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쌤 Jul 12. 2020

노동자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허하라

빛이 빛나기 위해선 어둠이 필요하다 - <위건부두로 가는 길>

  어려움을 많이 느낀 책이었다. 외국 생활을 TV로만 접한 전형적인 한국인인지라 나에게 ‘파운드, 실링, 페니’라는 영국 화폐 단위는 낯설기만 했다. 가뜩이나 경제라는 분야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나에게 돈 이야기는 쥐약이었던 셈이다. 또한 작가가 탄광을 비롯한 노동자 밀집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삶의 결을 그린 시절은 그 곳이 우리나라라 할지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1930년대이다. 아. 고된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삶을 날것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날것 그대로를 책 안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땀 비린내와 탄 가루, 환기 안 되는 방의 냄새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육체 노동의 숭고함과 감사함을 잊고 산 순간들을 반성하게 했다.



  생각해보자. 지금 나는 책을 편하게 읽고 있으며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내 생각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명품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세탁된 옷을 입고 있으며 간간히 목을 축이고자 컵에 담긴 찻물을 마시고 있다. 이따금 카톡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추기도 하며 수업을 위해 분필이나 마카를 챙기곤 한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노동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은 하나도 없다. 책도, 컴퓨터도, 옷도, 세탁기도, 컵도, 찻물에 담긴 찻가루도, 스마트폰도, 분필도, 마카도 일면식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간과 땀을 투자하여 만들어 낸 결과물인데 우리는 이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그들이 그들의 노동에 비해 어느 정도의 돈을 받는지는 부차적으로 따지고 싶다. 그것까지 따지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테니. 그저 인간의 역사가 산업화 시대로 넘어 오면서 분업이 가속화되었고 점차적으로 많은 이들이 누군가의 노동에 대해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나와 가깝건 멀건 일면식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내게 돈이 있으면 그뿐, 그 돈으로 내가 필요한 것을 산다. 나는 돈을 지불했으니 그들의 노동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 그렇게 자위하는 것이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업시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석탄을 파고 퍼담는 작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p.47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이 석탄과 멀리 있는 탄광에서의 노동을 결부시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그냥 ‘석탄’, 달리 말해 나에게 있어야 하는 무엇일 뿐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딱히 어딘지는 모를 어딘가에서 도착하는 검은 물질이며 지불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빼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도 같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p.48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 사람이 그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는 세상만이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한다. 조지오웰의 글이 그 말을 전해주는 듯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노동’을 없애라하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나는 사실 무섭다. 점차 기계화되어 가는 이 세상이 말이다. 자꾸만 편해지는 세상이 무섭다. 자꾸만 편해져서 이것이 발전이라 치부하는 세상이 두렵다.




  마땅한 기계를 쓰면 단 몇 분 만에 해치울 수 있는데도, 배수관 묻을 도랑을 만드느라 대여섯 사람이 죽도록 땅을 파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그런 일은 기계가 하고 사람들은 가서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나 금세 이런 질문이 나온다. 다른 무얼 한단 말인가? 그들은 ‘일’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일’에서 해방된 듯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니란 말인가? (...) 정신지체가 심하지 않은 이상, 인간은 대체로 수고를 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지나친 쾌락주의자들은 달리 생각할지 몰라도 인간은 걸어다니는 위가 아니다. 인간에겐 손도 있고 눈도 있고 뇌도 있는 것이다. (...) 완전히 기계화된 세상에서는 땅 팔 일이 없듯, 목공도 요리도 오토바이 수리도 다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울러 기계는 우리가 ‘예술’이라 분류하는 활동까지 잠식할 것이고, 카메라와 라디오를 통해 그런 현상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이 세상을 기계화할 수 있는 한껏 기계화해보라. 그러면 사방 어디에도 당신이 일할 기회, 곧 살 기회를 박탈할 모종의 기계가 있을 것이다. -pp.267-268




  1937년에 출간한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보고 더 두려워졌다. 기계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육체노동의 신성함이 가질 가치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도 육체노동을 해라,라고 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워낙에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워낙에 고생을 많이 하니까. 아,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세상이 점차 도래하고 있음에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나는 빈틈없이 완벽한 세상보다는 빈틈 많은 인간 세상이 더 좋은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생각의 연속이라 답답하다. 누구인들 편한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누구인들 쉬운 일을 꿈꾸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이 더 깊어져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부모와 자식. 그 가깝고도 먼 사이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