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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26. 2023

추억 발굴 일지

A Memory-Finding Journal

책장의 한 구석에 삭아서 한 장 한 장 조심히 넘겨야 하는 일기장을 발굴했다. 이곳은 나의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과 성인이 된 지금까지의 기록이 있는 곳. 계속 고여만 있어서 묵은 때가 생겼고 흘러가지 못해 고였다. 맑은 날도 있었고, 흐린 날도 있었고, 비가 오는 날도 있었다. 흑연만 사용한 그림일기는 단조로웠다. 해독하는 재미가 있었다. 촌스러운 보라색 잉크로 찍힌 '검' 도장 말고는 색이 바래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페이지도 있었다. 글자 하나에 오롯이 정사각형 하나를 주다가 직사각형 하나에 문장 하나를 주게 될 무렵, 그리고 그 문장을 연필이 아닌 샤프를 쓰게 되면서 일기장은 다이어리가 되었다.


크기도 다양하고, 재질도 다양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그려진 다이어리거나, 커피를 꾸준히 마시면 크리스마스에 교환해 주는 어느 카페의 다이어리이기도 했다. 내용은 주로 듬성듬성 비어 있었지만 대체로 새해 첫날부터 학기 초까지와 시험기간만큼은 빼곡했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서 어디를 갔고, 뭘 먹었고 어땠는지 감상이 적혀 있었으며, 알록달록한 색볼펜으로 잔뜩 꾸며져 있었다. 영화티켓을 조잡한 스티커로 꾸며서 붙이기도 했고, 도장으로 글자 하나씩 조합해 찍어서 수평이 안 맞는 monday와 friday, sunny, rainy 같은 것도 있었다.

햇수가 지날수록 다이어리에는 검정, 빨강, 파란색만 남았고, 그 마저도 모의고사 날, 시험일, 수능까지 남은 일수, 학원 스케줄 등만 기록된 스케줄러가 되었다. 언젠가의 먼슬리와 위클리 사이의 공백에는 그의 취향과 입맛, 습관부터 소소한 버릇까지 적힌 관찰일지 같은 게 있었다. 그가 준 건가 싶은 초콜릿 포장지 같은 것도 붙어 있었다. 지독하게도 짝사랑을 앓았구나. 이걸 낭만이라고 부르나, 집착이라 정의해야 하나?


열여덟 살의 나는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이에서 성장통을 앓으며 제법 힘든 날들을 보내서, 다이어리의 가장 뒷장에는 10년 뒤의 막연하게 성공했을 나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나이를 먹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났을 거라고 믿었다. 나이를 먹는 게 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나는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디즈니랜드도 갔고, 걱정과는 달리 살아 있으며, 사람을 싫어하지만 또한 사람을 사랑해.라고 답장을 써주고 싶었다. 그러나 네 생각처럼 빨간 비틀을 몰거나, 가정을 이루진 않았다는 말과 만나기를 고대했던 어떤 아이돌은 사고를 쳐서 뿔뿔이 흩어졌고 아무도 추억하지 못한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고.


종이 다이어리의 계보는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이어갔다. 그 계보가 끊긴 것은 알록달록한 색볼펜에 대한 집착이 디지털 문명에 대한 소유욕으로 바뀐 시점이었다. RGB 기반이 모든 색을 쓸 수 있는 전자펜이 있음에도 여전히 검정, 빨강, 파랑만 사용하면서. 거실에 있는 공용 컴퓨터가 아니라 오롯이 나만 쓸 수 있는 랩탑을 갖게 된 후로, 있으나 마나 한 자물쇠로 잠그고 풀어쓰는 일기는 지문으로만 열고 닫을 수 있는 일기장으로 바뀌었다. 그 마저도 감상을 적어내던 다이어리는 조금 더 단조로워졌고, 이제는 중요한 일정만 알리는 알람만이 남았다.


어느 일기의 구석에서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소설을 찾았다.

나는 첫 만남에 계속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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