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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Mar 30. 2018

그렇게 런던은 내게 첫사랑처럼 일렁이었다

의도치 않은 오래된 여행


-의도치 않은 오래된 여행-

그렇게 런던은 내게 첫사랑처럼 일렁이었다







문득 꿈을 꾸다 온 것 같아. 책상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는데 아주 달고 진한 꿈을 꾼 것처럼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날의 꿈은 거리에 울려 퍼진 기타 연주도, 방금 구운 피자 냄새도 모든 것이 생생했어. 잘 입지도 않는 꽃 패턴 원피스를 꺼낸 걸 보니 무척이나 신이 났나 봐. 아마도 오래도록 깨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나 드디어 런던에 왔어!"


아이슬란드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그곳은 이름만 들어도 몽글몽글해지는 런던이다. 게트윅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반.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런던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화물로 맡긴 배낭을 찾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공항과 연결되는 열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런던브릿지역으로 가야만 한다.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기차역을 붐비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한 안내방송이 벌써부터 나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런던이 내게 준 숙제가 시작된 것이다. 흑인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표를 끊고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지는 배낭과 함께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려야 할 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느 때보다 귀를 쫑긋 세웠고, 새벽 이동으로 피곤함을 잊은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우와... 여기가 런던이구나. 진짜 유럽 같아. 어쩜 좋아, 벌써 로맨틱하잖아"


첫 혼자 여행과 동시에 유럽도 난생처음이었던 나는, 아이슬란드와는 사뭇 다른 느낌에 한껏 들떴다. 벌써부터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며 런던에 있는 내내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욕심도 품어보았다. 떠나기 전 '영국' 하면 떠올렸던 거리들과 기억 속 퍼즐을 맞춰보면서.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런던은 신호등마저 예쁘네. 영국 남자들은 전부 젠틀하겠지? 어, 저기! 길고양이들 좀 봐!"


아마도 벌써 이 나라에 빠진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충분히 그래도 되는 거야.






이동으로 지친 탓에 숙소에서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려 했으나, 런던과 그날의 날씨는 나의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하게 했다. 썸머타임제가 시작되어 해는 충분히 길었고, 런던브릿지와 타워브릿지는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런던과 어울리는 화이트 원피스로 갈아입고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그리고 런던브릿지 위에서 바라보는 타워브릿지와 내 마음처럼 일렁이는 템즈강, 곧 핑크빛 노을을 머금게 될 하늘에 흠뻑 취해 있었다.

첫 만남부터 나를 깊은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곳은 런던이었다.





보고 있어도 더 담고 싶은 타워브릿지와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 그 아래 오후 일곱 시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런던이 내게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도착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니 한 순간이라도 더 담기 위해 애를 썼다. 행복하게도, 이 아름다운 순간 앞에 나는 홀로 서있다.





말없이 이어폰을 더 깊게 눌렀다. 타이밍에 맞춰 흘러나오는 잔잔한 인디음악과 오늘 입은 화이트 원피스와 어울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이 시간을 더 달콤하게 만들었다. 언덕에 걸터앉은 채 순간의 달콤함에 더욱더 스며들었다. 여유와 무료함의 경계선에서 런던에서의 첫 번째 밤을 숨죽여 기다렸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태함과 낯선 곳이 가져다주는 적당한 무게, 그리 무겁지 않은 공기로 나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집중했다.





핑크빛 노을로 물들이기 아쉽게 런던의 밤이 찾아왔다. 설명이 필요치 않았던 밤과 홀로의 외로움을 가득 안고서.

그렇게 내면의 적막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이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부여잡아보겠다.


내일의 런던을 고대하며, 오늘 밤은 여느때보다 긴 꿈을 꿨으면 좋겠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을 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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