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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쌤 Jan 10. 2021

여기서의 '우리'는 모든 세대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 갈라파고스 세대>를 읽으며

  나에게 책은 일종의 전리품 같다. 어렸을 적에는 그러지 않았던 듯도 한데 머리보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무거워지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완독보다는 발췌독을 일삼으며 책장에 책을 채우는 데에 관심이 더 깊어졌다. 쌓이지 않는 지식을 지혜로 채워야 할 판임에도 참 사람이란 게으르고 간사하여 알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았던 해가 꽤나 흘렀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이 책은 나에겐 남다른 책이다. 작년 초에 만나자는 제자 녀석과 술 한잔을 하다가 받은 책이기에 전리품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술기운에 읽었다. 하필이면 그 전년도에 학생들과 독서 토론하는 책으로 <90년생이 온다>를 선택했던 터에 관심도 생겼고 말이다. 그러다 사상 초유의 원격 수업 준비를 하며 변명이지만 책 읽기의 흐름이 깨졌다. 안다. 모두 다 변명이다.      


  책상에 늘 이 책을 놓았다. 빨리 읽어내야 한다는, 나름의 부채 의식이 컸던 탓이다. 책 표지 디자인도 밝고 화사해 눈에 확 들어오기도 했다. 자꾸만 눈에 밟혔다. 선물해 준 제자 때문인지, 책 표지 탓인지 모를 일이지만. 계속 쌓이는 의무감과 학교 일 사이에서 학교 일을 택하며 밥벌이의 설움을 탓할 때 즈음,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있었다. 젠장, 이젠 빼박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의도적으로 이 책을 멀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선물해 준 제자에 대한 부채 의식이라기에는 과한 판단인 듯하고, 아무래도 술기운에 읽었을 적에 느꼈던 첫 감정 때문이라 생각했다.


  꽤나 강한 문체들의 연속이었다. 문장을 통해 느껴지는 작가의 의식은 당참과 단단함을 넘어서 확신에 차 있었다. 90년생이 아닌 사람이 90년생을 이해해보자는 취지로 90년생을 단정 지은 책에서 느낀 감정과 결이 다르지만 사뭇 비슷했다. 한쪽이 기성세대로서 90년생을 평가하고 있었다면 한쪽은 그런 평가를 함부로 내리는 것에 대한 단죄를 한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단정하는 내용이 담긴 것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세상은 수학처럼 A와 ~A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와 다른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어떤 시선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A가 누군가에게는 정의로, 또 누군가에게는 불의로 선택되는 곳이기에 단정하는 것의 두려움을 경계한 탓이다. 여기서 오는 불만과 고민이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한 모양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이제는 세상으로 나가 있을 제자들이 속한 나이가 90년대 중반 생들이었다. 고등학생 때의 순수한 당당함을 세파에 흔들리며 풀죽어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왔다. 나 역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판에서 버티기 위해, 견디기 위해 나름의 수모와 슬픔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겪은, 혹은 나보다 더 차가운 현실을 직면할 내 제자와 누군가의 제자들을 떠올리면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접고 오롯이 안쓰러움으로 책을 읽어보았다.      



  우리 세대가 가진 자아정체성 그리고 자존감은 외부에서 오는 아주 자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바스러질 만큼 취약하다. (좀처럼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끼기 힘들어져버린 시대상과 명시적 의미에 집착하는 사회풍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p.32)     


  젊은 세대는 그렇게 탈권위적 흐름에 적응했다고도혹은 교묘히 길들여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됐다. (탈권위주의 성향을 갖게끔 성장했지만 정작 권위에 굴종하지 않으면 제 밥벌이도 해내기 어려운 사회가 우리를 맞이했다. (p.53)     


  사람들은 도박으로 큰돈을 잃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정작 그런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노름에 빠졌는가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잘못은 어디까지나 잘못이지만당신네 어른들로부터 태어난 젊음들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어떤 코인에라도 인생을 걸어 던질 수밖에 없는동아줄 아닌 지푸라기라도 붙잡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책임도 아주 조금은 있지 않겠느냐고. (pp.103-104)     


  청년들이 불행한 이유는 불편과 결핍이 아닌 지나친 편의와 과잉에 보다 가깝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균적인 삶들을 불행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바로 어중간한 귀족적 삶이다무언가 생산할 필요 없이그저 그날그날 뭘 소비할지만 결정하면 되는 완전한 경제적 자유의 삶 말이다과거의 노동자들에겐 전혀 허락되지 않았거니와 실질적인 존재도 형태도 흐리멍덩했던 세계가이제는 TV와 인터넷, SNS와 유튜브 같은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얼마든지 간접체험이 가능한 영역이 돼버린 것이다. (pp.161-162)


  열 명 중 서너 명을 반드시 여성으로 채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정말 중요한 문제는 왜 열 명밖에 뽑지 않느냐는 것이고그래서 서너 명의 자리를 내주는 것마저 화가 나게끔 하냐는 것이다. (p.175)     



  90년생으로 90년생을 바라보며 쓴, 일종의 자기 고백적 혹은 세대 고백적 글에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불편한 진실을 다시금 느끼면서도 기성 시스템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야 하는 내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세상은 달라질 거라고 외치는 큰 흐름 속에서 작은 물결들은 도도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곤 하지만 기존의 것을 유지하는 물결들이 훨씬 많은 과도기에 나고 자란 것이 죄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나의 소시민성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탓이기도 했다.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90년생의 글을 읽으며 해결할 수 없는 상념만이 마음에 맴돌았다.     


  교사가 되는 현실도 만만치 않아, 많은 이들이 실패와 절망을 매년 되풀이한다. 고관대직에 비하면 고작 교사인데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버티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정착하지 못한 윗세대가 끊임없이 졸업해 사회로 진출하는 후배 세대와 계속되는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이따금 출발선이 다른 경쟁을 하는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계속되는 정체 현상이 서로를 물어 뜯어야만 하는 현실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회피 기제가 발동한 탓일까. 요새 나는 90년대의 낭만을 떠올리곤 한다. 그 시절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가요 프로그램, 다채로운 소재로 가득했던 드라마를 떠올린다. 시절이 참 좋아 조금만 검색하면 그 옛날의 것들을 볼 수가 있다. 발전한 기술 덕분에 나는 90년대에 방영 시간을 놓치면 다시 볼 수 없었던 그때의 것들을 보며 과거의 추억 속에 잠시 빠질 기회를 얻는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저렇게 도전하고 실패해도 그 길들을 걷다 보면 결국에는 무언가를 손에 쥘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낭만을 품을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IMF가 터지면서 그러한 낭만도 한순간에 사라졌음을 기억한다. 거기서부터 우울한 시대의 출발이었던 건 아닐까 싶다. 힘내라는 말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순간의 시작 말이다.      


  거대 담론을 논하는 시대는 사라졌다는데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고서는 시대의 아픔을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 따위가 거대 담론을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시대의 아픔과 내 그릇의 크기라는 간극에서 나는 늘 방황할 수밖에 없다. 비단 이런 방황이 나만의 것일까? 8,90년대의 성장 속 낭만을 누렸던 세대도 그러하고, 그 시절에 태어난 젊은 세대도 그러하고, 지금의 어린 세대도 그렇지 않을까.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다른 아픔을 쌓으며 자신과는 다른 세대의 더 나은 현실을 부러워하며 비교하고 공격하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간극 사이에서 내가 버틸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교 메신저에 소개 문구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쓴 선배 교사가 기억난다. 20대의 교직 1년차의 햇병아리인 나는 뭘 저런 구절로 싸이월드 감성을 드러내나 싶었다. 30대 중반이 되어, 밥벌이의 고단함에 감사하고 사회생활의 어려움과 슬픔을 겪으며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 아마도 모든 이들 사이에 갈라파고스 같은 섬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같은 세대끼리의 동류 의식을 연대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버티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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