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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33호(2023년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일 년 중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는 따로 없지만 비오는 날은 많은 곳. 매일이 여름이라 어디든 초록색으로 빛나는 식물들이 번성하는 곳. 어마어마한 대도시와 원시의 열대우림이 공존하는 곳.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곳.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동양의 것과 서양의 것이 섞여있는 곳.
동네가 빈티지
언젠가 안부 미팅에서 동료 혜원은 페낭이라는 곳이 좋았다고 했다. 태국에서 기차로 국경을 넘은 다음 통근열차와 배를 타고 마침내 조지타운에 도착했다. 분명 말레이시아에 왔는데 골목길을 가득 채운 예스러운 낡은 건물엔 한자로 된 간판이 붙어있고, 중국어를 쓰는 동양인들이 많다. 말레이시아에는 영국 식민지 때 중국과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데 페낭에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특히 많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계 사립학교에 다녀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를 다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다들 영어를 잘해서 모국어가 다른 경우 보통 영어로 소통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지타운은 제아무리 집주인이라도 길고 복잡한 절차 없이는 함부로 건물을 바꾸거나 철거할 수 없다. 덕분에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를 찾아보고, 작고 귀여운 가게를 구경하고, 다양한 색깔과 무늬의 타일로 꾸며진 건물 입구를 살피는 재미가 있다. 화려한 수집품으로 가득한 페라나칸 맨션에서 중국계 남성과 말레이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논냐 문화’를 알게 되었는데 유명한 페낭 락사와 타일도 논냐였다. 오래된 동네와 더 잘 어울려서일까 조지타운엔 건물 뿐 아니라 옛날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자주 눈에 띈다.
중국과 인도의 이민자들이 많은 페낭은 사실 미식 도시로 더 유명하다. 왜인지 중국인들은 중국 음식을, 인도인들은 인도 음식을 고집할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조지타운 곳곳에서 발견한 중국 식당의 인도인 손님, 인도 식당의 중국인 손님의 존재가 즐거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페낭에서는 인도와 중식 뿐 아니라 논냐 전통음식, 일식, 팔라펠 등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면 놀랍게도 페낭에서 머무는 5일 동안 갔던 식당에서 먹은 모든 음식이 만족스러웠다. 짧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맛보지 못한 음식이 너무 많아 다시 갈 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고사리와 이끼의 숲
조지타운에 이은 카메론 하이랜드. 아무리 식민지였다지만 오만하게 제 이름을 떡하니 갖다 붙이다니. 이놈의 조지와 카메론 때문에 내가 다 부끄럽다. 카메론 하이랜드는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의 시원한 고지대라는 특성상 언제나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복작인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여기저기 쭉쭉 뻗은 나무고사리들이 환영해 주는 선선하고 촉촉한 그곳에 도착했다. 현지인들도 혀를 내두르는 이상 폭염에 시달리다 만난 예상 밖의 쾌적함에 한껏 취한 우리는 배낭을 메고 숙소를 향해 걸었다. 오르막길이 시작될 무렵 쨍한 주황색 봉고차를 탄 숙소 주인 제이가 짠 하고 나타났다.
제이가 알려준 대로 맵스미 앱을 보며 트레킹코스 3번 입구를 찾았다. 버려진 느낌의 무성한 산길에 말레이시아어로만 적힌 판자가 있는데 마침 인터넷이 안 터져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화 아바타의 배경을 연상케 하는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열대우림에 왔다는 게 실감 나 두근거렸다. 사람이 거의 없던 약 세 시간의 등산길 중간에는 비도 한차례 내려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늘지고 습도가 높은 숲을 뒤덮은 크고 작은 이끼와 고사리는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우거진 풀을 헤치고 내려간 출구엔 딸기농장이 있었다. 일꾼들이 알려준 곳으로 나와 보니 바지랑 신발이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제이와 숲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끼를 좋아한다고 했고 제이는 숙소 근처 벽의 이끼를 보여주었다. 이끼가 머금는 물을 사람들도 쓰는데 기후 위기로 이끼가 죽으면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했다. 그리고는 숲에 식충식물이 있는 줄도 몰랐던 우리를 데리고 도로 옆 벽에 붙은 작은 식충식물을 찾아 보여줬다. 그 길 언저리에 있던 도로 개발로 파괴된 제이가 탐조하러 자주 가던 숲도 보았다. 하이랜드의 자랑이었던 트레킹 루트는 전부 사유지가 되었고 번역할 수 없던 그 표지판은 출입 금지라는 뜻이었다.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지는 자연과 인류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날들이었다.
무슬림 관찰
말레이시아는 내가 처음으로 여행한 무슬림 국가이다. 다양한 문화가 같이 또 따로 공존하는 곳이라 히잡을 쓴 사람도 있고 히잡을 쓰지 않은 사람도 있다. 도로에는 히잡을 쓰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여성들이 꽤 보이는데 운전기사들, 숙소나 카페, 음식점의 직원들 대부분은 남성이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날엔가 페낭의 대형 슈퍼마켓을 구경하는데 한쪽에 따로 분리되어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 위에 붙은 낯선 표시가 보였다. <논 할랄 존>. 엄격하게 술과 돼지, 할랄Halal이 아닌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음식을 주문할 때 비건으로 요청해도 곧잘 들어준다.
쿠알라룸푸르에는 쇼핑몰이 정말 많은데 대부분의 쇼핑몰 통로의 옷 가게마다 발목 길이의 치마와 각종 색상의 히잡을 판매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무슬림 여성들은 수영장에서도 역시 검은색의 긴팔, 긴 바지와 무릎길이의 치마, 히잡 수영복을 착용한다. 세계 곳곳에 점포가 있는 한 패스트 패션 매장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무슬림 스타일의 의류가 진열되어 있다. 유명한 스포츠 매장 벽면을 채운 운동화 가운데 하나에는 <주의! 이 상품은 돼지 피부를 사용합니다.>라는 눈에 띄는 표시가 있었다. ‘응? 왜 새삼스럽게? 그런데 가죽이라고 안 하고 피부라고 하네? 아아, 할랄!’
한낱 관광객인 내 눈에 보이는 건 꽁꽁 싸맨 여성들과 여기저기에 붙은 할랄 표시, 모스크와 자유로워 보이는 남성들뿐이었다. 더위도 피할 겸 무슬림 문화에 대해 더 알아볼 겸 이슬람 예술 박물관을 찾았다. 일 층에는 생경한 19세기 중동의 모습을 신비롭게 표현한 유럽인들의 그림이, 이층에는 세계의 이슬람사원 모형이 있었다. 창문이 거의 없는 폐쇄적인 외부와 부드러운 곡선의 창문으로 가득한 내부의 대비가 흥미로웠다. 수많은 쿠란은 내지 대부분이 세밀한 그림이었고, 원형 천장은 박물관의 각종 수집품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조금은 더 알게 된 것도 같지만 아직도 무슬림은 수수께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