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의 장벽
나도 여느 20대처럼 청운의 뜻을 품었더랬다. 지금에와서 나의 그 치열했던 20대의 삶을 생각하노라면 꼭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언어)영역 현대운문 분야에서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인 외국 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인적 드문 길을 선택한 것은 결국 나이므로 그 길을 걸으며 오는 책임들 또한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대학 이후의 삶만큼은 정신차린 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며 이 악물고 공부를 했다. 20대가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해외여행도, 대학생활의 꽃이기도 한 동아리 활동도, 대학 인간관계도 외면했다.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행복하게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사회에 나가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 졸업까지 내가 목표했던 그 길의 모습대로 이루어냈다.
아, 인생이 이제야 뜻대로 풀리려나 보다, 싶었다.
아, 세상이 뭐가 두려울까, 싶었다.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20대의 청춘이었다. 더운 여름에 졸업을 하려는 까닭은 남은 기간을 임용 준비에 매진하기 위함이었다. 임용 시험은 겨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을 걸어낸 나라면 해내겠지..
임용시험 일정이 나왔다. 서울 국어교사를 9명을 뽑겠다고 했다. 잉? 9명? 대학 하나에서 해당 교과 교사자격증을 얻고 졸업하는 사람만 50명이 넘을 게다. 교육대학원 졸업생까지 따지면..셀 수 없다. 그런데 9명? 나도...하..할..수는 있을까?
하늘의 장난인지 9명의 선발자는 18명이 되었고 그 해 임용시험은 나의 길이 아니게 되었다.
사립학교 정교사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공고문이 뜬다한들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덤비라고 외쳤던 20대의 청춘은 사라졌다. 대학 졸업자인 내가 집안에서 가만히 있는 건 부모 보기에 부끄러웠다. 교육청 홈페이지에 뜬 기간제 교사 공고문을 읽고 또 읽으며 그에 맞춰서 지원을 쉼없이 했다. 그리고 쉼없이 떨어졌다. 기실 떨어진 줄도 몰랐다. 어느 학교에서도 연락이 없었으므로.
아무 것도 모를 때라 혹시나 싶어서 되도록이면 학교에 방문접수를 하려고 했었다. 물론 그게 다 헛수고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남고에 원서 접수를 하러 행정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마 행정실장 쯤으로 보이는 분이, "이렇게 어린 데 남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꽤나 지난 기억이라 워딩이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말의 의미는 생생하다. 너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여교사인데 남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지원했니? 행정실 문을 닫고 걸어나오는 내 뒤통수로 느껴졌던 나의 모멸감. 그 감정만큼은 생생하다.
어떤 학교는 기간제 교사 선발에 필기시험부터 진행했다. 어느 학교에서 국어과 기간제 교사 1명을 선발하는 데 국어과 고사장이 4개쯤이었다. 한 고사장에 30명이 들어간다고 가정한다면, 120명이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셈이었다.
할 수 있다고 수없이 외쳐봤자 듣는 것은 내 귀뿐이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내가 설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물론 나의 봄은 아니었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다음년도 임용시험 준비에 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