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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olo Nov 10. 2024

몰입을 통해 찾아갈 우리의 삶, 그 여정을 위하여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하리 저]를 읽고 남은 잔상들에 대하여

2024년 제 31회 영남일보 책읽기賞 우수상 수상작


도둑맞은 집중력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문득 커다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질문은 이렇다. 우리의 일상을 우리 스스로우리의 의지대로 펼치며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알지 못할 불편함과 그 근원을 찾아야만 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마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이유를 찾고 싶어졌다.     


 2024년 지금의 일상을 바라보았다. 출퇴근길의 풍경에는 스마트폰이 빠지지 않는다. 무선이어폰을 낀 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자판만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모두의 시선은 스마트폰에만 향해있다. 이름하여 초연결의 시대다. 피로함에 눈을 감고 있다가도 메시지나 전화를 알리는 스마트워치의 알림에 눈을 번쩍 뜨며 다시 ‘연결’에 나선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메시지를 보낸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도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방금 수신된 메일이 어떤 내용인지 확인한다. 만약 약속이 있다면 목적지에 도착도 전에, 인근 맛집을 검색하고 예약 가능 여부를 앱을 통해 쉼 없이 확인한다. 우리의 연결은 끝없는 재연결을 낳는 탓에 우리의 시선은 기술로 점철된 스마트폰이 펼치는 세상으로만 향해있다. 우리의 관심 또한 말이다. 우리의 일상이 원래 이런 모습이었던가?     


 문득 오래전의 나의 일상을 돌아보았다. 학원을 가기 위해 같은 시간에 줄곧 같은 버스를 타곤 했다. 목적지까지의 시간 동안 나는 창밖을 항상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정류장 안내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같은 시간과 같은 거리를 달리는 버스였지만, 내 눈에 담기는 풍경은 매일 미묘하게 달랐다. 이런 풍경도 내게 익숙해질 즈음, 버스의 승객들에게도 눈이 향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를 어른들은 서로를 반가워하며 목적지 전까지 쉼 없이 얘기를 나누셨다. 어떤 얘기들이기에 그리 웃음이 가득하신지 싶어, 도로와 버스와 오가는 승객들의 뒤섞인 소음들을 뚫으며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다가도 깜빡 잠이 들 때면, 버스 기사님은 나를 이미 다 알고 계시 다듯이 한 정거장 전에 꼭 깨워주시기도 했었다. 버스에서의 이런 풍경과 일상은, 나만의 추억 이자 시대상이 되었다. 2024년과는 너무나 달랐던 일상으로,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상으로 말이다.

다시, 2024년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았다. 스마트폰은 개인을 넘어, 가족의 울타리에 어느새 들어와 있었다.     

 어린 시절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작은 연결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그 순간들을 놓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저자 요한 하리는 아이와의 관계와 방해요소(스마트폰)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순간에서도 우리는 스마트폰과의 연결을 끊지 못한다 (니르 이얄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와 자식의 진정한 연결은, 이런 보통의 순간들을 쌓아감에 있을 텐데 부모와 아이의 연결에서까지도 스마트폰이 자리하고 있다. 되찾을 수 없는 순간들만 끊임없이 연결될 테다. 요즘 어딜 가건 장소와 관계없이, 스마트폰을 아이의 손에 쥐여주고, 개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는 부모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이는 스마트폰이 선보이는 세상에 온 신경을 쏟으며,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몰입’에 도달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접어두고 한 가지만 하기로 할 때만 몰입은 가능하기에, 아이는 더 이상‘귀찮게’ 부모를 찾지 않게 된다. 

 연결의 역설이다. 아이가 스마트폰과 연결될수록,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단절돼간다. 필요한 건 단지 나와 너의 작은 연결의 순간들이었지만, 그런 순간들을 기술(기기)에 넘겨주었기에. 우리가 잃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서나 잃고 있는 걸까? 잃어가는 집중력은 그저 그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니컬러스 도드먼은 말들의 가축화 문제와 이상행동을 설명하며말들이 타고난 본성을 표현할 수 없는생물학적 목적의 좌절로 고통받고 있고이 고통과 압력이 너무 강해 행동과 집중력이 망가지고 있다.”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야생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말을 지금껏 본 사람이 없습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이 내게 던진 질문에, 알지 못할 불편함을 가진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나의 일상을 개인의 의지와 달리, 나 스스로 만들어가지 못함을 내 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요한 하리가 우리의 집중력 문제를 개인을 넘어서는 구조적, 환경적 문제라고 지적했듯이, 사회 속에서 나 또한 ‘생물학적 목적의 좌절’을 겪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찾는다. 그게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태초의 사람부터 집단화를 지속해왔다. 군락을 이루며 함께 했듯이, 가족이란 울타리에 기대듯이. 달리 보면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들이었다. 초연결 사회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에도 마음 한 편은 어째서인지 허전하고 불편하다. 기술의 고도화는 사회 구조의 고도화와 그 복잡성과 다르지 않기에. 지금 우리에게 원초적 단순함이 설 자리가 있긴 한 걸까? 우리 본연의 연결은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문득 잊고 있던 나의 꿈이 생각났다. 어릴 적에 자신 있게 써냈던 장래희망(예술가)과 꿈꿨던 미래들이 나의 일상에 얼마나 담겨있는 걸까.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꿈은 잊어야만 했다. 오늘날의 평범한 직장인들이라고 꿈이 없었을까? 말은 달리고 싶고, 사람은 꿈을 좇아가고 싶다.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사람들을 우리가 말없이 축하하며 부러워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꿈을 우린 잊어야만 하나? 꿈을 좌절시키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결혼율 감소, 저출산, 높은 자살률, 정신건강 문제 등의 익숙한 사회 문제는 ‘인간’의 연결이 끊어진 ‘꿈’ 없는 사회의 단면이자 결과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단순한 연결일지 모른다. 오래전 버스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던 ‘인간적인’연결 말이다. 특별함이 아닌 단순한 연결을 생각한다. 가족이 보고 싶을 땐, 기술에 그 역할을 넘기지 말고 귀찮더라도 찾아가 함께 하는 것 말이다. 이미 연결돼 있다는 착각에 우리가 소원했던 것들을 돌아본다. 함께 하지 못했기에 내 마음이 허전했던 것처럼. 모두 기술이 주는 편안함의 역설이다.


 80대 후반의 미하이는 인생의 끝을 향해가며 이렇게 말했다.죽음을 향해 갈 때 우리는 몰입을 경험한 순간을 떠올릴 거라고”. 우리는 꿈을 좇을 때 가장 쉽게 몰입한다. 예술가를 꿈꿨던 내겐 특히 글을 읽고 쓸 때가 그런 순간들이었다. 이렇게 몰입할 때 무엇이 우리를 방해하는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적막의 도서관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비록 쏟아내야 했던 에너지로 힘들었지만, 목적 없는 몰입은 즐거웠고 몸은 즐겁게만 기억했다. 마치 꿈을 위한 밥처럼. 이렇듯 역설적이게도 몰입 덕분에 내 삶은 좌절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꿈은 아직 미완으로 현재 진행 중이니까 말이다.      


 이렇듯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은 몰입의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꿈을 찾아가는 것은 몰입의 과정일 것이다. 이렇게 찾은 꿈들이 모이면 우리 사회의 ‘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는 꿈을 찾을 수 없다. 말은 야생에서야 제대로 달릴 수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한다. 삶의 여정에서 찾아오는 불편함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의 시대상 또한 한때의 추억으로 자리할 테다. 그러니 이제 기기는 잠깐 내려두고 이 순간들을 스스로 채워나가자.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꿈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스마트폰을 놓았을 때만 눈에 담기는 풍광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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