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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Jun 16. 2018

흘러가는 시간 위에 색을 입히는 사람들

쿠바에서, 영영 시들지 않는 꽃처럼



-흘러가는 시간 위에 색을 입히는 사람들-

쿠바에서, 영영 시들지 않는 꽃처럼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로 등재된 쿠바의 시골마을 트리니다드


Hola, trinidad!


하바나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쿠바의 작은 시골마을 트리니다드.

한 달 남미 여행과 그중 쿠바를 열흘씩이나 계획했던 목적은 그곳에 있었다.

쿠바를 선택한 이들은 비록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같은 이유일 것이라 믿는다.





갓 구운 빵 냄새, 낡은 철 자전거의 체인 소리, 골목을 누비며 샌드위치를 파는 수더분한 아저씨의 목소리로 트리니다드의 아침이 밝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차메로 아저씨네 까사에 머물기로 했다. 버터를 얇게 바른 바게트와 심심한 구아바주스를 먹은 후 마요르 광장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화미함과 꾸밈없음 분주함과 나태함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도시.

트리니다드가 보여주려는 삶은 어떤 하루일까.

구태여 붙잡지 않는 시간 위에 놓여 묵묵히 색을 입히는 것일까.

새하얀 도화지와 진한 마카펜보다 빛바랜 종이가 더 어울렸던 그곳을 나는 그토록 앓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역사박물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뷰 포인트이다.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마요르 광장을 알리는 교회와 역사박물관이 보인다. 2시에는 해를 피해 나무 그늘에서 맥주를 마셨고 노을이 드리우면 모히또를 들고 살사축제에 빠졌던 하루가 전부였다. 어렸을 적 얇은 동화책 한 권만 펼치면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았던 것처럼 그곳에서는 내가 이솝우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이어서 가까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함에 나는 그저 행복해했다.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충분한 곳. 설령 길을 잃어도 더 어여쁜 골목을 발견할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졌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골목 어귀에는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무지 이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bonita" : "예쁘다"


생존형 짧은 스페인어로 뱉은 첫마디는 "예쁘다". 주근깨마저 귀여웠던 소녀는 내가 신기한지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 귀여운 소녀와 몇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다급한 마음에 번역기를 두들겼다.

트리니다드가 내게 마지막까지 애정 가득한 도시로 남아줬던 이유는 아마 첫날부터 알리를 만나서일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순간의 감정을 뒤로 한채 또다시 걸음을 옮겨본다.






사진 찍어주겠다며 손짓하기 바빴던 마을 소녀들



그렇게 그늘 한점 없는 뜨거운 골목을 누비며 하릴없이 걷고 또 걸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빨래들은 어느새 바싹 마르고 햇볕의 따가움도 모른 채 수줍어하는 두 소녀의 얼굴을 보려니 마음이 소란해진다. 이따금씩 돌이켜보면 그동안 걸어왔던 여행 속에는 늘 '사람'이 존재했다. 무심코 지나가다 마주친 어린아이의 눈빛에 발길을 돌리거나 열차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받는 것 그리고 여행자라는 이유로 같은 길을 걸었던 동행과 헤어짐 앞에 눈물을 보였던 날까지. 사사로운 감정이 뒤엉켜 여행의 농도가 짙어질 무렵,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은 '내 사람' 이 되어있었다.



날이 좋거나 나쁘거나 아침이면 집 앞에서 마을을 살피는 사람들



깊은 사색에 빠져 채 정리하지 못한 감정을 되새기다 눈 앞의 거리에 넋을 놓고 말았다. 색은 많지만 서로의 범주에 구애받지 않으며 형형색색으로 칠하되 단조로움을 잃지 않는다. 집들이 즐비한 거리에는 쇠창살로 된 창문이 돋보였다. 사뭇 이질적으로 다가왔지만 그렇다고 차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모순의 정의를 이렇게 겸허히 받아들여도 될까. 보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곳이 그곳이었다. 쇠창살에 매달려 인사를 외치거나 틈 사이로 고개를 비집고 장난치는 꼬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5일 내내 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보며 손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순수한 얼굴 앞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기에 이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차메로 아저씨네 옥상에서 바라본 마을은 비가 와도 좋다. 어쩌면 비가 와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추적추적 내리던 가랑비는 푸석해진 마을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포장되지 않은 모래길은 비가 오니 질퍽한 진흙이 되어버렸지만 그제야 흙냄새를 숱하게 맡을 수 있으니 좋다.

차메로 아저씨네 옥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면 홀연히 시선이 머무는 그곳을 애정 한다. 동네를 살피다가 어느 때에 시선이 정리되면서 안정감을 찾을 때 비로소 여기에 오기까지의 순간을 곱씹어본다.

이유 없이 머무는 때가 있노라면 감히 이곳으로 오늘의 일기장을 빼곡히 채울 수 있겠다.







'올드카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쿠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올드카는 귀여운 장난감 같기도 하면서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비춰주고 있다.


"너무 귀여워 진짜. 올드카를 타고 하루 종일 골목을 누비면 얼마나 좋을까"


볼 때마다 카메라로 연신 찍어댔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에워싸는 분위기를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프레임.

연애는 못하면서 고개를 돌렸을 때 발견하는 낯선 거리에 자꾸 마음을 빼앗긴다거나 금세 깊은 설렘에 빠진다. 골목 사이에 질서 없는 올드카들마저 온전히 나를 위해 의도한 작품이라 여기고 싶었으니까. 이내 멍하니 그림 같은 풍경을 차근차근 보다 보면 조금 전 마셨던 맥주 취기가 코끝을 스친다.

꼭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다. 첫 만남의 감정을 눌러 담은 채 눈으로 한번 마음으로 한번 그렇게 적어도 두 번은 담아본다.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내게 처음처럼 남아달라고.






역사박물관 앞 작은 공원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라 해도 좋다
햇볕에 못이겨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음료 세잔이나 들이켰던 날




저마다 사연들이 때 묻은 색 빠진 마을에 그들만의 색채를 입혀 채워가기 바빴다. 색은 많지만 복잡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투박함을 사랑하면서 조용한 시간 안에 분주한 사람들은 뜨거운 오후를 보내는 법을 안다.

쿠바는 내게 천천히 가라고 말한다. 더 느긋하게 가끔은 뒤를 돌아보라고. 어쩌면 소중한 것은 늘 뒤에 있다고 말이다. 쿠바를 스쳐간 사람들의 마음은 왠지 다 같을 거라며 떠나온 날을 다시금 품어본다.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영영 시들지 않는 말린 꽃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를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어렴풋이 자꾸만 무언가를 두고 왔다고 되새기게 되어 '언젠가'라는 말을 껴안아야 조금은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는 곳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또 감사하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 여름을 한국보다 먼저 만났던 4월의 트리니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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