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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Jun 16. 2020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였던 연애

이제는 철 지난 이야기


 연애마다 전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 음식, 장소, 옷가지, 계절, 음악 등등은 키워드로 정리되곤 하는데, 나는 그 키워드들에 꽤 격하게 동요하는 편이다. 이별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전에, 이런 키워드들이 불쑥 앞에 등장하면 '으악!' 하며 황급히 시선을 돌리거나 아련하게 추억에 젖어든 채 카톡을 들락거리게 된다. 언젠가는 그 트리거에 붙들리는 기분을 벗어나고 싶어서, 메모장에 전 연인과 관련된 키워드들을 줄줄이 적은 뒤, 삭제 버튼을 꾸욱 눌러보기도 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운 이별 극복 시도였다. 효과는, 딱히 없었다.

 최근에 쓰고 지운 키워드들은 여름, 편지, 그리고 킥보드다.


  내가 만나게 될 상대에게 군대 문제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여름이었다. '우리 만나자!' 와 같은 확실한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고 또 꺼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한동안 나와 그의 유일한 연락 수단은 편지와 음질이 쓰레기인 전화 몇 통이 될 거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훈련소로 사라져 버리기 전 그는 내 집주소를 물었다. 조선시대야 뭐야 하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내심 설레는 마음으로 주소를 알려줬다. 주소를 알려준 그 후부터, 매일같이 그가 보내올 편지를 향한 나의 단거리 킥보드 여정은 시작됐다.


내 집은 회사로부터 걸어서 15분, 그즈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공유 킥보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5분이었다. 우리 집의 우편물은 늘 점심시간 즈음에 배달됐다. 왕복을 걸어 다니기에는 푹푹 찌는 여름이었기에 나는 점심시간마다 걷는 대신 킥보드를 타고 집을 향해 달려갔다. 점심과 퇴근 사이의 시간조차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나는 참을성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의 편지에 관해서만 참을성이 없었다. 우편함에 꽂혀있는 편지를 집는 순간, 도톰한 종이의 두께가 손끝 아래에 느껴지면 심장이 동동동 뛰었다. 편지가 도착한 날에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두 번 세 번 편지를 읽었다. 오지 않은 날에는 직전 편지가 언제 왔으니 다음 편지가 언제쯤 올 지 날짜를 세곤 했다. 사실 날짜를 세는 일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매일 킥보드를 타고 달려갔으니까.


거 참 편지받기 딱 좋은 날이군


 확실한 감정 표현을 하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입장 정리도 되지 않았기에, 우리의 편지는 애매한 줄타기를 했다. 건조한 근황들과, 보고 싶다는 직접적인 표현들을 이리저리 피해 '어디 술집이 괜찮다더라, 그러니 곧 같이 가자'와 같은 말들을 대신 써낸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모든 문장들이 애매했기 때문에 어쩌면 더 간질거렸던 것 같다. 그 여름엔, 매일 크리스마스이브날 침대에 누운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날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그 시간조차 행복한 그런 기분.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연락할게.'라고 쓰여진, 마지막 편지를 받는 것으로 나의 단거리 여정은 끝이 났다. 편지를 받고 보내는 간격에는 늘 딜레이가 있었다 보니, 내가 답장으로 썼던 편지는 미처 보내지 못하고 서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꽤 여러 번 읽었다. 언젠가는 밤 산책을 갈 때 챙겨 들고 나와선 벤치에 앉아 다시 또 읽었다. 여전히 여름이었고, 공기는 후덥지근했지만 막상 바람은 선선한 날이었다. 와 완전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였다, 라고 생각하면서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공원을 몇 바퀴 더 돌았다. 그가 편지로 좋아한다고 알려준 노래들을 내내 들었다.

 이제는 우편함을 향해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더 이상 도톰한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을 때의 기대와 설레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지닌 채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지금은 철 지난 연애담이 되어버렸지만, 돌이켜 생각해도 좋았던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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