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마 당신의 여성성을!
센터에서 회원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이 나이에 뭘 꾸며요.”
“이제는 그냥 아무거나 편하게 입고 다니죠.”
“군살이 많아서 이런 부분이 흉해요…”
그 말들은 대개 웃으며 나오지만
듣는 나는 이상하게도
그 말이 조금 불편했다.
왜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몸을
먼저 포기해 버리는 걸까.
여자는 분명
생물학적으로 한계를 가진 몸이다.
모두가 특정 시기에 에스트로겐은 줄어들고,
몸의 변화는 더 빠르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늘 의문이 들었다.
그 변화가
왜 가진 성별 ‘포기’로 이어져야 할까.
문제는 몸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원하지 않아도 배워왔다.
여자는 예뻐야 한다.
여자는 젊을 때 선택받아야 한다.
그리고 늙으면… 그만이라는 암묵적인 기준.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계속 나를 심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기준이 조용히 바뀐다.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그때부터 여자는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이 옷은 나이에 안 맞고,
이 행동은 과한 것 같고,
이 마음은 철없는 것 같다고.
그렇게 조금씩
자기 자신을 줄여간다.
중년의 여자들은
대개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점점 작아지는 쪽이다.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가리고 숨긴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반대로 간다.
거세지고, 날카로워지고,
여성성을 약한 것이라 여기며 밀어낸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둘 다
나이에 상관없이
온전한 여자로 존재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상태다.
나도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심지어 결혼을 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삶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그들의 삶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지키고,
자신을 뒤로 미뤄온 시간들.
그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자신을 함부로 말하는 순간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이제 나는 끝났지 뭐.”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
배운 문장 같아서,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아서.
어릴 적, 계절이 바뀌면
엄마는 옷장을 모두 꺼내
하나씩 입어보곤 했다.
거울 앞에 서 있던 엄마는
이상하리만큼 즐거워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엄마, 그 옷 입으니까 너무 예쁘다.”
그 말을 들은 엄마의 얼굴이
유난히 환해졌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날,
엄마의 작은 패션쇼가 한참 이어졌던 것도.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엄마도 여자이고 앞으로 죽을때까지 우린 모두 여자이구나 라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여자가 끝나는 건 아니다.
나는 나를
사라지는 존재로 두고 싶지 않다.
여성성은
젊음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의 라인이나
피부의 탄력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그건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자기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자기를 비하하지 않는 것,
자기를 여전히 존재로 두는 것.
나는 그게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해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꽃처럼 피고 지는 존재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나무에 더 가깝다.
사계절을 지나며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존재.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지고,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워지는 존재.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나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에게 말한다.
괜찮다.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충분히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