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의 대칭
‘사회적 동물’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늘 공동체를 이뤘고, 그렇게 이룬 사회 안에서 함께 공존하기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제한해왔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과 동시에 ‘개인’이다. 그래서 사회를 위한 몇몇 제한은 그 개인과 대립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제한하는 사회야 말로 '자유'를, 주체적인 '삶의 의지'를 박탈한다. 그래서 개인으로서 인간은 늘 투쟁해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사회가 앗아가 버린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혁명에 혁명을 거쳐서 제한이 많이 완화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오늘날의 인간은 오리무중에 빠져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한때 간절했던 자유를 가지고 도통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깨닫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느끼기 위해선 제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를 앗아가는 세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놓기 싫은 무언가가 절절히 느껴지는 법이므로… 알모도바르는 그 극단적 대비와 환기를 <페인 앤 글로리>에서 수행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탐구를 미국에서 <룸 넥스트 도어>로 확장한다.
1949년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 출생의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정확히는 스페인 민주화 이후의 영화를 이끈 시네아스트다. 흔히 그의 작품엔 "섹슈얼하다", "감각적이다" 등의 수식이 따라다닌다. 이 말은 곧 현실과 달리 예술 고유의 독립성을 지닌다는 말과 같겠지만, 알모도바르는 동시에 아주 현실적인 영화를 연출한다. 장편 데뷔작,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선 프랑코 체제 하에서 사복경찰들의 초법적 만행을 고발하였고, <패러렐 마더스>에선 프랑코 체제에서 은폐된 학살을 밝혀났으며, <나쁜 버릇>과 <나쁜 교육>에선 파시즘과 결탁하고 아동 성범죄를 저지르고 은닉한 가톨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그는 늘 사회 비판적, 정확히는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런 점에서 알모도바르의 시그니처라 해도 과장이 아닌 강렬한 키치적 원색과 분방한 편집 등은 스페인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 해방된 소수자, 타자 등에 상응한다. 프랑코 체제에서 저속하다거나 검열의 대상으로 여겨진 육욕이야 말로 민주화 이후 대중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았고 이는 그의 연출로써 가시화된다. 그 욕망은 충동적이고 우발적이며 즉흥적이기에 알모도바르의 영화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는다. 욕망은 계속 변화하는 '생물이기에 대체로 인물들은 악했다가도 선하고, 선했다가도 악한 입체적인 성향을 가진다. 끊임없이 약동하는 생물을 포착함과 더불어 정치적 전환기가 영화의 배경이 되기에 그의 작품은 이동이나 혼합이 늘 부각된다. 또한 욕망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좋은 것임과 동시에 해로운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는 해방된 욕망, 특히 성 소수자들이 줄곧 등장하지만, 동시에 피해자인 그들의 욕망이 언제나 모두에게 선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즉 대체로 욕망은 선과 악이 혼재된 경향을 띤다는 점이 만인에게 보편적인데, 이에 더해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관통하는 보편성이 또 있다. 바로 '여성'이다. 알모도바르가 그리는 여성들 역시 다양하지만, 알모도바르는 민주주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페인에 잔존해있는 마초주의를 지속적으로 고발해왔기에, 가부장적인 사회 저변에서 피해자로 전락하게 되는 여성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가부장제가 피해자 여성에게 소위 '피해자다움', 수치심이나 소극적이고 위축된 모습을 주문하는 것과 달리, 알모도바르는 대체로 위풍당당하고 남성보다 더 끈질긴 여성들, 서로 연대하여 기죽지 않는 여성 집단을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성 정체성이나 지향성에 따른 민주화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민주화까지 영화에서 이룩한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알모도바르는 활동 반경을 스페인에서 북미로 확장해왔다.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던 단편 <휴먼 보이스>와 중편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를 거쳐서 내놓은 장편이 바로 본 작품 <룸 넥스트 도어>다. 어찌됐든 카메라가 포착하는 장소가 크게 달라졌다보니 알모도바르의 구작과 비교하면 결이 다소 다르다. 이베리아 반도의 작열하는 열기, 이에 따른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 솟구치는 욕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포착하는 미국은 분명 햇살이 따스함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차갑고 도회적이며 딱딱하다. 그래서 알모도바르답지 않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최소한 도입에 한해선 그의 느낌이 남아 있다. 숏 내에서 분방하게 변화하는 찬란하고도 감각적인 붉은 색채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니 말이다.
그러나 직후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시금 알모도바르에게 기대하는 정서가 실종된다. 관람객이 알모도바르에게 기대하는 것이 내용에서는 정욕에 의한 파렴치하고도 저속한 드라마나 여성 간의 연대라면, 형식에서는 공간 미술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가 하나하나씩 정성껏 선택한 감각적인 소품, 그것을 가시화하는 뜨겁고도 강렬한 벽지로 이뤄진 세트장을 말이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알모도바르는 이미 지어진 공간과 타협한 모양새다. 지극히 도회적인 미국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숏들만이 지나간다. 알모도바르의 느낌은 겨우 마사가 지내는 집의 벽지 수준에만 그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스페인에서는 세트장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고 꾸며야 했던 갈증과 욕구가 미국에서는 전무하다는 것일까, 오히려 너무 풍요로운 그 비옥한 땅에서?
이렇게 촬영된 것은 알모도바르답지 않지만, 그 기록된 것들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편집에서는 여전히 알모도바르의 저력이, 약동하는 즉흥성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일반적인 편집은 잉그리드의 북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영화는 사진만 제시되어 멈춰 있었다. 이후 운동이 부여되며 영화로 바뀌는데, 이 때의 전환은 아주 타당성이 있다. 정지한 사진이 잠재하고 있는 운동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숏이 전환된 이후 알모도바르는 하이 앵글 구도로 서점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이내 곧 아이 레벨 숏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잉그리드와 독자의 시선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이후 잉그리드가 독자들과 대면할 때 그녀가 팬들과 눈을 마주친다면, 당연히 그 다음 숏에는 그녀가 바라보는 독자가 리버스 숏으로 제시되고 이는 아주 당연한 연결이다. 또 잉그리드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 마사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그녀가 들었으니 행사를 마쳤으면 병원 시퀀스가 이어지는 것도 타당하다. 이 처럼 초반의 숏은 이전이 잠재한 것이 이후의 이음새를 당연하게 결정한다.
그런데 이후의 편집은 마냥 친절하지 않다. 잉그리드와 마사는 아주 오랜만에 재회했다. 이들의 상봉이 마무리된다면 어떤 숏이 이어져야 할까,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같이’에서 개인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이어질 법 하지 않을까? 그런데 잉그리드의 첫 번째 병문안이 끝나자마자, 그 다음 시퀀스는 며칠 뒤의 두 번째 병문안으로 이어진다. 물론 또 병문안을 오겠다고 했지만, 이전 숏이 잠재하고 있는 정서를 생각했을 때 다소 예기치 않은 이동이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시간을 멀리 건너 뛸 땐 자막 등으로 관객에게 언질이라도 주지 않던가? 두 번째 병문안 이후 대뜸 짐을 정리하고 있는 잉그리드의 모습으로 이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이전 숏에서 조금의 언질조차 없었던, 그래서 계획하지 않은 장면으로 마치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간다.
예상하지 않았고 끌려가기도 싫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어딘가, 맞닥뜨려야 하는 무엇, 그것이 인간에게 예정됐고 두렵지만 끌어안아야 할 죽음이다. 그 끌려감 속에서 끝내고 싶지 않은 삶이 환기된다. 이미 마련된 공간과 타협한 간헐적인 벽지, 줄리안 무어와 틸다 스윈튼의 의상, 화장 등 알모도바르의 의사가 묻은 시각적 요소에서 죽음과 삶의 관계가 드러난다. 그것들의 색채에서 말이다. 영화 내내 잉그리드는 죽음이 두려웠고, 마사는 초반부에 한해 죽음에 그다지 초연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 이때 잉그리드의 입술에는 아주 진한 레드 립이, 마사의 의상은 늘 붉은 경향이 동행한다. 마사 거처의 벽지나 문 등은 아예 대놓고 빨갛다. 마치 뚝뚝 떨어지는 뜨겁고도 흥건한 피와 살덩이를 연상케 하듯 말이다. 그래서 빨강은 늘 삶을, 그것도 육체에 의한 삶을 상징하는 색채였다. 동시에 빨강은 그리스 신화 속 전쟁의 신인 아레스를 대표하는 색채로서, 곧 '죽음'을 환기한다. 본디 피나 살은 하얗거나 검은 가죽 안에 숨겨져 있어야 하기에, 그것이 노출이 되어 내게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죽음 역시 임박한다. 영화에서도 빨강의 기능은 이와 같다. 드러나서 노출된 삶의 약점, 그것을 어떻게든 내 몸에 걸치거나 입술에 칠해서 간직하려 한다. 반대로 그 죽음에 초연해질 때 마사의 곁에서 빨강은 덜 남는다. 죽음에 삶은 굴복하지 않았음을, 오히려 삶이 죽음을 손아귀에 뒀음을 알리는 의지의 흔적, 빨간 립이나 블러셔 정도만 남지, 전체적인 색채는 오히려 초연하다.
알모도바르가 대륙을 옮기며 이베리아 반도에서와 달리 유난히 더 부각하는 본 작품의 녹색이나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생명력을 상징한다. 녹색은 무궁무진하게 피어나고 굴하지 않는 식물의 끈기, 이들이 인간에게 내어주는 생명력의 산물을 연상시킨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천 물을 떠올리게 하는 파랑은 어떠한가. 동시에 알모도바르는 이 무한한 생명력 가운데서 죽음을 떠올린다. 초록으로 우거진 정원이나 숲에서 마사는 존엄사를 결정하고, 데이미안은 기후 위기로 인한 종말을 떠든다. 왜 굳이 그래야할까, 그 감각적인 생명의 맛을 그저 즐길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 곁에 죽음이 있어야만 이 값진 초록과 파랑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희망을 논하게 되는 법이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악취를 맡아야 자스민의 향이 더 생생히 느껴진다고 말한 것처럼 죽음 곁에서 삶을, 삶 곁엔 죽음이 필요하다.
이에 우린 대칭을 이룬다. 누군가는 위암으로 사망한다. 아마도 예정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살고 싶은 의지를 무력화시킨 죽음 곁에서, 살 수 있었음에도 자의로 결정한 죽음이 대칭을 이룬다. 가장 직접적으론 프레드와 마사의 관계, 남자는 전쟁에 파병되었었다. 이후 전역하고 돌아온 그는 몰골과 영혼, 양자 모두가 초췌해졌다. 전쟁은 그를 망가뜨려 놓았고, 돌아와서도 환각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던 그에게 전쟁은 도망치고 피해야 마땅한 것, 그 죗값을 병원이나 구조 작업 등으로 속죄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곁에서 모순적이게도 마사는 정반대의 행보를 취한다. 종군 기자로서 늘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와 달리 그녀는 전쟁은 참여해서 그 참상을 알려야 했다. 죽음에 가까우니 삶을 갈망했고, 반면 안락한 삶에서 죽음이 궁금해진다.
반면 현재의 마사는 다르다. 현재 그녀는 잉그리드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그녀의 의사와 상반된 암세포는 그녀를 앉히고 눕힌다.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서 조금 걸을 떼도 바로 지치고, 심지어 가만히 앉아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벅차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사는 어떻게든 일어선다. 잉그리드는 그녀의 건강을 생각해서 말리지만, 마사는 들을 생각이 없다. 그녀는 어떻게든 꿋꿋하게 서서 족적을 남기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반면 건강한 잉그리드에게 삶은 마사만큼 간절하지 않다.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잉그리드는 오히려 마사와 상반되게 안일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제 이야기를 남기려 애쓰지도 않고 아예 하지를 않는다. 영화 내내 관객은 마사는 알아도 잉그리드는 잘 모른다. 무언가가 가득 채워져 있는 마사의 수납장과 달리, 이사를 간 잉그리드의 집에 책장은 텅 비어져 있듯 말이다. 오히려 잉그리드가 흥미 있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나 죽음을 앞둔 타인의 이야기다. 마사가 말하는 심장과 정신의 대립처럼, 죽고 싶은 정신 앞에서 육체는 팔딱거리고, 반면 약동하는 정신 앞에서 육체는 저문다.
그렇기에 죽음에 임박하면 더더욱 초연해지기 어려워진다. 놓치기 싫은 그 찬란한 삶이 자꾸만 플래시백으로 끼어들고, 마사가 모아놓은 추억의 조각들은 어찌나 찬란한가! 그래서 영화에선 다음과 유사한 말을 한다. 죽음의 가장 큰 안정제는 섹스라는 뉘앙스의 문장을 말이다. 이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주장이다. 섹스는 그 본성이 되었든, 사회문화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든 늘 위험과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무수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폭력이 동반되며, 나체는 무방비 상태로서 위험천만하다. 또한 행위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 역시 위험이 매우 크기에 두려워야 마땅하다. 후자의 경우 오랜 기간 쾌락을 위한 섹스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금기시되었기에, 섹스는 곧 법을 어기는 것, 합법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가 되었든 후자가 되었든, 섹스는 당연하다거나 즐겁다. 그래서 섹스는 마찬가지로 삶의 크나큰 대죄이자 흉악범죄라 할 수 있는 죽음 역시 덜 두렵게 만들어준다.
동시에 섹스는 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죽음을 익숙하게 만든다. 내 몸에 상대의 몸이 들어온 상태에서 무아지경에 빠지면 내가 손에 쥔 육체가 내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에 섹스는 나를 포기하는 행위, 곧 나의 의식을 기꺼이 놓아야 하는 죽음의 예행연습이다. 섹스가 아니더라도 타인과 대면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좀 더 덜 익숙하게, 이로써 내가 스스로가 아니게 되는 죽음에 좀 더 익숙하게 만들어준다. 서로 동행하는 잉그리드와 마사가 자신의 판단 기준이 아닌, 서로의 시야에서 맞닥뜨린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사가 사망한 이후 찾아온 미셸은 틸다 스윈튼이 1인 2역을 맡는다. 그런데 마사 생전엔 그토록 똑 닮을 필요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마사 생전에 미셸은 딸로서 자신의 서운함과 호기심을 놓지 않으려 했고, 마사 역시 종군기자로서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사가 누군가를, 잉그리드를 필요로 한 것이다. 자신이 부패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됨으로써 존엄사를, 곧 생의 마지막 의지를 지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잉그리드가 곁에 있어야만 나를 포기하고 상대가 될 수 있는 죽음과 친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작품의 클로즈업은 단순하고도 안일한 연출이 아니다. 일단 클로즈업은 삶의 희로애락을 반영한다. 생의 막바지에서 "내가 이런 광경도 다 보네"라고 말하며 삶이 어째서 즐거운 건지를 논하는 마사, 이런 그녀를 보면서 뜨겁게 눈시울을 붉히는 잉그리드를 클로즈업한다. 내게 가까운 바로 그것은 삶, 그 삶이 반영하는 것이 다채로운 감정이다. 영화에 가득한 죽음의 공기 속에서 알모도바르는 더더욱 삶을 클로즈업하며, 그래서 삶이 소중하다고 논한다. 동시에 그 클로즈업은 잉그리드와 마사가 서로를 바라보는 리버스 숏의 결과물이다. 동행하는 서로는 나 자신의 얼굴보다 상대방의 얼굴이 더 가깝다. 심지어 잉그리드가 마사의 심정을 이해한 후반부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오마주하듯 두 얼굴이 포개진다. 상대에게 가까워짐으로써 내게 멀어지는 일상 속에서의 자기 포기, 잠시 동안의 죽음이 아이러니한 클로즈업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 역설이 죽음 역시 재규정한다. 분명 죽음은 나의 포기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은 때때로 나의 보존이다. 리버스 숏에 의한 클로즈업이 상대에게 가까워지며 나 자신한테선 멀어진다면, 죽음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영화 속 ‘비극’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영웅들이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영웅성, 주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맞이한 죽음을 그려냈고 마사의 선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존엄사는 자신이 남기고 싶은 최후의 삶을 보존하였다. 또한 타인과의 접촉과 포개짐은 자기 포기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타인에게 전이할 수 있다. 이에 작가인 잉그리드에게 모든 것을 남기며 글로서 승화될 여지 역시 남겼으며, 살아있을 땐 내내 소원했던 미셸이 죽음 이후로 가까워지고 닮아간다. 이에 잉그리드의 말처럼 마사는 비워졌지만 더 채워지고 충만해졌다. 그렇다, 오히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실종되어버린 알모도바르의 색채도 그렇다. 마사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알모도바르의 손때가 묻은 숏들이 많아지고, 그녀의 최후는 알모도바르를 아는 관객이라면 누가 봐도 "알모도바르답다!"라고 칭할 법한 수려한 미장센이 승화한다. 즉 알모도바르는 미국으로 활동 반경을 옮기면서 환기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한 것이다. 삶이 당연할 땐 멀어졌던 자신, 그러나 상실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느껴진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마사의 방문을 닫아 잉그리드의 오해를 불렀지만, 동시에 마사를 향한 애틋함을 더 부각한 것처럼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따금의 즉흥이 삶의 의지를 더 환기하는 법이다. 그래서 알모도바르의 개성이 온당 강한 작품은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가 미국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의 사유와 연출은 충분한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