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소유 Jul 28. 2024

산재처리는 복잡했고, 공상처리는 간단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알 수 없는 이유가 제일 어렵다.

K2 라인은 신규 설비라 모든 장비가 새것이다. 하지만 새것이라고 좋은 것은 아니다. 장비는 보통 장비의 눈높이 문제로 반조립 상태로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바다 건너 넘어온다. 라인에 반입되어야 완전하게 조립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없으면 완벽하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완벽한 것은 없다.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문제없이 장비의 가동이 시작되더라도 장비의 안정화 시간이 필요하다. K2 라인 장비 대부분이 안정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아저씨, 여기 장비가 멈춰서 진행하던 제품 다 중단되었어요. 빨리 봐줘요. 빨리.”


현장에 상주하는 교대직 여사원들은 보통 우리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비록 나이 차이가 한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도 또는 여사원의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Z세대, 30대 M세대, 40대 X세대, 50대 기성세대 그냥 모두 아저씨로 통한다. 어떻게 보면 편하고 합리적인 호칭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들에게 아줌마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에 아줌마라고 불렀다가는 사이가 안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아가씨라든지 이모라고 불렀다가는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커녕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우린 그녀들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 불편하고 이상한 호칭의 세계다.


“달호야 난 저쪽 장비 좀 보고 올게. 여기 멈춰있는 제품들 확인 좀 부탁해.”


난 진달호에게 말했다. K2에서 반복되는 업무에 익숙해졌다. 제품들이 멈춘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조립 공정 진행 후 조립 수준이 관리범위를 넘는 경우, 조립 장비의 특정 신호가 관리범위를 넘는 경우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멈추었을 때 등 다양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알 수 없는 이유가 제일 어렵다. 신규로 라인을 구성하면서 각종 센서를 설치하여 측정하는 관리 항목도 많아졌고 완성도를 측정하는 횟수와 단위공정의 개수가 특수 조립 시절보다는 상상 이상으로 많아졌다. 따라서 멈춰있는 제품의 개수가 열 배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이 존재한다. 물론 두께가 측정되거나 이물질 개수가 측정되는 관리 항목의 개수도 열 배 혹은 그 이상으로 많다는 얘기다. 일상적인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김민수 과장, 진달호 사원은 하루 시간 대부분을 라인에 상주한다.


“와, 지금 제품 열 개나 멈춰있어? 그전에는 하루에 한 개 멈춰있거나 없었는데. 여기 지금 아침부터 두 시간 만에 열 개나 멈춰있다니 무슨 일이야?”


이미 짐작해서 알고 있지만 빠른 상황 파악을 위해 진달호 사원에게 물어봤다. 진달호 사원도 현 상황에 관해 설명해 주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보통 수준이에요. 더 쌓이기 전에 빨리 풀어야 해요. 풀지 않고 있으면 멈추는 제품이 쌓이는 속도를 감당 못 해요. 이게 보통 맨날 하는 일이죠.”


진달호 사원이 현 상황이 보통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좀 더 빨리 걷거나 심지어 달리지 않으면 밀려서 낙오된다는 거울 나라 앨리스의 유명한 이야기 중 ‘붉은 여왕의 이야기’와 같은 현실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밖으로 나가서 무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방진복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방진복의 마무리는 늘 라텍스 장갑이다. 의료용 라텍스 장갑과 유사하지만 좀 더 얇고 투명한 색이다. 본래 의사가 꿈이었다. 의사 가운에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라텍스 장갑을 착용한 다음 손등을 보이며 손가락을 모두 펴는 모습, 내가 상상하는 외과 의사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그저 아무 관심도 주목도 받지 못하고 하루를 살기 위해 무언가를 조작하는 업무를 해야 한다는 목적을 갖고 배터리 생산 설비 앞에 멍하니 서있는 사원 나부랭이다.


“어제 뉴스 봤어? 북한군 노크 귀순. 이게 말이 되나? 말세야 말세. 요즘 군바리들 당나라 군대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내가 98 군번인데 우리 때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러다가는 언제 갑자기 전쟁이 나도 모르겠어. 군대도 이젠 별 쓸모가 없다. 회사 생활 대충대충 해.”


권준현 대리의 화두 마무리는 언제나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다. 권준현 대리는 참 선배다. 회사 생활의 고민은 잠깐의 순간에 잊는다. 평소에 일하며 돌아오는 주말에 혹은 퇴근 후 뭐 하고 놀까에 대한 생각을 한다. 업무는 닥쳤을 때 고민하고 적당한 힘만 사용해서 해결한다. 절대로 과도한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게 대기업이든 아니든 회사 생활 장기흥행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어느새 난 그 선배를 닮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영화배우와 같은 선 굵은 외모와 깊은 눈빛, 넉살 좋은 성격, 그에 따른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인기는 그만의 고유의 특성으로 생각했다.


“얼른 회사 나가서 와플 장사해야지. 부산에 내려가서 와플 장사할 거야. 개업하면 많이들 놀러 와.”


권준현 대리는 언제나 와플 장사로 말을 끝낸다. 진지하게 혹은 농담으로 꿈을 이야기하는 건지, 그저 현실을 잊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상에서의 미소를 짓게 만드는 발상이다. 밖에서는 별 쓸모없을 것 같은 배터리 공정 관리 능력들은 반복할수록 오로지 이 업계에서만 쓸모가 느껴진다. 사실 우리 대부분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K1 공장에서 했던 업무를 포함해서 K2 공장에서 하는 이런 업무들은 대체 왜 대학교까지 나와서 하게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배터리 회사 생산부 업무는 사실상 중학교 3학년 과학 시간에 배우는 옴의 법칙 수준만 알아도 된다. 생산부의 수천 명의 엔지니어는 어제도 오늘도 쓸데없는 일들을 하며 하루살이를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남들 밥 다 먹은 오후 한 시에 라인에서 겨우 나와서 20분 만에 식사하기 일쑤였다. 당연하게 점심 휴식 시간은 없다. 20분 만에 식사하고 5분간 양치질을 하고 다시 라인에 들어가야 한다. 그나마 밥 먹을 시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랄까. 사출지옥 동기는 여전히 점심 식사할 시간도 없다고 한다.


[슈우우웅···푸쉭]

[삑, 삑, 삑]


라인에서 업무를 마무리하는데 별안간 기계들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요란했다. 수십 대 장비의 전원이 동시에 내려가고 진공이 빠지는 소리다. 장비의 모든 전원이 꺼졌다. 곧이어 라인의 모든 형광등과 공조 시스템도 꺼졌다. 비상등의 작은 불빛만이 라인을 밝혀주었다. 모두 조금씩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행스럽게 뛰는 사람은 없어서 아비규환과 같은 모습은 연출되지 않았다. 모든 현장 여자 작업자들과 남자 정비사들 그리고 사무직 엔지니어들이 밖으로 나오자 그 인원이 가득해서 복도와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게 되었다. 북적거리는 인원들을 보니 라인 안에 5대 지옥 현장 사람들과 공정관리 작업자들, 엔지니어들, 그 밖의 업체 인원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었다. 곧 K2 공장 제조팀 팀장이 와서 얘기했다.


“아, 아, 정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우선 여기 휴게실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복도에 대기하고 있을 곳은 딱히 없고 너무 복잡했기에 사무실로 이동했다. 사무실에는 김민수 과장, 민귀남 파트장, 강건함 팀장 셋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야, 우리는 다시 라인 들어가야 해.”


민귀남 파트장이 얘기했다.


“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비상등만 켜져 있고 공조도 꺼져서 위험해요. 게다가 그 장비들이 꺼져서 유독가스가 라인 내부로 배출되고 있단 말이에요.”


김민수 과장이 말했다. 김민수 과장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 봤다. 그만큼 라인에 들어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 몰라. 위에서 우리 사무직들 보고 라인 들어가서 진행 중단된 자재들 빼서 선반에 정리하고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공정별로 파악하래. 그거 다 누가 하겠어. 제조팀. 작업자들? 정비사들? 아무도 안 해. 걔네들 들어가서 문제 생기면 노조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냥 우리가 조용히 들어가서 처리하자. 나 먼저 간다.”


민귀남 파트장은 무언의 압력을 받은 것인지 답답해하며 라인으로 이동했다.


“저기, 민 파트장 같이 갑시다.”


무슨 일인지 강건함 팀장도 라인 쪽으로 이동했다. 팀장, 파트장이 그렇게 가버리자 김민수 과장도 인상을 쓰며 뒤를 따라갔다.


“형. 우리도 라인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달호 사원이 눈치를 보며 내게 물었다.


“우리 저기 그냥 이렇게 들어갔다가는 죽을 것 같은데…. 일단 그 앞에 가보자.”


우린 어쩔 수 없이 라인 앞으로 갔다. 라인 앞에는 무언가 시커먼 아저씨들이 우르르 방진복을 입고 서 있다. 아저씨 중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K2 공장 생산부 노태성 본부장이다. 가까이 와야 자세히 보일 정도로 키는 작다. 눈썹이 송충이처럼 짙다. 심지어 눈썹에서 몇 가닥은 길게 삐져나와서 상당히 거슬린다. 눈썹 정리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눈, 코, 입은 작다. 한마디로 눈썹만 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우렁찬 동굴 발성 목소리는 주변 팀장들을 주눅 들게 했다. 그의 옆으로 생산본부 팀장 다섯 명과 제조팀장, 공정관리 팀장이 모여있고 안전팀, 설비팀, 전기팀 등 K2 공장의 모든 유관부서 리더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모두 방진복을 입었으나, 장화, 장갑, 모자는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대화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봉사활동에 나선 정치인들이 양복을 입고 와서 깨끗한 목장갑만 착용한 채 얘기나 하다가 사진 찍고 나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어찌 되었든 모두 빨리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자재를 처리합시다.”


노태성 본부장이 우렁차게 얘기했다.


“네 본부장님.”


팀장들은 모두 찍소리 못하고 대답했다. 저렇게 본부장 앞에서 한마디 못 하는 팀장들이라니 보기에 참 한심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방진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라인 입구부터 가스 냄새 비슷한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 이 냄새는 정말로 몸에 해로운 냄새다. 배터리 공정에는 질산, 불산, 염산 등의 유해 물질을 정말 물 쓰듯 사용한다. 가스도 마찬가지다. 공조 설비마저도 멈춰버려서 공기 중의 유해가스가 느껴진다. 장비가 가동되어 각종 가스를 퍼지 펌핑 벤트(진공에 넣고 빼는 것)를 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중단되어서 외부로 미량의 가스가 계속 유출 중이다. 대기 중에 유해가스와 탄소 밀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금 상황에 라인 내부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상황은 누구든 위험하게 만들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를 보호해 주는 안전 장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초라한 덴탈 마스크만이 내 코와 입을 막아줄 뿐이다. 공조 없는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무의미한 에어샤워를 하고 라인에 진입했다.


숨이 턱 막혔다. 공조가 안 되는 라인은 덥고 습했다. 게다가 자꾸 코 끝을 찌르는 이상한 냄새는 역겨웠다. 냄새에 적응이 되었을까 싶으면 또 다른 구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그 와중에 저 멀리 민귀남 파트장은 이미 진작 라인에 들어와서 열심히 자재를 빼고 있었다.


“파트장님 뭐 도와드릴까요?"


내가 말했다.


“야 씨바 죽겠다. 말 걸지 말고 알아서들 해. 공기 아깝다.”


민귀남 파트장은 묵묵히 얼굴에 땀을 닦으며 계속 자재를 뺏다. 그의 많은 땀 배출 때문에 답답한지 그나마 우리를 보호해 주는 그 초라한 덴탈 마스크도 턱으로 내려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와 같은 수많은 사람이 팀장의 눈치를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재를 빼고 있었다. 몇 명의 인원은 숨쉬기가 힘든지 장비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이런 환경이었을까 싶다. 하지만 나치에 의해 고통을 받은 유대인과 난 다르다. 난 밖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난 그만 역겨운 냄새를 못 버티고 탈의실로 잠깐 나왔다. 그제야 안전팀으로부터 방독마스크가 탈의실에 전달되고 있었다. 라인 출입문 밖으로 나가자 작업자 여성들과 정비사 남성들은 저 멀리 휴게실에 끼리끼리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서럽다. 그들의 뒤에는 거대한 노동조합이라는 단체가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뒤에는 노예를 부리는 정치 임원들만 있을 뿐이다. 그 정치 임원들은 우리를 개돼지로 볼뿐이다. 이 순간 조합이라는 안전 가옥 안에 있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너무나 억울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몰래 다시 사무실로 도망가기 위해 비상구로 숨어 들어갔다. 건물 정전으로 엘리베이터도 멈춰있어서 계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비상구 계단은 비상 전원이 공급되는지 생각보다 밝았다. 형광물질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눈이 명순응에 적응하기 어려워하기도 했고 갑자기 공기 중 산소 농도가 달라졌는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것은 매우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쿠당탕!]


계단을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넘어져 버렸다. 게다가 넘어지면서 발을 헛디뎠다. 내 발목이 무게가 실린 체중까지 견디게 되어서 안쪽으로 제대로 접질렸다. 난 발목을 어루만지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확인해 보니 발목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절름발이의 자세로 사내 병원을 갔다. 사내병원 상주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사외병원으로 가는 것을 추천했다. 당장 멀리 가보기엔 어려워서 회사 길 건너 정형외과를 갔고, 의사는 붓기가 더 많이 올라온 발목을 보더니 곧바로 간호사에게 엑스레이 촬영을 요청했다.


“여기보단 좀 더 큰 병원을 가봐야겠는데요? 엑스레이상으로는…. 여기…. 여기 보이시죠…? 발목의 골절과 함께 뼛조각이 살짝 보이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수술을 해야 할지, 깁스로 경과를 봐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네요. 그냥 다니시면 더 악화될수 있으니까, 일단 여기서는 반깁스만 해드릴게요.”


두 발로 절뚝이며 들어갔다가 반깁스에 목발을 짚게 되었다. 내 생에 첫 목발 생활이었다. 큰 병원을 가기 위해서는 자가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하필 다친 다리가 오른쪽 다리라서 운전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불러 그대로 큰 병원으로 이동했다. 두 발을 사용하여 이동하던 것에 비해서 목발로 이동하는 지금의 모든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지이이잉]


민귀남 파트장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갑자기 어디 갔어? 전기 들어와서 지금 다들 장비 정상화하느라 죽어나는데…. 권준현이도 지금 야간이라서 중간 관리자도 없고 난리다 지금.”


그는 다짜고짜 내게 말했다. 비상 상황에 평소 성격이 좋던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난 사정을 얘기하고 반차 휴가 사용을 부탁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투로 한숨을 쉬며 빨리 회복하고 출근하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야속했다.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는 사이 병원에 도착했다. 시에서는 제법 대형 병원에 속하는 성모병원이다. 의사는 다시 엑스레이 촬영을 요청했고 촬영 결과를 보며 진단을 했다.


“철수씨, 골절은 맞고요. 지금 골절 수준이 심각한 건 아닌데 이게 자연스럽게 붙지 않으면 수술을 검토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수술로 가게 되면 쉽지는 않겠네요. 위치가 발목 뒷부분에서도 복사뼈 아시죠? 복사뼈. 그러니깐 우리가 흔하게 복숭아뼈라고 부르는 그곳이요. 그 안쪽에서도 사각지대라서 난도가 있을 것 같아요. 우선 반깁스 풀고 통깁스를 한 뒤에 입원해서 눕거나 휠체어로 생활을 하시고 하루하루 경과를 보면서 뼈가 자연히 붙게 될지 주기적으로 시간을 갖고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대기시간은 한세월이더니 입원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와중에도 회사가 걱정되는 내 모습이 싫었다. 회사보다는 내 몸을 우선으로 챙겨줘야 하는데 회사를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잡혀있었다. 병실은 6인실이다. 갑작스러운 입원이었기에 여러 가지로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월요일부터 회사 출근이 어렵게 되었기에 민귀남 파트장에게 다시 문자를 보내두었다. 야속하게도 민 파트장은 문자에 답장하며 내 회복에 대한 걱정보다는 업무의 마비를 더 걱정했다. 근태 처리를 위해서 회사의 서무에게도 전화했다.


“네, 혹시 산재 처리하실 건가요?”


“네? 산재가 가능한가요?”


“그게 일단은 회사에서 다치신 거라. 산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그러면 산재로 한번 알아봐 주세요.”


산재는 산업재해의 준말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회사에서 관련 업무 중 부상하거나 질병에 걸린 것을 의미한다. 하나씩 따지면 애매하지만, 산재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산재라고 하기엔 회사에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어서 회사에 복귀해서 유관부서와 전후 사정을 사실대로 얘기하고 병가 처리를 받는 것으로 잘 협의해 볼 요량이다.


입원 후 삼일 뒤 회사 번호로 의심되는 금성시 지역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고철수씨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에, 안전팀 이보건 과장인데요. 저기 그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려서 병원에서 전치 3주를 받았다는 얘기죠?”


“네…. 마…. 맞아요.”


“이거…. 흠 정말 산재 처리하실 거예요? 그냥 공상 처리 안 하실래요? 대수롭지 않은 부상인 거 같은데 이 정도로 산재 처리하기에는 회사에 너무 손해인데…. 회사 계속 다니실 거죠? 웬만하면 공상 처리하시죠?”


공상 처리는 쉽게 말해서 적당하게 합의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산재 은폐를 위한 협박이다. 안전팀에서 하자고 하는 방향으로 잘 협의해 볼 요량이었지만 이런 식의 협박은 나를 화나게 했다. 웬만하면 공상 처리로 협의하고자 했으나 그 협의를 이런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직원들이 실제 업무 중 상처를 입었었어도 이런 식으로 협의해 왔다는 얘기다. 그들은 개인을 위한 복지보다는 기업의 손실을 우선 생각했다. 단, 내가 조합의 일원이었다면 어떨까. 물론 조합원은 이런 경우 무조건 산재 처리한다. 이런 식의 대응이 걸리면 조합에서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무직은 힘이 없다. 그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알고 직군별로 다르게 대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기분 나쁜 일이다.


“원래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나요?”


내가 좀 심기가 불편한 말투로 되물었다.


“에? 아. 아 그거는 아니고요. 뭐…. 지금 급한 건 아니니…. 회사에 복귀하시면 얘기합시다.”


[뚝]


그는 급하게 전화를 종료했다. 뭔가 찔리긴 하는 모양이다. 어느새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사무실에서는 언제 출근하냐고 닦달이다. 근데 이러고 출근을 하는 것도 일이다. 병원 생활이 답답했지만, 생각보다 긴 병원 생활은 내게 달콤한 휴식이 되었다. 그동안 읽지 못한 소설책도 읽고, 노트북에 모아둔 영화, 드라마도 싹 정주행 했다. 그렇게 2주가 흘러갔다.


“흠…. 2주간 본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안정을 취하면 뼈가 붙겠네요. 위험하게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오…. 다행이네요. 선생님.”


“그래도 통깁스로 목발 생활은 한 달은 해야 해요. 한 달 뒤에 다시 와서 봅시다.”


수술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출근은 조금 걱정되었다. 민귀남 파트장에게 통깁스 상태로 목발을 잡고 출근해도 될지 연락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도 좋을 텐데 그저 일찍 출근하라고 압박만 하는 민 파트장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2주간 회사를 안 갔어도 여전히 출근은 하기 싫다. 그래도 통깁스의 다리를 이끌고 출근길에 나섰다. 지방엔 주말에 눈이 많이 온 관계로 오랜만의 출근길은 하필이면 빙판길이다.


“철수 왔냐? 달호야 보다시피 상태가 이러하니 당분간 라인에 가서 해야 할 일은 너가 다 해주고 철수는 사무실에서 전산 처리할 것 위주로 해주길 바래.”


민귀남 파트장은 생각했던 대로 바로 업무분장을 해주었다. 파트장의 역할이기에 뭐라고 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내 회복을 걱정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섭섭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K2 조립지옥 맞죠? 안전팀에서 왔습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민귀남 파트장이 물었다.


“고철수 사원 만나러 왔어요.”


“아, 오늘 출근했어요. 자리는 저기입니다.”


“네 저 친구랑 회의실 잡고 따로 얘기 좀 할게요."


“에…. 네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그가 내게로 왔다. 안전팀 김보건. 병실에서 짧은 전화 통화로 대화를 나눴다. 그의 쉰 목소리는 잊기 힘들었다. 외모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이목구비가 크다. 피부는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으로 그을려있다. 170 정도로 보이는 작은 키에 중량 운동을 주로 하는지 온몸이 근육질이다.


“안녕하세요. 고철수씨 맞으시죠? 저는 안전팀 김보건이에요. 일전에 전화 통화했었죠.”


“네 맞아요.”


“저희 그때 하던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왔어요. 일단은 다리에 정말 깁스는 하셨네요.”


만나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거짓으로 보험을 받기 위해 연기를 하는 나이롱환자 취급을 받는 기분이다.


“우선, 이 양식서를 작성하시죠.”


그는 내게 어떤 서식지를 건네주었다.


“원래 공상 처리든 산재 처리든 절차라는 게 있어요. 여기…. 여기…. 성함 쓰고 밑에 상황 설명에 대해서 서술식으로 작성하면 되고요. 사인하면 됩니다.”


“이거 공문서가 아닌 거 같은데….”


“아…. 이거는 일단 회사에서 관리하는 문서라고 보면 됩니다.”


산재 처리건 공상 처리건 공문서는 아마도 회사에서 작성할 것이다. 이런 식의 문서 몇 장으로 위임을 받고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그게 기업이다. 구타, 폭행과 같은 가혹행위가 없어서 그렇지 5공 시절 또는 안기부가 활개 치던 시절 이런 식의 행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라인에서 나와서 사무실에 가던 중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발목을 접질렸다?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맞나요? 같이 있던 사람은 없었어요?”


그는 내게 계속 추궁하듯 캐물었다.


“네…. 혼자 걷다가 그렇게 되었어요.”


“네, 뭐, 일단 알겠습니다.”


“공상 처리로 해주세요.”


“네? 그래요? 이번 사고에 대해 공상 처리로 하자는 말이죠?”


그는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면 여기 문서에 다시 하나만 더 해주시고….”


그는 반갑다는 듯이 추가 문서를 꺼내면서 물었다.


“네 그렇게 하시죠.”


갑자기 현실을 자각하면서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냥 순순히 원하는 방향으로 하고 싶었다. 개인은 절대로 기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상황에서 찍혀봐야 앞으로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다시는 힘을 낭비하기 싫었다.


“오…. 좋네요. 고철수님. 그러면 그렇게 처리하고 필요하면 다시 연락할게요. 그럼 수고하시고….”


그는 볼일을 끝내자 미소를 지으며 급하게 일어났다.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말투와 표정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호칭도 고철수씨에서 고철수님으로 바뀌었다.

이전 05화 일이 쉬우면 사람이 힘들고 사람이 좋으면 일이 힘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