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팀장의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안주연과 한성규가 주연한 멜러 영화의 홍보자료였다.
20년 후에야 이메일이든 뭐든 회사 영화를 홍보하는 자료를 인터넷 세상에서 얼마든지 돌릴 수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각 신문사마다 직접 찾아가서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영화사의 홍보팀은 갑을 관계로 따지자면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으므로.
기자들은 취재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쓴 기사를 토대로 신문 기사를 썼다. 그래서 홍보 기사를 쓸 때 기자보다 더 잘 쓰려고 노력해야 했을 뿐 아니라 기사 쓰겠다는 곳만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잘 보여야 하거나 고마운 기자분들은 따로 술자리를 마련해 감사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지사.
영화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 트렌드에 관심 많은 사회초년생 여자가 신입으로 입사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홍보팀이었던 것이다.
‘커리어우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예쁘게 차려입고 배우, 감독을 프로페셔널하게 상대하는 일인 줄 알았더니 영화사의 온갖 귀찮은 뒤처리는 다 하면서도 정작 제작팀에 밀려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영화가 성공되면 영화 탓, 영화가 실패하면 홍보 탓’이라는 억울한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저러니 현팀장 앞에서 오PD가 잘난 척하는 거겠지.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그 힘든 일을 오랫동안 묵묵히 해온 현팀장에게 내심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종이백에 한가득 홍보 기사 자료를 무겁게 들고 회사에서 나왔다.
회사 진행비가 한정되어 있으니 지하철과 택시를 적절히 잘 섞어서 이동해야 한다. 종로, 광화문 쪽과 마포, 여의도 쪽에 있는 신문사별로 묶어서 동선을 최소화해야 했다.
‘휴우... 이 짓을 또 하다니, 되돌아온 게 기회 맞아?“
낯가리는 성격인데 가는 신문사마다 바쁜 기자들 붙잡고 인사하는 짓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화장이나 확인하려고 손거울을 꺼내보다가 팽팽해진 20대의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이뻤었나?
과거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화장을 안 하고 거적때기만 걸쳐도 예뻐 보일 만큼 찬란한 젊음이 거울 속에 있었다. 이렇게 젊은 데 뭘 못하겠어?
”그래, 버티자! 버텨서 꼭 성공하자!“
주먹을 꽉 쥐고 소리치는 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
”저기다!“
신문사를 한 바퀴 돈 후 뜨거운 시루떡처럼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나의 보금자리였던 원룸을 겨우 찾아냈다. 서울 지리를 잘 몰라 그냥 강남에 있는 회사 맞은편에 있는 원룸촌 중에서 찾아냈었던 곳이다. 고만고만한 원룸들이 줄지어 있어 찾아 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백 속에 있는 키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1층이지만 지하처럼 해가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내게는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처음으로 찾아낸 달콤한 자유의 공간이었다.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은 채 쌓여있는 더러운 그릇들, 바닥에는 던져놓은 옷가지들로 엉망진창이었다. 도둑 든 게 아니겠지?
너무 피곤해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몰려와 주체하기 힘들었다. 동시에 나에게 찾아온 이 놀라운 기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동시에 깨달은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 등 그 누구에게 말해봤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
밤새 앉은 상태 그대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지각할 위기 속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눈썹 휘날리게 뛰어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제작팀인 심실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홍보팀이었다가 제작팀으로 옮긴 사람이라 그런지 홍보팀에 협조적이었고 쿨한 성격이라 마음에 들었다.
“정지우가 한중 합작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대요.”
“기억이 갑자기 안나냐... 제목이 뭐였죠?”
“왜 이래, <자객>이잖아요.”
<자객>? 한중 첫 합작 영화에 CG가 뛰어난 영화라고 홍보했지만 촬영 기간 질질 늘어져 예산을 엄청 초과했었던 문제작? 흥행 실패하고, 작품성도 인정 못 받았었지. 우리 회사 첫 실패작으로 기록됐던 영화인데.
“아, 나도 중국 가고 싶다... 큰 작품 프러덕션하고 나면 인정받을 텐데.”
“에이, 난 그 작품 별로. PD가 누구예요?”
“몰라요? 오PD님이 하고 싶어 난리잖아요. 무조건 잘될 영환데. 오PD님은 자기 밑에서 큰 임부장하고만 하니까.”
그래?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에게 정말 딱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나중에 홍민호 감독 꺼 들어가면 그거 하세요. 그게 나아.”
“엥? 조감독님 말하는 거죠?”
“아아... 네에.”
맞다, 아직 조감독이지. 말조심 해야겠다.
난 정지우가 주연했던 영화 포스터 액자를 바라봤다. 신인이었던 그가 주연해서 대박 났던 영화. 당시 인기 있던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에서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슬로우모션으로 등장하는 순간, 극장에 있던 여자들의 한숨인지 감탄인지가 동시에 터져 나왔었다.
나도 친한 친구와 한동안 정지우가 나오는 영화는 극장 가서 다 찾아볼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기사와 사진도 보이는 족족 스크랩했다.
힘들고 우울할 때마다 내게 환한 빛이 되어 주었던 존재. 동시에 그의 비참한 말로가 떠올랐다. 절대로 그렇게 끝나선 안 될 배우였다. 그에겐 세상에 보이지 못한 끼와 재능이 너무도 많았는데.
갑자기 가슴이 쿡 찔린 것처럼 아팠다. 현팀장에게 한 소리 듣기 전에 얼른 움직이려고 돌아서는 순간, 여직원들의 탄성 소리가 출입구부터 파도처럼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몰라 심실장을 쳐다보는 순간,
“정지우다!”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말대로 만화를 찢고 나온 비쥬얼의 정지우가 영화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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