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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Jul 27. 2024

일이 쉬우면 사람이 힘들고 사람이 좋으면 일이 힘들다.

조삼모사 하루살이 인생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팀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날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 자리를 정리했다. PC를 들고 다른 팀으로 이동하는 첫 경험은 그 기분이 묘하다. 잘 풀려서 자리를 정리하면 좋은 것일 텐데 대부분 강제로 이동되거나 정리해고를 통보받고 임시적인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정리한다. 정리하는 자들의 얼굴은 보통 밝지는 않다. 긴장하는 표정, 억울한 표정, 걱정하는 표정, 이렇게 보통은 어두운 표정이다. 하지만 난 무표정을 하고 있다. 어떤 표정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라미정과 연민호는 그래도 후배라고 짐 옮기는 일을 도와주었다. 사무실을 걸어 나오며 마주친 변기린과 김선호의 싸늘한 눈빛과 쓴웃음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도착한 K2 공장의 조립 지옥 팀 사무실은 어쩐지 허전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별로 없었다기보다는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미 완성된 K1 공장과는 다르게 K2 공장은 인제야 장비가 들어오고 있다. 그에 맞춰서 사람도 뒤늦게 충원되는 중이다. 지금은 한산한 가운데 공조 소리만 맴돌지만, 조만간 K1 공장처럼 여기저기 욕설이 오고 가며 소란할 것이 뻔하다.


“안녕하세요. K1 특수조립 지옥 팀에서 온 고철수입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했다.

“왔어요? 그래요. 난 민귀남 파트장이라고 해요. 여기 자리 만들었고 앞으로 잘해봅시다.”  

새로운 파트장과 제일 먼저 인사를 주고받았다. 새로운 파트장의 이름은 민귀남 파트장으로 이름이 예스럽고 특이하다. 그에 비해서 얼굴은 젊어 보인다. 30대 중반 또는 후반쯤으로 보인다. 키는 170이 될까 한 작은 키에 둥근 얼굴과 둥근 신체를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순한 곰 상이다. 그리즐리 베어와 같이 규모가 있는 곰은 아니고 곰돌이 푸의 꿀통을 들고 있는 아기곰의 이미지다. 맨손으로 꿀단지의 꿀을 퍼먹을 것 같고 성격도 온순할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이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도 퉁퉁해서 곰 발바닥 또는 족발을 연상시킨다.


“장 파트장에게 듣기로 나랑 동향이라고 들었는데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고?”

“저 금천 고등학교 나왔습니다.”

“어? 내 후배네. 크크.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를 툭 쳐주었다. 생각보다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멈칫하고 주춤거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달호야, 여기 새로운 친구 좀 챙겨줘. 저기 팀장님 오시면 인사도 시켜드리고.”

“네. 앗? 형, 형이 여기로 왔어요?”  

저 멀리서 반가운 얼굴이 걸어왔다. 진달호는 잊고 지내던 동기다. 정확히 알 동기는 아니다. 내가 입사하고 한 달 뒤에 특채로 들어온 동기다. 한 달 정도의 차이라서 동기라고 생각한다. 170대 후반의 작지 않은 키에 비율이 좋지만 착 가라앉은 상고머리와 두꺼운 알의 금테 안경이 그를 안경 쓴 샌님처럼 보이게 만든다. 우린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진달호는 K2 공장의 운영을 위해서 특채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그 뒤 생산부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하며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 어 맞아 달호야 너가 여기 있었구나? 너무 반갑네.”  

난 어색하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곧이어서 진달호는 여러 선배를 소개해 줬다. 위로는 선배가 두 명 있었고, 아래로는 진달호를 포함한 후배가 두 명 있었다. 선배 한 명은 권준현 대리로 영화배우처럼 잘 생겼다. 180의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목소리도 좋은 쾌남의 이미지다. 다른 선배는 나영석 대리로 일 잘하는 시골 농부와 같은 생김새다. 170 중반의 키에 이목구비에는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차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의 후배인 박서방 사원은 지금 야간근무 중이다. 이렇게 두 명의 대리와 두 명의 사원이 있었다.


“너 전에 어디서 봤었는데 기숙사 식당 앞에서 봤었어. 너 변규선 후배 맞지?”  

권준현 대리가 얘기했다.

“너 그 녀석 후배였어? 고생 좀 했겠는데? 걔 완전 또라이잖아.”  

나영석 대리가 얘기했다.

“맞아. 걔 또라이야 또라이 쌩 또라이. 고생 많았어 여기서 형들이랑 잘 지내자.”  

권준현 대리가 얘기했다. 그 둘은 정말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직원이 정말 많은 회사인데 둘 다 변규선 대리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니 전의 팀 사람에 대한 험담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저 둘은 일부러 나를 떠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고단수의 능구렁이들이다.

“팀장님 오셨다. 달호야, 철수 데리고 가서 인사드려.”  

새로운 팀장님 이름은 강건함 팀장이다. 줄여서 강 팀장이라고 부르고 뒤에서 팀원들끼리는 건이형이라고 부른다.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파트장이 40대, 팀장이 50대가 훌쩍 넘은 이전 조직에 비하면 젊은 리더들이다. 강건함 팀장의 외모는 매우 날카롭다. 180 가까이 되는 큰 키에 마른 몸매를 가졌다.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매에 각진 옛날 안경을 써서 더욱 날카로움이 강조되어 보인다. 높은 콧날과 얇은 입술은 그를 더 매섭게 만들어주고 있다.

“팀장님. K1 특수조립 팀에서 온 철수 사원입니다.”

“그래, 장석구가 얘기한 친구가 너구나? 그래, 앞으로 여기서 잘 지내보자.”  

팀장은 굵고 짧게 말하고 급하게 본인 모니터를 보며 메일을 확인했다.


K2 공장의 일반 조립지옥은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장비 파트와 공정 파트가 있는데 공정 파트가 다시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다. 완조립 파트와 반조립 파트다. 조립의 상태에 따라 분류가 되었다. 다른 지옥도 그런 식으로 파트를 세분화한다. 내가 속한 파트가 반조립이다. 이전 팀에서 맡았던 특수조립이 완조립이라서 완조립이 익숙한데, 이 팀으로 와보니 반조립 파트에 사람이 부족해서 반조립 파트로 배치되어 버렸다. 나의 경력과 의지에 상관없이 반조립을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한다. 다시 배울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지만, 권준현 대리, 나영석 대리는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자상하게 일을 알려줬다. 일을 이렇게 편하게 배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액과외를 받듯이 일을 배웠다. 지난 1년간 온갖 인격모독을 당하며 일을 배우던 시절을 떠올리면 낯부끄러울 정도로 친절한 과외수업을 받고 있다. 후배로 있는 진달호와 박서방 또한 성향이 매우 온순했다. 대리 두 명에게 일을 배우고 애매한 실무는 후배들에게 물어가며 생각보다 빠르게 업무에 적응했다. 또 한 가지 새 팀의 적응이 힘들지 않았던 이유로는 반조립 파트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점심을 먹고는 꼭 차 마시는 시간을 함께 가졌다. 언제나 두 명의 대리 선배들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철수, 너 프로야구 어디 응원하냐?”  

권준현 대리가 커피를 마시며 질문했다.

”아, 제가 프로야구를 자주 챙겨 보진 못하지만 저는 금천사람이라서 예전 돌핀스부터 해서 랜더스. 쭉 이렇게 팬이에요.”  

오랜만의 관심이 너무 좋아서 좀 길게 대답했다.

“이야, 철수 너 야구에 관심은 좀 있구나? 근데 야구는 자이언츠. 내년에는 가을야구 한다.”  

권준현 대리가 말했다.

“그래 맞아. 암, 남자는 자이언츠지.”  

나영석 대리도 맞장구를 쳤다. 권준현 대리는 부산 사람이라서 이해가 되었지만, 나영석 대리는 서울 사람인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래도 실력은 라이온스죠.”  

진달호 사원이 이에 질세라 얘기했다. 진달호 사원은 구미 사람이라서 가까운 대구를 연고로 하는 라이온스 팬이다.

“다들 뭘 모르시네! 야구는 신바람 야구, 트윈스 아니야?? 거기 여성 팬들이 얼마나 이쁜데. 참고로 지금 야간 중인 박서방도 트윈스 팬이다.”  

민귀남 파트장이 말했다. 평소에 진지하시면서도 장난기가 있는 파트장이다.

“에이, 언제 적 얘기를 하세요.”  

우리는 웃으며 말했다. 회사에서 후배가 선배들과 이렇게 사적인 질문 답변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좋은 선배들과 후배들 그리고 동기에 가까운 진달호를 만난 덕분에 난 빠르게 새로운 팀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난 한동안 특유의 노예근성으로 새로운 업무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업무에 임했다. K2 공장이 신규 공장이긴 해도 아직 장비가 들어오는 과정에 있기에 일이 아주 많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선배 중의 한 명인 나영석 대리가 퇴사를 선언했다. 그는 동종 업계인 화성전자 경력직에 합격해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좋지만,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직무로 변경하기 위해서 이동을 결심했다. 사실 여기 K2에 오기 전 K0에 있던 시절부터 일머리가 꽤 좋기로 유명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생산부를 탈출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화성전자로 옮기면서 그가 일하게 될 부서가 공장 자동화 관련 부서라서 배울 점도 많고 향후 기대가 되는 부서였다. 현재 생산부에서 공정 조건이나 고치는 일보다는 당연히 나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렇게 가까운 주변 사람이 퇴사하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어 신기했지만 어쨌든 축하해야 할 일이다.

“형 정말 축하드려요. 그래서 저에게 그동안 많은 업무 기술을 알려주셨군요.”  

축하하며 답했다.

“축하는 할 일인데 앞으로 장비도 많이 들어와서 점점 바빠질 것 같아 걱정이네. 철수가 왔다고는 해도 영석이가 빠지는 건 큰일이네.”  

민귀남 파트장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얘기했다.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대기업이 사람 한 명 빠진다고 안 돌아가나요. 영석이 가기 전에 식사나 한번 하시죠.”  

권준현 대리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얘기했다. 민귀남 파트장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다. 그에 비해 권준현 대리는 셋업 공장은 원래 인력이 빠지고 충원되고 하면서 안정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민귀남 파트장은 이제 곧 K2 공장의 장비가 절반 이상 반입되면서 일이 많아지고 이렇게 속 편하게 이야기할 여유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강팀장의 낯빛이 최근에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고 한다. 사실 민귀남 파트장은 매사에 걱정 근심이 많은 편이다. 원래가 그런 성격이다. 일이 별로 없을 때는 한없이 평안한 사람이다. 그냥 곰돌이 푸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일이 생기면 피글렛 같은 사람이 된다. 떨어진 낙엽이라도 밟고 미끄러질까 봐 걱정하며 걷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권준현 대리는 낙천적이다. 이렇게 세상과 인생을 즐겁게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름의 걱정은 있겠지만 내색은 안 한다.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고 나영석 대리는 예정대로 퇴사했다.

“얘들아, 우리 팀에 새로운 친구가 한 명 온단다. 과장이래. 이름은 김민수 과장. 부천공장에서 내려온다고 하네.”  

민귀남 파트장이 얘기했다.

“오 그래요? 과장이면 나보다 직급이 높네 노친네는 아니죠? 우리는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실무자가 필요한데”  

권준현 대리가 말했다.

“뭐라고? 그럼 나도 노친네냐?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이놈아. 크크. 그리고 너보다 아마도 두세 살은 어려. 너 놀고 있는 동안 특진한 것으로 알고 있어.”  

민귀남 파트장이 권준현 대리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답했다.

“제가 언제 놀았다고 그래요. 아무튼 그럼 나보다 동생이네. 민수야라고 불러야겠네. 크크. 얘들아 나이가 깡패야 알았어? 크크.”  

권준현 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조직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어떤 조직은 서열이 깡패다. 내가 처음에 있던 조직이 그랬다. 또 어떤 조직은 나이가 깡패다. 지금 조직이 그렇다. 이윽고 새로운 인원으로 김민수 과장이 왔다. 김민수 과장은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려대 안암캠퍼스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좋은 학벌에 속했다. 사실 생산부는 고학력자가 올 필요가 없다. 애초에 대졸자가 올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오래전에 금성전자에서 배터리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 고졸 공채 출신이 업무를 했다. 서서히 학력 인플레가 발생하면서 대졸자 공채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A 직군, B 직군, C 직군 등이 생겼다. 생산부의 단순한 업무는 거의 그대로지만 대졸 공채 출신이 현장의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학력자들은 대부분 좋은 직군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인플레가 점점 심해지면서 고학력자들이 생산부로 배치받기 시작했다. 금성전자뿐만이 아니라 배터리 회사에는 알게 모르게 점점 가방끈이 긴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고대생 김민수 과장의 외모는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외모다. 170 후반의 키에 멸치같이 깡마른 체구다. 얼굴은 단정한 직모의 짧은 상고머리에 순한 모습이다. 성격은 지독하게 숫기가 없는 사람이다.

“이여, 환영한다. 김민수 과장. 난 여기 권준현이라고 해. 얼굴 보니 우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전에 한번 같이 교육받지 않았어?”  

권준현 대리가 적극 인사를 하면서 악수를 하자는 의미로 김민수 과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 아. 네 형님 예전에 뵌 것 같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김민수 과장은 가볍게 눈인사만 하며 답했다.

“그래? 잘 지내보자. 저기 우리 커피나 한잔하자.”  

권준현 대리는 무안한 손을 바지 주머니로 넣으며 말했다.

“저 지금 PC 설치하고 메일 좀 확인해야 해서요. 먼저들 하세요.”  

김민수 과장은 그렇게 얘기하고 자리로 가서 상자에 가져온 PC를 자리에 설치했다.

“아하, 저 친구 고단수야 고단수. 상대하기 어렵겠는걸? 크크.”  

권준현 대리도 그렇게 말하고 그냥 본인 자리로 갔다. K2 공장 조립 지옥 팀은 권준현 대리의 성향이 묻어있어서 모두 형 동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호칭을 하니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지고 좋았다. 과장해서 얘기하면 대학교에서 형, 동생과 일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팀장, 파트장님은 예외의 대상이었다. K2 공장은 K1 공장과 서로 다른 공장이긴 해도 맡은 직무가 조립 지옥의 공정 엔지니어라서 K1 공장의 특수 조립지옥에서의 직무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완조립 파트와 반조립 파트의 업무도 결국에는 공정 조건을 조정해서 배터리 조립을 잘해야 한다는 최종 목적은 같았다. 다시 말해 큰 틀에서의 다른 점이 없었다는 얘기다. 단, 특수 조립지옥이라는 곳에서 특수라는 글자가 빠지는 순간 업무량의 수준이 달라진다.


특수 : 어떤 종류 전체에 걸치지 아니하고 부분에 한정됨. 또는 그런 것 -  표준국어 대사전


특수는 정말 일부였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일반상대성이론과 같다. 일반상대성이론이 폭넓고 어려운 이론이 되었듯이 일반 조립지옥의 업무 난도가 높긴 높았다. 조립지옥 팀의 업무량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K1 공장의 일반 조립지옥 팀의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다. K2 공장의 장비가 절반 이상으로 채워진 순간 이미 업무량은 조립지옥 팀 수준 또는 때때로 그 이상으로 가고 있었다. K1 공장 조립지옥 팀은 인원이 반조립 파트 공정 실무자만 10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K2 공장 조립지옥 팀 인원은 4명의 실무자가 업무를 하고 있다.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딱 맞는 상태이다. 하지만 현실은 산술과 같지 않다. 현실은 적은 장비에 적은 인원이 더 힘들다. 게다가 K2 공장에는 공석이었던 본부장 자리에 새로운 본부장이 왔다. K1 본부장에는 부동의 전두광 본부장이 있다. K2 본부장은 공석이기에 전 본부장이 겸업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K1에 집중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K2 생산부의 본부장으로 새로 오는 노태성 본부장이라는 사람은 악명 높은 사람이다. 유리지옥 공정 엔지니어 출신으로 키는 작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사소한 일에 불호령을 내린다. 그의 임원 발령 소식에 우리 팀장인 강건함 팀장도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고 있다.

“이거 이거 눈높이표 요즘 잘 맞추는 거 맞나? 이거 봐봐요. 이물질도 조금씩 들리는데. 장비 쪽 확인하고, 이제 장비 계속 들어올 낀데, 기존 장비가 이렇게 흔들리면 되겠나 싶네. 생산 쪽 확인해서 생산 물량 대비 우리 쪽 장비 대응력에 문제없는지도 검토해 봐요. 아침 회의 시간에 봅시다.”  

강건함 팀장이 몹시 예민한 말투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저.. 저기 언제까지 해야 하죠?”  

민귀남 파트장 역시 근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납기 없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얘기예요."  

강건함 팀장이 대답했다. 지금 시간이 금요일 오후 다섯 시. 고향 집이 부산인 권준현 대리는 이미 퇴근을 위해 짐을 싸고 있었고, 김민수 과장 역시 업무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저기 얘들아, 잠깐 모여서 얘기 좀 하자.”  

민귀남 파트장이 미안한 말투로 우리 자리 근처로 오면서 얘기했다.

“에? 저 슬슬 들어가려고 하는데? 기차 예약해 놔서 기차 타야 해요.”  

권준현 대리가 대답하기 귀찮은 말투로 얘기했다.

“야 그거 빨리 취소해. 너 없으면 안 돼. 같이 얘기해야 해.”  

민귀남 파트장이 권준현 대리의 어깨 안마를 해주며 얘기했다. 모두 힘없는 대답을 하며 회의실로 따라갔다. 퇴근 무렵의 회의는 사실 배터리 업계에서 흔한 일이다. 특수 조립팀에서나 예외 상황이었다. 특수하지 않은 일반적인 모든 팀 중에 생산부 다섯 군데의 지옥 그리고 공정관리팀 그 외에 어디엔가에 존재할 수많은 유관부서는 시도 때도 없이 회의한다. 별문제가 없어도 회의를 하고 문제가 있어도 회의를 한다. 문제가 없다면 회의 시간에 문제를 만든다. 팀장, 파트장의 능력이다. 그래도 민귀남 파트장은 순한 분이라서 파트원들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회의실에서 민귀남 파트장은 한숨을 쉬며 눈높이표를 지금보다 절반으로 줄여서 조립 조건을 지금 보다 3배 더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조립하라는 말이다. 배터리 공정 중에 조립 공정을 진행하고 완성도 측정을 하면 그 결과물이 서버에 올라가서 프로그램으로 눈높이표로 열람할 수 있다. 그 눈높이표는 작은 스케일에서는 거의 일직선이지만 눈높이를 키우면 위, 아래로 흔들린다. 눈높이를 키우면 사인, 코사인 함수와 같은 그래프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최대한 가운데로 맞춰야 한다. 권준현 대리는 놀 때는 누구보다도 잘 놀지만 일을 해야 할 때는 일에 대한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다. 대신에 요령을 부린다. 난 권준현 대리에게 눈높이표 개선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우리 업무의 주요 레퍼토리가 될 것을 알게 되었다.. 눈높이표 개선은 간단하게 말해서 조작하는 것이다. K1 특수조립팀에서 이미 한 번은 해봤다. 그 당시 생산팀 사람들에게 걸릴 뻔했지만, 결론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미리 조립을 잘해둔 제품과 조립이 불량한 제품을 바꿔치기해서 다시 측정한다. 조삼모사이면서 눈속임이다. 하루살이 인생으로는 어쩔 방법이 없다. 의아했던 점은 나중에 품질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눈높이를 키워서 수많은 직원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


물론 정석으로 하면 어려운 방법도 있다. 조립 조건을 조건 별로 실험하고 흔들어서 조립 시간을 단축하거나 품질을 높일 수도 있다. 장비를 개조해도 된다. 대신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수 있다. 실험도 해야 하고 한 번의 실험을 위해 생산팀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일반조립팀은 특수조립팀에 비해서 이런 단순한 업무량이 상당했다. 특수조립지옥은 사람들이 괴상해서 그렇지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반지옥은 일이 힘들었다. 이렇게 조삼모사 하루살이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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