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주말 오후, 도서관에서 열린 미술 특강에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터라 큰 기대 없이 찾아간 자리였지만,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강사 이창용 도슨트의 목소리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고 이선균 배우를 연상케 하는 그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은 2시간 내내 청중을 고흐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훈남의 외모에 유럽 미술관에서 10년간 도슨트로 활동했다는 이력, 그리고 수많은 방송 출연 경험이 빚어낸 능숙한 화술. 그는 빈센트 반 고흐를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 혹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강연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재 화가 고흐’라는 통념을 뒤집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흐가 화가로 활동한 시간은 고작 9년. 그 짧은 기간 동안 유화 900점, 스케치 1,100점, 총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70년간 2,400점을 그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모네와 비교하면, 고흐는 1년에 100점씩 그린 셈이다. 만약 그에게 70년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7,000점을 남겼을 것이라는 강사의 계산은 고흐가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성공을 갈망하며 살았던 사람’임을 깨닫게 했다. 미술사에서 천재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강사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흐의 불행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죽은 첫째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하필 형이 죽은 날과 고흐가 태어난 날이 같았다. 매년 생일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가정묘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지켜봐야 했던 어린 소년. 그 정서적 상처가 평생 그를 따라다닌 우울증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강사는 이것이 고흐의 불행한 인생과 평생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던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고흐는 16살에 구필화랑에 취직해 7년간 일했지만, 예술작품에 가격표를 붙여 파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그는 화상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자 했으나 신학대학에 3년 연속 낙방했다. 차선책으로 전도사가 되어 벨기에 탄광촌에서 광부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지나친 열정이 오히려 담임 목사의 부담이 되어 1년 만에 쫓겨났다. 자기 음식과 침대를 내어주고, 옷을 찢어 올리브에 담가 화상 입은 광부들을 치료하던 전도사 고흐. 그의 헌신은 담임 목사의 질투를 샀고, 재계약 거부로 이어졌다. 28살,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동생 테오가 제안했다. “형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보는 게 어때?” 이 한마디가 두 형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고흐는 단 한 번도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28살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불안했다. 동생에게 매달 생활비를 얻어 쓰는 입장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미술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시간이 없었던 그는 거장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며 스스로 그림을 익혔다. 스승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혼자 이루어낸 화가. 4년간 플랑드르 지역을 오가며 그린 끝에 탄생한 ‘감자 먹는 사람들’은 2년에 걸쳐 습작만 55점을 그린 끝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탄광촌 전도사 시절 곁에서 지켜본 하루하루 힘든 노동을 이어가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드디어 그림다운 그림을 하나 그리게 된 것 같아. 나도 이제 어디 가서 당당하게 화가라고 이야기를 해도 될 만한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만 같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기념품샵에서 이 작품을 포장지로 감싼 감자칩을 판다는 강사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지만, 그 이면에는 성공을 향한 고흐의 처절한 노력이 담겨 있었다.
1886년 파리로 상경한 고흐는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당대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급격히 성장했다. 2년 만에 플랑드르에서 4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느낀 그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프랑스 남부 아를로 향했다. 7월의 아를은 라벤더와 해바라기가 만개한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는 ‘노란 집’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동료 화가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지만, 시골이라는 이유와 고흐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15일 만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우울증이 찾아왔고, 동생 테오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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