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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Dec 02. 2024

15화 반격의 서막(1)



                    

이번에는 내가 놀라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를 갖고 캐스팅, 투자해서 영화사에게 제작을 넘기는 거죠. 우리 팀은 돈 될 만한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제일 중요해요.”     


백팀장의 말에 경계심이 들었다. 이때만 해도 제작사 파워가 강할 때라 투자사가 돈을 대고 배급하는 일만 했었지만 점점 역할을 파먹고 들어오더니 영화사가 했던 ‘기획’마저 하려했다. 영화 만드는 일은 각자의 관점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크게 ‘기획’, ‘제작’, ‘홍보’ 로 나뉘었다.  


기획은 그야말로 아이를 낳는 것처럼 출생을 책임지는 파트라 기획이 실패하면 작품도 없었다. 시나리오 개발, 배우 캐스팅, 투자까지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영화사가 기획력이 있고 없고는 생존과 연결된 핵심적인 문제였다.

멀티플렉스를 가진 대기업 투자사들이 직접 시나리오, 캐스팅에 관여하면서 갖가지 수수료를 떼어가는 바람에 영화사들은 차츰 하청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대표님이 올해부턴 투자는 물론이고 시나리오 개발, 캐스팅까지 관여하고 싶어하셔서 우리 팀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나도 이 회사로 옮긴 거고.”

“투자사가 다 해 먹겠다는 얘기네요?”

“우리 돈으로 영화사들이 작품 만드는데, 거지같이 나오면 누가 책임지죠? 손해는 우리가 다 껴안잖아요.”     


그게 투자의 본질 아닌가? 손해 볼 각오로 대박 날 기회를 잡으려는 것!

한국 영화는 이전까진 관객 백만 명도 넘기기 어려웠지만 1999년 <쉬리> 이후로 천만 관객시대를 열었다.

현시점인 2003, 2004년은 해외투자자들까지 한국 영화에 눈독을 들일 정도로 투자대비 회수율이 좋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영화 제작자들이 자기 돈을 넣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다.      


“근데... 회사 얘기는 왜 하시는 건데요?”

“<더 키친> 저도 아주 재밌게 읽었거든요. 제가 팀장님한테 푸쉬했어요. 작품 놓치면 안 될 것 같다고. 시나리오 보는 눈이 저랑 비슷하신 듯.”

“우리 팀 사람을 더 뽑을 예정이에요. 관심 있으면 도전해 보시라고.”      


백팀장이 과시하듯 얄밉게 말했다. 조대리의 사람 좋은 미소에 경계심은 풀렸지만 여기로 와서 당신하고 일한다고? 그것도 부하직원으로? 어림도 없는 소릴!     


“기가 막히네...”

“네에?”     


조대리가 무슨 말인가 놀라 묻자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페이퍼들을 뒤적거렸다. 그 속에서 낯익은 외화 제목들이 눈에 띄었는데.      


“시크릿룸?”     


내가 깜짝 놀라자 조대리는 해외 세일즈팀에서 수입을 고민 중인 영화목록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마다 제목과 간단한 설명 몇 줄이 달린 게 다였다. ‘시크릿룸’은 밀실 스릴러의 획을 긋는 영화로 저예산 공포영화의 수작이 될 영화 아닌가. 이후 시리즈로도 만들어져서 다 흥행이 되는.      


“이 영화... 될 거 같은데요?”      


내가 ‘시크릿룸’을 지목하자 코웃음 치는 백팀장.      


“영화 볼 줄 모르시네. 장소도 한 장소뿐이고, 무명 배우 둘만 나오는 영화를 누가 봐요?”

“저 공포 스릴러 좋아하거든요. ‘밀실에 사슬로 묶인 두 남자, 한 남자는 이미 죽은 상황애서 8시간 만에 탈출해야 하는 영화, 쇼킹한 반전’...와, 기대되지 않아요?”

“글쎄요.”      


무시하는 듯한 백영석의 태도에 화가 났다. 하긴, 과거에도 내가 저 인간보다 영화 보는 안목은 높았었지. 알려줘도 못 먹는 걸 어쩌겠는가.

나는 테이블에 <더 키친> 시나리오를 올렸다.      


“이것 때문에 만난 거 아닌가요? 남궁 대표님한테 보여드릴 거예요?”     


내가 질문하는 순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는데, 백영석과 조대리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엉거주춤하며 나도 따라 일어나는 순간,     


“대표님!”      


하고 백영석이 긴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얼음이 되었다. 대표라고? 말로만 듣던 유명한 남궁 대표? 그가 나타난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단추 한두 개 느슨하게 푼 셔츠를 입은 남궁 대표는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이 날카로워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배 나오고 소리치는 장대표와 달리 조용한 한두 마디로 사람을 압살시킬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나이는 30대 중반? 후반일까?    

 내가 아는 바 남궁 대표는 영화감독에서 투자자로 전향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든 후에 미련없이 그만둬 버린 감독!

예전에 그에 관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감독 그만둔 이유를 묻자 천만 영화를 뛰어넘을 영화를 계속 못 만들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투자자로 바뀐 다음에도 작게 손해 본 영화들은 있어도 크게 번 영화가 많아 결코 손해 보지 않았다. 그는 손해 보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누구...?“

”아, 네! 홍보팀 진미래라고 합니다!“      


남궁 대표가 날 똑바로 보자 당황해 큰 소리로 답하고 말았다. 조대리가 ‘킥’하고 웃었는데.

남궁 대표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백팀장에게 말했다.


“내 방으로!”      


대표의 말에 백영석이 총알같이 빠르게 따라나섰다.                


“대표님까지 뵙게 될 줄 몰랐네요...”      


내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말하자      


“엄청 바쁘셔서 뵙기 힘든 분인데, 미래씨는 인연인가 봐요? 온 첫날부터 뵙고.”     


라고 조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인연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지 알고 저럴까?


*

   

남궁 대표의 방은 좋게 말하면 블랙과 회색 위주의 군더더기 없는 모던 심플 그 자체였지만 나쁘게 말하면 을씨년스러웠다.

이태리산 검은 가죽 소파에 앉은 남궁 대표가 다리를 꼬자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구두가 보였다. 백영석은 ‘구찌? 페라가모인가?’하고 부러운 듯 바라봤다. 손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롤렉스 시계가 반짝거렸는데, 신기한 점은 명품으로 도배한 천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써왔기에 몸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진행 중인 작품들 상황은 잘 알겠고... 영화사 홍보팀 직원이 왜 시나리오를 가져왔어?“      


느닷없는 대표의 질문에 어버버하는 백팀장.      


“아... 딴 게 아니라 괜찮은 게 있긴 한데, 대표님까지 보여드려야 할지 말지 고민 중입니다.”

“고민되는 거면 보여줘야지?”

“바쁘시니까 검토할 시간이...”

“백팀장이 보여주지 않아서 오백만짜리 하나 놓쳤었잖아. 기억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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