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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수 Jan 31. 2024

내 인생의 황금기, 런던 워홀 2년

빡빡하기로 악명 높은 런던 히드로 공항의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했다. 미리 알아본 숙소 근처의 3(쓰리) 매장에 들어가 선불 유심으로 폰을 개통했다. 2존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내방은 넓고, 밝고, 산뜻했다. 미리 등록해 둔 우체국으로 가서 나보다 먼저 도착한 영국신분증(Biometric Residence Permit card)을 찾아왔다. 전화를 걸어 NI넘버(National Insurance Number; 영국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번호) 서류를 신청했다. 영국에 온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일과 집을 구했다.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너무 쉽게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은행계좌를 열기 전까지는...


은행계좌를 열기 위해서는 신분증과 집주소를 증명할 서류가 필요했다. NI넘버로도 주소증명이 가능한데 당시 몇몇 은행에서 브렉시트(2017년 2월) 이후 NI넘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려 두 달 동안 다섯 곳이 넘는 은행을 수십 번 들락날락하며 퇴짜를 맞았다. 회사계약서를 가져가면 증명서(Reference Letter)를 받아오라고 퇴짜. 이메일로 받은 증명서를 프린트해 가져가면 오리지널 서명이 있어야 한다고 퇴짜. 서명을 받아 가면 이름만 있고 성씨가 없다고 퇴짜. 계약기간 날짜가 요구사항과 다르게 적혀있다고 퇴짜. 보다 못한 집주인이 본인이 쓰는 은행으로 가라며 계약서를 써주었지만 집계약서는 에이전시를 통한 것만 가능하다고 또 퇴짜. 


다행히 영국 은행계좌가 없어도 일은 할 수 있었다. 계좌가 없는 직원에게 회사는 체크를 주는데 문제는 그 체크를 가지고 은행에 가서 현금화를 하려면 결국 계좌가 필요하고, 체크를 입금해도 4일 후에나 쓸 수 있는 내 돈이 된다. 회사는 주소증명서류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은행에서 원하는 정보가 정확히 적혀있어야만 한다. 


또다시 준비한 서류를 가지고 모 은행으로 가던 중 그날따라 눈에 띈 넷웨스트로 샜다. 회사에서 받은 서류는 안 되지만 NI넘버로 주소증명이 된단다. 네????? 브렉시트 이후로 안 된대서 포기했는데 여기는 얼마 전부터 받기 시작했단다. 그러나 은행이 바빠서 예약은 다음 주에나 가능하다고. 정말 NI넘버로 되냐고 재차 확인하고 예약을 했다. 그날 가고 있던 은행에는 가지 않았다. 예약한 날이 되어 넷웨스트에 갔고, 지난 두 달 동안 왜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뛴 건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간단히 계좌가 개설되었다. 나는 그동안의 설움이 몰려와 하소연했고, 은행원 언니는 내가 계좌를 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예금통장까지 만들어주었다. 


북적이는 빅토리아 역


4존에 살아도 괜찮아


슬슬 런던시내를 둘러보던 둘째 날, 어반아웃피터스 매장 직원과의 인사가 스몰톡으로 이어졌다. 어제 런던에 와서 일과 집을 구하는 중이라는 내게 그녀는 자기 집에 빈방이 있다고 말했다. 월세 350파운드에 솔깃했지만 4존은 너무 먼 것 같아 망설였더니 그녀는 쉬프트가 곧 끝나는데 집에 같이 가서 보겠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제안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혼자 찾아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방금 처음 만난 꼬불꼬불 아프로 머리와 통통한 볼이 귀여운 콩고계 영국인 S와 함께 튜브(지하철)를 두 번, 버스를 한번 타고 방을 보러 동쪽으로 갔다.


근처에 큰 공원이 있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빅토리안 스타일 2층집에 들어가자 대형견 복실이가 반겼다. 걸터앉을 수 있는 턱이 있는 한쪽 벽 대부분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에 옷장이 하나, 낮은 싱글베드가 하나, 그리고 요가매트 하나를 깔 공간이 있는 아담한 방과 큼직한 화장실, 뒷마당이 보이는 환한 부엌과 넓은 식탁이 마음에 들었다. S는 이 집에 같이 사는 집주인은 쿨한 아저씨이고, 엄마 집을 오가는 딸 둘이 있다고 설명했다. 집주인을 만나러 찾아간 다음날, 나는 에어비앤비가 끝나는 대로 이사 오겠다는 계약을 하고 그 집에서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자고 왔다. 


내가 이사 들어가고 몇 달 뒤, 해고당한 S는 더 이상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방을 비웠다. 그 방은 또 다른 뽀글머리의 K와 그녀의 물건들로 채워졌다. 창작과 예술, 반짝이고 화려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 K는 자기 물건이나 경험을 공유하길 좋아해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고, 자주 영상과 책을 추천해 주었다. 요가와 명상,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집주인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종종 하우스파티가 열리고, 손님들이 오가며, 쌀쌀한 겨울엔 뒷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늦게까지 놀았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먹고, 일상을 나누고, 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집에서 지낸 지 일 년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충분한 산책을 하지 못해 집안과 뒷마당을 날뛰는 복실이, 치우진 않으면서 어지럽히기만 하는 딸들, 종종 분노 조절을 못하고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집주인의 모습에 지친 K와 나는 같이 이사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스위스에 출장 가있던 그는 잔뜩 화내며 분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런던에 돌아가기 전까지 너네 다 나가. 안 그러면 너네들 짐을 다 집밖으로 던져 버릴 거야.] 우리는 조금 어쩔 줄 몰라하다 곧 정신을 차린 뒤 이사차량을 예약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직 적당한 가격과 위치의 집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급한 대로 일단 K의 그랜마 집으로 피신을 갔다.


그랜마 집도 4존이지만 이번엔 북쪽이었다. K는 이사 오기 전에 쓰던 그녀의 방을, 나는 킹사이즈 침대와 수납장이 있는 손님방을 쓰게 되었다. K는 그랜마의 잔소리가 싫어 이사 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오래되었지만 깔끔하고 정겨운 그 집에서 사는 게 싫지 않았다. 250파운드만 받겠다는 그랜마 덕에 월세를 아껴 여행을 더 많이 다닐 수 있었다. 그랜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같이 런던에 놀러 가고, 시장을 보고, 어깨너머로 그녀의 자메이카 요리를 배우며 비자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집에서 살았다. 여러 도움을 받으며 노력했지만 쫓겨난 집에서의 보증금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좋은 일에 기부했다 치고 내려놓기로 했다.


2층 버스 맨 앞자리 뷰


적당히 일하고 많이 여행하기


한가로운 평일의 늦은 아침, 옥스퍼드 스트릿의 여러 의류매장을 둘러보며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자라 매장의 어떤 직원에게 여기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본드 스트릿에 자라가 속한 인디텍스 본사가 있다고 알려주었고, 곧장 그곳으로 걸어가 이력서를 냈다. 본사에서 그룹면접을 보고, 합격전화를 받고, 주어진 매장에 가서 개인인터뷰를 했다. 영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쇼핑센터의 버쉬카 매장에서 주 30시간 일을 하게 되었다. 돈을 많이 벌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휴무에 런던여행을 더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동료들은 대부분 외국인으로 다들 억양이 짙은 영어를 썼다. 매장에서 일할 때에는 꼭 영어로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부터 루마니아, 라트비아, 감비아, 몰도바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유니폼을 주지만 로고가 없는 사복을 입어도 되는데 놀랍게도 민소매나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일해도 괜찮았다. 첫 업무가 매장 내 안전교육영상을 시청하는 것인 만큼 안전을 중요하게 여긴다. 매장 내부에는 화장실이 두 개 있고, 벽에 휴가신청표가 붙어있는 휴게실에는 전자레인지와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다. 일주일에 두 번 과일바구니가 온다. 모두 일 년에 5주 휴가를 써야 하며 일하는 날엔 30분 유급휴식시간을 받는다.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들의 대부분은 재미있고 좋았지만 가끔 인종차별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 특히 무례하기로 소문난 루마니아 남자애가 종종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처음에는 속상해 울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맞서 싸웠다. 걔는 장난이라고 얼버무렸고 나는 매니저한테 갔다. 걔가 또 그러면 심각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나중에는 계산대에서 일하며 조금 수월해졌는데 비수기가 되었으니 쉬프트를 주 20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 K랑 집주인에게 일이 줄면 나는 세컨 잡을 구하거나 새로운 일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K는 마침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직원을 찾는데 나를 추천할 테니 이력서를 보내라고 했다.


버쉬카를 그만두고 이스트런던 쇼디치에 있는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로드샵에서 풀타임으로 일했다. 옷과 가방, 선글라스와 주얼리, 양초 같은 소품을 파는 작은 매장을 혼자 보았다. 음악도 마음대로 틀고, 손님이나 따로 할 일이 없으면 자유시간이었다. 매장에서 파는 옷이 후드와 맨투맨, 조거팬츠라 편한 옷을 입고 일했다. 안에 화장실도 있고, 휴식시간엔 같은 건물 4층의 사무실을 휴게실로 쓸 수 있었다. 유연한 프리랜서 계약으로 처음에 쓴 주 5~6일 일하는 월급계약을 시급계약으로 바꾸고 원하는 만큼 휴무를 받아 매달 유럽여행을 했다. 가끔 별난 사람들이 매장에 들어와 이상한 말을 했지만 대체로 평화롭고 무난하고 안정된 나날이었다.


테이트모던에서


런던에서 불교철학 수업을


책과 신문을 읽는 사람들로 가득한 튜브(지하철)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 나도 그들처럼 튜브 스테이션에 쌓인 무료신문을 읽으며 출퇴근해 봤다. 얼마 전 34도까지 올라가 누가 기절했다는 소식, 영국인에게 31도 이상은 너무 더운 것이고 24도 이하는 너무 추운 것이라는 설문, 자극적인 사건사고나 정치소식, 그리고 광고가 너무 많아 두 달 정도 읽다가 관뒀다. 튜브에서는 책을 읽고, 버스에서는 오디오북을 들었다. 휴무 날에는 이곳저곳의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공원과 서점에 가고, 새로운 동네를 걷고, 종종 뮤지컬과 영화, 연극을 보았다. 


영국에 가면서 막연히 영어로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느 대도시처럼 런던은 배움의 기회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원하는 것을 골라 배울 수 있는 강좌로 가득한 교육기관의 철학수업 목록은 중국철학, 일본철학, 불교철학으로 전부 동양의 것들이었다. 조금 고민하고 12주 동안 수요일마다 불교철학 수업을 들었다. 생소한 단어가 많아 수업 전에 뜻을 미리 찾아갔다. 한국어로 비슷한 내용을 찾아봤더니 한문번역체와 한자불교단어 범벅이라 영어보다 더 어려웠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부처(해탈한 사람)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과정이다. 어제와 오늘의 나, 십 년 전과 오늘의 내가 같지 않듯 우리는 매 순간 다시 태어나지만 영혼이 없기 때문에 환생은 없다. 태어남도 고통, 늙음도 고통, 병듦도 고통, 죽음도 고통이지만 그 어떤 고통도 결국엔 지나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은 사랑같이 좋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모자란 시간에 왜 이렇게 고통이니 비어있음 같은 부정적인 말만 하는 거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불평이나 질문에 항상 차분히 답변해 주었다. 하루는 한 학생이 질문을 하다가 "I don't care(신경 안 써)"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보통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더 신경을 쓰고, 관심받고 싶어 한다고 하더니 갑자기 투애니원 노래 중에 I don't care가 있다고 했다. 중년 백인 남성 교수님이 투애니원과 노래제목을 안다고? 그는 심지어 나를 보며 걔네가 왜 그 말을 했더라? 하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진행상황에 상황파악을 하는 사이 선생님은 투애니원 멤버들의 이름까지 줄줄 외우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너무 놀랍고 재미있어서 한동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투애니원 팬인 선생님의 불교철학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레 명상에 관심이 생겼다. 도대체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집주인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위빳사나 명상센터에서 10일 동안 명상을 배웠다. 명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런던까지 가서 불교철학을 배웠나 보다.


새벽의 에딘버러에서 마주친 네온사인 "두리번거리는 모든 사람이 길을 잃은 건 아니다."


얼떨결에 헤어모델 된 날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런던이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돈을 아끼는 방법이 다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무료전시가 있고, 1존에서 타는 2층 버스는 투어버스와 다름없다. 두 손을 모은 크기의 바구니에 담긴 1파운드 과일과 채소를 파는 마켓이 열리고, 중고매장이 흔하다. 머리숱이 감당 안 되는 지경에 이른 어느 날, 웹 서핑을 하다 타임아웃런던 웹 사이트에 무료(아님) 헤어컷 목록을 찾았다. 이메일을 보내 가격을 확인하고 전화로 5파운드 헤어컷을 예약했다. 토니앤가이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커트와 염색으로 나누고 사람들을 줄지어 있는 의자에 앉혔다.


사실 자기들 맘대로 리얼리티 쇼처럼 비포/애프터, 너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줄게 하는 그런 걸 상상하며 걱정 반 기대 반 했었다. 현실은 일반 미용실에 간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머리를 말하면 그렇게 해주는 거였다. 머리를 감기고 트레이너 한 명이 트레이니 몇 명을 돌아가면서 봐주고, 머리카락 섹션을 따고, 부분마다 자르기 전에 코치를 해줬다. 내가 짧은 보브컷 단발머리를 하고 싶다니까 연습을 하고 나서 원하는 대로 해준 댔다. 내 머리를 해준 한국인 트레이너는 한국 토니앤가이 매장에서 교육받으러 온 현직디자이너였다. 연습하는 머리는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를 세 가지 길이로 자르는 히메컷이라고 했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니까 사진을 보여줬는데 천사소녀 네티 같은 스타일이었다. 앞머리만 안 자르면 아무렴 괜찮았다. 묶으면 단발, 풀면 긴 단발이 마음에 들었다. 추가로 깃털처럼 가볍게 숱만 쳐주었다. 이때부터 트레이너들의 관심이 시작되었다. 담당 트레이너(이하 토니)는 내가 연습한 머리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니까 너무 좋아하며 다음에는 자기가 내 머리를 잘라주고 싶다며 염색은 안 하고 싶냐고 물었다. 토니는 이따 프레젠테이션이 있는데 내 머리가 신상 디자인이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카페에서 잠시 쉰 다음 이번엔 학원 위층으로 올라갔더니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또 다른 디자이너가 오더니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조금만 더 자르고 싶다더니 앞머리를 자르게 해달라고 졸랐다. 니가 생각하는 그 앞머리가 아니라고, 옆으로 넘기는 길이로 자르겠다고 애원했다.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더니 염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고 싶은 색깔이 따로 없다니까 빨간색으로 한댔다. 싫으면 다시 어두운 색으로 덮어준다고 꼬셨다. 백스테이지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특유의 정신없는 현장분위기에 쓸려서 옷까지 갈아입었다. 이마 중간에서 한쪽 앞머리랑 옆머리가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한시 반에 5파운드 헤어 컷을 하러 왔다가 일곱 시에 헤어 쇼를 하고 있었다. 세 팀씩 무대로 나갔더니 수십 명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디자이너는 본인이 뭘 하는지 설명하며 모델의 머리를 자른다. 미용실이었다면 거울이 있을 자리에 관객들이 있어서 나는 내 머리를 볼 수 없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자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헤어쇼를 구경하는 건 흥미진진했다. 내 앞머리를 자를 때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게 이상했다. 끝나고 모델들이 서서 머리를 보여주면 관객이 사진을 찍었다. 자꾸 다들 앞으로 커트와 염색을 무료로 해준다고 말했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틈에 빨강머리를 부여잡고 집으로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K와 집주인이 깜짝 놀랐다. 다음날 동료들도 무슨 만화 캐릭터 같다, 본사에서 직원이 온 줄 알았다며 신이 나서 놀려댔다. 


토니한테 연락해 염색을 수습해 달라고 요청했고 며칠 뒤 빨강 부분은 어두운 색으로 덮였다. 토니는 종종 머리를 다듬고 싶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 번인가 더 갔는데 자꾸 염색을 하라고, 하이힐을 신고 워킹을 하라고 그래서 그만 갔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무료로 파격적인 머리스타일을 해볼 재미있는 기회였는데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헤어쇼 경험 이후로 나름 과감해져서 겨우 귀를 덮는 짧은 단발로 자르고, 머리카락 전체를 얇게 땋은 머리도 해보았다. 언더컷을 시작하고는 미용기구를 구매해 혼자 머리를 밀고 자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생 황금기


런던에서의 나날을 떠올려보면 일도 많이 안 하고 어쩜 그렇게 여기저기 자주 돌아다녔는지 참 신기하다.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여러 문제가 해결되는 날들이었다. 런던의 날씨는 소문만큼 끔찍하지 않았고, 온 세상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음식이 있었다. 무료 혹은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흔했고, 이곳저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언제든 2층 버스의 맨 앞자리에서 마음껏 창밖을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다. 한 번의 헨파티와 두 번의 결혼식에 참석해 드넓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춤추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였다. 


영국 런던은 캐나다 밴쿠버, 호주 멜버른에 이은 세 번째 워킹홀리데이였는데, 그간의 경험과 운의 조화로 감사하게도 초기적응이 순탄했다. 워홀비자와 짐 가방만 덜렁 들고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외국 땅에 가서 신분증을 받고, 폰을 개통하고, 보금자리를 찾고, 일자리를 구하고, 은행계좌를 여는 초기엔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든다.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정든 장소들이 늘어날 때쯤이면 비자만료 날이 벌써 코앞이다. 그동안 옅게 새긴 나의 흔적을 정리하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내 사람들을 만나 아쉬움이 듬뿍 담긴 작별인사를 한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시원섭섭하다. 인생이 끝날 때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오롯이 혼자 보낸 타지에서의 수많은 시간은 나를 돌보는 법, 고독을 즐기는 법과 혼자서도 잘 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주토피아 영화의 나무늘보 같은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겪으며 인내심이 조금 자랐고, 답답한 일을 겪을 때마다 영어 말하기가 늘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현지인, 이민자,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문화를 교류하려면 먼저 나의 의견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어떤 일도 내 예상대로 되지 않으며 그래도 괜찮다는 걸, 오히려 상상도 못 했던 신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평일 오후의 텅빈 튜브



캐나다, 호주, 영국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고 여행하며 20대를 보냈습니다.

워홀 3개국 이야기를 써야지 써야지 했는데 캐나다에서 열심히 적은 일기를 실수로 날려버리고,

비거니즘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코로나가 터지고, 다른 것들을 하며 살았는데요.

지난 연말 워킹홀리데이 인포센터에서 공모전을 하는데 기간이 맞아 까맣게 잊고 지낸 그 시절 적어둔 블로그를 찾아서 읽어보며 새록새록 기억을 떠올리며 열심히 썼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냥 버리면 아까우니까 여기에라도 올립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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