 트럼프한테서 눈을 돌리거나 자원을 축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카지노는 덤이다.      


2024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압바시는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경고한다. 적나라하면서도 꽤 우회적이며 상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본 작품이 압바시의 기존 스타일과 다른 점은 '빠른 편집'과 '아카이빙 푸티지'에 있다. 이 연출이 사용된 시퀀스에서 필히 압바시는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선한 고위층'의 말을 따르면 "자신들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쌓아올린 부를 빼앗으려 하는" 악한 무리들을 어떻게든 이어낸다. 한쪽에서는 하이 앵글로 상류층들이 소유하거나 위치한 고층빌딩을 포착하는 반면, 바로 그 다음 숏에는 섹스와 마약에 미쳐 우민화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폭력과 살해 등 중범죄로 얼룩진 처참한 삶의 현장을 잇는다. 그것은 '연결'되기에 하층민들의 삶이 희생되면 될수록, '정의롭게' 고위층들의 삶이 쌓아올려지는 것을 유비한다. 그 숏은 서로 이질적이다. 고층 빌딩이 촬영된 숏이나, 하층민들의 삶을 포착한 푸티지를 여러 다른 작품에서 끌어와 아카이빙 했기에 질감에 차이가 있다. 이는 서로 각기 다른 생활사를 공유하는 계급성을 드러내지만, 다르다고 일컬어진 두 차원이 실제론 긴밀하게 딱 달라붙어서 상호 영향, 정확히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를 고발한다. 

동시에 이 시퀀스의 편집의 아주 재빠르다. 마치 피사체를 잘 안 보이게 만드는 핸드헬드처럼 쉴 세 없이 연결되는 재빠른 연출은 숏 하나하나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 사회의 가장들은 이런 방식으로 늘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들의 악덕과 책임을 쉬쉬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압바시는 매체성을 이용하여 그 추한 사실을 폭로한다. 압바시는 <어프렌티스>를 위해 16mm 필름을 선택했고, 이에 더해 70~80년대 브라운관에 송출되는 비디오의 질감을 구현한다. 이는 당대의 시대상을 재현하는, 마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산하고인>의 화면비, <이다>나 <콜드워>의 흑백처럼 고증의 의미도 지니지만, 시대를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거칠고 조악하다. 특히 말끔한 디지털과 달리, 낡고 닳는 유한성이 환기되어 영원하지 못할 느낌이다. 또한 진실을 논하는 장면에서 필요한 투명함이 부재한다. 영화 전체의 미장센은 거무튀튀하고 흐리며 노이즈가 잔뜩 껴있다. 그 모든 진실을 부정하는 불투명한 미국의 풍광과 초상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적으로 이 미장센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열악한 관리와 송출에서 발생하는 프리즘은 흉하고 더러우며 조악하다. 그것이 트럼프라는 백정의 초상을 담기에 적절한 형식, 곧 그릇이다. 이는 고다르가 <필름 소셜리즘>과 <이미지 북>에서 오늘날의 어떤 지옥도를 펼쳐내기 위해 일부러 조악한 매체를 선택한 의도와 유사하다. 

승리를 위한 끝없는 공격과 부정 끝에는 미국적인 가치라 말할 수 있는 가족도, 자유도 남지 않는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폭주하는지 알 수 없는 고장 난 기관차만 자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하게 진실을 인정했으며 방어적이었던 이바나에게의 청혼에서만 트럼프가 원하는 진정한 삶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왜소해질 필요가 있다. 프레디와 노년기 트럼프 아버지, 늙은 로이 콘한테서 오히려 삶을, 그리고 투명함을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압바시는 믿기 어려운 매체에 트럼프의 거짓말을 한가득 담아내며 오히려 진실을 길어낸다. 트럼프의 일대기를 단순히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 연출의 깊이가 인상적이고, 트럼프라는 화신을 통해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라는 가면을 쓴 신방종주의’를 두둔하는 미국의 민낯을 신랄하게 까발린 점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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