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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Dec 11. 2024

19화 기 센 상대를 만났을 때 (1)

                  

 저 눈빛이다! 평소에는 냉정해 보이는 홍감독인데 영감이 떠오르면 돌변했다. 이글대는 열기라고 할까 광기라고나 할까. 뭔가에 꽂히는 순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홍감독의 엔진에 시동을 거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대표님 좀 만나야겠어요!”     


술에 취했지만 벌떡 일어나 가버리는 홍감독이 어이없어 나와 심PD가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홍감독이 갑자기 뒤돌아보더니 내게 ‘엄지척’을 하는 게 아닌가. 별거 아닌 거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인정받는 일보다 충만함을 느끼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예전의 삶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누가 알아주긴커녕 무시만 당했었다. 이런 뿌듯함을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해도 즐거울 것만 같았다.      


*     


“아하하, 그러니까... 잘못하면 발정 난 여자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어느 여배우가 하려고 해? 쯧쯧, 영화 보는 눈 없는 것들끼리...”     


오PD는 오랜만에 장마철에 날이 맑게 갠 것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임실장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탄 채 즐겁게 웃었다.        


“그러니까요. 홍감독은 명문대 공대 나왔다면서 왜 그렇게 생각이 짧은 지...”

“야, 넌 학력 콤플렉스 너무 심해. 이 바닥은 실력만 있으면 된다니까? 홍감독 똑똑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이상한 애한테 홀려서 그런 거야. 시골에서 올라온 막내 주제에 따박따박 떠드니까 뭔가 있는 줄 알고 착각한 거지.”

“그런데 이병우 회사 대표가 왜 급하게 만나자는 거예요?”

“스케줄 문제 아니겠어? 정지우가 안돼서 아쉽긴 하지만 이병우면 건실한 이미지 얼마나 좋아? 해병대 나온 배우가 몇이나 돼냐고.”

“그럼요! 잘난 척 하는 정지우보다 다루기 훨씬 좋죠.”     

히죽이며 밖을 바라보는 오PD는 장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씩씩하게 받았다.      

“네! 대표님!”     


상대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급속한 속도로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오PD!      


“이런 씨발! 그 인간 돌았대요?”     


욕설에 깜짝 놀란 임실장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네에... 네?... 하아... 네....”


전화를 끊은 오PD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글로브박스를 주먹으로 쾅 때린다.     


“이 나쁜 놈! 더러운 놈!”

“대체 왜 그러세요?”     


운전하랴 당황해 오PD 눈치 보랴 정신없는 임실장이었다.  


“왜 급하게 보자는지 알았어! 그 새끼 룸살롱에서 여러 여자 돌려 만나다가 여자들한테 협박당했나 봐! 매니지먼트사에서 돈으로 덮으려다 실패한 거 같고.”     


오PD의 말을 들은 임실장이 기가 막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에? 이병우... 유부남이잖아요??”

“내 말이!!”      


방금까진 하늘로 상쾌하게 솟구치는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지하 100층으로 곤두박질 처진 기분이 드는 오PD였다.       


*     


장대표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자객> 캐스팅 단계에서 이렇게 문제가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중국 쪽 투자, 국내 투자까지 쉽게 정해졌고, 정지우도 금방 하겠다고 했을 때까지는.

중국 쪽에서 라이징 스타인 정지우의 작품과 비주얼에 반해 하겠다고 했는데, 이병우로 바꾼 후 투자 철회하겠다고 난리를 쳤었다. 이병우의 작품을 보여주고, 직접 만나게까지 해서 어렵게 마음을 돌렸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가.

이 모든 게 마음을 바꾼 정지우 때문이고, 재수 없는 소리를 한 진미래 때문인 것 같을 정도로 남 탓을 하고 싶었다.

      

이 와중에 홍감독은 성수정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수정과 미모로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 안소희를 붙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신선한 조합으로 느껴지긴 했다. 그러나 투자사 통과하긴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성수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여배우였다. 신인 감독이 과연 컨트롤 할 수나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제작팀이었을 때 촬영 현장에서 만나 안면을 튼 그녀에게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넣었고, <더 키친> 시나리오를 보내놓았다. 의외로 시나리오를 재밌게 봤다는 성수정을 홍감독과 만나게 해주기 위해 남산의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드디어 성수정이 나타났다. 크고 까만 알의 선글라스를 쓰고, 미니 스커트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매끈한 다리를 뽐내며 걸어왔다. 너무 힘주고 온 거 아닌가, 생각했을 때 특유의 거만하고도 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이게 얼마 만이야?”     


맞은 편에 다리를 꼬고 앉는 그녀는 홍감독의 인사를 받고도 고개만 까딱했다. 신인 감독 따위는 무시하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장대표하고만 지인들 소식과 가쉽을 나누었다. 딸랑거리는 기질이 부족한 홍감독은 팔짱을 낀 채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속으론 기분이 상했는데.      


“아, 미안해요, 내가 낯을 좀 가려서.”       


그제야 홍감독이 눈에 보이는 듯 말을 거는 홍수정.     


“감독님, 글 좀 쓰던데요?”

“네? 아아...감사합니다.”

“그런데... 노출이 좀 많아서 고민이야.”     


성수정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하자 장대표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노출이야 얼마든지 조율 가능한 문제죠. 카메라 워킹으로 헤결할 수도 있고. 홍감독, 그렇지 않아?”

“팬티는 보여줘야죠.”     


홍감독의 말에 경악한 장대표와 기가 막힌 성수정의 표정.      


“어머나, 내가 무슨 삼류 배우인 줄 아나 봐? 장대표, 이게 무슨 개소리야?”     


변명하려는 장대표를 막고 각오한 듯 숨을 고르는 홍감독.      


“이 영화에서 노출은 여성의 당당한 성적 욕구를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사회제도에 얽매여 눈치 보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란 말이죠.”

“장대표가 말했잖아, 수위 조절은 가능한 거라고.”

“요즘 관객들 눈 높습니다. 카메라로 눈속임하면 모를 것 같아요? 이 영화로 관객을 끌어들이려면 파격적! 이라는 말이 붙지 않으면 안 돼요. 대표님 안 그렇습니까?”     


흥행과 관련된 일리 있는 지적에 어떤 말을 해야 성수정을 구슬릴 수 있을지 계산하느라 바쁜 장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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