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빛나기 위해선 어둠이 필요하다 - <위건부두로 가는 길>
어려움을 많이 느낀 책이었다. 외국 생활을 TV로만 접한 전형적인 한국인인지라 나에게 ‘파운드, 실링, 페니’라는 영국 화폐 단위는 낯설기만 했다. 가뜩이나 경제라는 분야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나에게 돈 이야기는 쥐약이었던 셈이다. 또한 작가가 탄광을 비롯한 노동자 밀집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삶의 결을 그린 시절은 그 곳이 우리나라라 할지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1930년대이다. 아. 고된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삶을 날것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날것 그대로를 책 안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땀 비린내와 탄 가루, 환기 안 되는 방의 냄새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육체 노동의 숭고함과 감사함을 잊고 산 순간들을 반성하게 했다.
생각해보자. 지금 나는 책을 편하게 읽고 있으며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내 생각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명품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세탁된 옷을 입고 있으며 간간히 목을 축이고자 컵에 담긴 찻물을 마시고 있다. 이따금 카톡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추기도 하며 수업을 위해 분필이나 마카를 챙기곤 한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노동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은 하나도 없다. 책도, 컴퓨터도, 옷도, 세탁기도, 컵도, 찻물에 담긴 찻가루도, 스마트폰도, 분필도, 마카도 일면식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간과 땀을 투자하여 만들어 낸 결과물인데 우리는 이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그들이 그들의 노동에 비해 어느 정도의 돈을 받는지는 부차적으로 따지고 싶다. 그것까지 따지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테니. 그저 인간의 역사가 산업화 시대로 넘어 오면서 분업이 가속화되었고 점차적으로 많은 이들이 누군가의 노동에 대해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나와 가깝건 멀건 일면식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내게 돈이 있으면 그뿐, 그 돈으로 내가 필요한 것을 산다. 나는 돈을 지불했으니 그들의 노동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 그렇게 자위하는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 사람이 그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는 세상만이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한다. 조지오웰의 글이 그 말을 전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노동’을 없애라하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나는 사실 무섭다. 점차 기계화되어 가는 이 세상이 말이다. 자꾸만 편해지는 세상이 무섭다. 자꾸만 편해져서 이것이 발전이라 치부하는 세상이 두렵다.
1937년에 출간한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보고 더 두려워졌다. 기계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육체노동의 신성함이 가질 가치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도 육체노동을 해라,라고 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워낙에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워낙에 고생을 많이 하니까. 아,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세상이 점차 도래하고 있음에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나는 빈틈없이 완벽한 세상보다는 빈틈 많은 인간 세상이 더 좋은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생각의 연속이라 답답하다. 누구인들 편한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누구인들 쉬운 일을 꿈꾸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이 더 깊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