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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Jul 14. 2020

말하지 않으면 몰라

꽁하니 있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며칠 전 같이 일하는 독일인 동료 T가 상사 및 그 윗 상사에게 보낸 이메일의 제목은 

큰 불만족스러움(Große Unzufriedenheit)

이었다.


그 이메일의 내용은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내 본인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윗선에서의 올바른 해결 방안에 대한 요구였다. 직급 체계가 없는 독일이지만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대리급 정도 되는 직원이 보낸 이 항의서의 마지막에는 최고 상사에게 이 이메일을 포워딩해도 전혀 문제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당돌함과 자신감까지 뭍어 있었다.

며칠 후 열린 부서 미팅에서 부장급 되는 상사는 그를 콕 찝어 미팅 안에서 다시 한 번 그 이메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 달라는 요구를 했고 T는 또 다시 막힘 없이 동료들에게 본인의 불만족스러움을 술술 뱉어냈다. 그의 불만 표현은 징징대는 칭얼거림이 아닌 프로젝트를 잘 진행하기 위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요구였고 상사는 불쾌한 내색 없이 함께 해결책을 강구해 보자는 이야기로 미팅을 마무리했다. 다시 한 번 여기는 독일이구나를 실감하게 된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자라 초중고대 교육을 받은 후 독일에서 석사 학위를 시작했을 때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토론 문화였다.

질문 없는, 혹은 창의로운 질문들이 철저히 무시 당하는 일방 통행 주입식 교육만을 받다가 유럽에서 처음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탱탱볼 같은 토론 문화를 접했을 때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예의와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수동적인 가르침을 받아 온 아시안에게 이 토론 문화의 장벽은 더욱 더 높았다. 친한 친구건 교수님이건 내 의견을 겁먹지 않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저 매력적인 토론 능력을 가지지 못한 내가 한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독일에서 의견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반증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뚜렷한 내 의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분고분 선생님 말만 잘 들으면 우수한 학생이 될 수 있는 한국의 교육을 탓하기엔 너무 늦었기에 그제서라도 의견을 정리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나와의 외로운 토론을 해야 했다. 왜?로 시작해 또 다른 왜?로 이어지는 질문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내 입장에 대한 논리와 설득이 생기게 되었고 그 후에는 이 의견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쉬운 게 하나 없었지만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조금씩 나를 표현하는 연습을 했고 이는 지금 다니는 직장 부서의 유일한 외국인이라는 환경 안에서 기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든든한 원동력이 되었다. 아무래도 독일어가 원어민인 그들보다 부족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운 문법과 단어들이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아니었다.


1.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왜 합리적인 지에 대한 논리) "

2. "이 부분은 현재 상황으로 보면 진행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안 제시) "

3. "지금 맡은 일이 있어 말씀하신 업무는 당장 처리하기 어렵지만 동료 R와 협력해 보겠습니다 (가능성 제시)"

등은 독일어 B1/B2(중급)까지만 배워도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T가 불만을 피력하지 않고 꽁하니 있었더라면 회사에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나 알았을까. 

한국-독일 직장 문화의 차이가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그 두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가만히 있다고 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천지개벽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어렵지만은 표현하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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