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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0. 2019

예뻐서 폭격도 면제된 중세 도시

독일 로텐부르크, 2016년 말 겨울

로텐부르크의 정식 명칭은 '타우버 강 위의 붉은 성'이라는 의미의 Rothenburg ob der Tauber이다. 독일 로맨틱 가도 관광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도시로, 중세 모습이 잘 보존된 성곽과 구시가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 찾아가면 더욱 화사했을 텐데, 12월에 로텐부르크를 바라본 첫인상은 안개에 싸이고 우중충한 중세의 성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 ICE 열차로 출발해서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지역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슈타이나흐트(Steinach)에서 더 작은 완행 지역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그렇게 로텐부르크에 가까워질수록 겨울 안개가 짙어졌다. 차창을 스치는 나무들에 눈꽃이 피었다. 뭔가 시간을 거슬러 산속의 중세 도시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는데, 동승객들이 심히 다양한 글로벌 관광객들이라 신비로운 느낌은 반감되었다. 패키지 관광이나 자가용 운전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 쉬운 도시는 아니었다. 이런 지방 소도시가 크리스마스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니 대단한 일이다. 아이템과 스토리가 매력적이면 교통이 불편해도 관광으로 흥하게 되는 거다.   


로텐부르크에는 산타도 쇼핑하러 온다는 크리스마스 선물가게의 대명사 '케테 볼파르트(Käthe Wohlfahrt)' 본점이 있다. 그 덕에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진짜 성탄 시즌인 연말도 나름대로 성수기이고 단체 관광객도 많아서 한적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겨울철의 작은 중세 마을을 한가로이 즐기는 콘셉트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프랑크푸르트의 현대식 빌딩 숲을 떠나 한나절 만에 극단적으로 다른 풍경을 마주하니 신기했다. 그림 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동화 같은 중세 도시는 완전히 딴 세상에 온 느낌을 주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인공적인 색깔이 바래 보여서 중세 느낌이 더 살아나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안팎이 확실하게 구별되고, 관광은 성 안의 작은 구시가에 집중된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금방이었다. 사진 몇 방 찍고 신속하게 둘러보는 한국식 패키지라면 반나절이면 충분한 규모다. 천천히 골목을 기웃거리는 여행자라도 1박 정도면 충분했다. 유명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시골이라 숙박이나 식비 물가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테디베어를 폭풍 쇼핑하지 않는다면 저렴하게 눈호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폭풍 쇼핑을 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예쁜 것들이 너무 많아서다.  

중세 도시 로텐부르크 구시가지는 크리스마스 상설 시장같다.
저녁 시간 시청사 광장, 야경꾼 아저씨와 함께 한 구시가지 워킹 투어

하루 묵으면서 '야경꾼 나이트 투어(Tour with the Nightwatchman)'에 참여했다. 저녁 8시부터 한 시간 정도 성 안을 걸으며 로텐부르크의 중세 전성기부터 2차 대전에 이르는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워킹 투어다. 상당히 추웠지만 긴 밤 저녁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캄캄한 밤에 구시가지를 혼자 돌아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안전하게 같이 다닐 수 있고, 야경꾼 아저씨는 대단히 노련한 가이드여서 설명도 정말 재밌었다. 400년 넘게 대대로 한 저택에 계속 살고 있는 가족 이야기, 중세 도시의 위생 문제와 흑사병 이야기, 30년 전쟁 때 점령당한 도시를 구하기 위해 3리터 넘는 포도주를 통째로 마셨다는 시장(the mayor, Georg Nusch) 이야기 등등 풀어놓는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로텐부르크는 중세부터 19세기 초까지 독립적인 자유시 지위를 누린 상업의 중심지였지만, 현대로 들어오면서 점점 쇠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쇠락한 덕분(?)에 중세 모습을 유지한 것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와 가까워서 중세 때는 뉘른베르크의 대공들이 자주 괴롭혔다고 하는데, 그 뉘른베르크는 2차 대전 때 나치의 본거지가 된 후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 원래 로텐부르크도 폭격 대상에 속해 있었으나, 다행히 연합군 사령관 중에 중세 도시의 면모를 간직한 로텐부르크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어서 폭격을 면했다고 한다. 야경꾼의 이야기에서는 그 장군의 어머니가 로텐부르크를 너무 좋아하는 팬이어서 폭격 대상에서 뺐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주요 타깃에서 면제되어 극히 일부만 손상을 입고 지나갔다는 거다. 


많은 관광객들이 도착하자마자 성 안으로 들어가서 예쁜 중세 건물들이 가득한 구시가지만 본다. 하지만 성벽 바깥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서쪽 성채와 성문 밖에 강 쪽으로 삐죽이 뻗은 작은 공원(Burggarten)이 있다. 원래 방어용 요새였을 듯하다. 지금은 타우버 강을 굽어 내려다보면서 성벽이 보존된 로텐부르크를 옆에서 조망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구시가와는 또 다른 중세 성곽 도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은 화창하게 날이 개어서 작은 중앙광장에 있는 시청사 전망대에 올라 로텐부르크를 사방으로 내려다보았다. 덩치 큰 독일 아저씨들은 못 올라올 것 같은 좁은 나무 사다리 계단이라 좀 겁났지만 오른 보람이 있었다. 겨울 눈꽃이 핀 숲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는 정말 멋진 경치였다. 타우버 강은 별로 큰 강이 아니지만 꽤 골이 깊은 구릉을 만들어서 드라마틱한 경치를 만들었다. 지붕 모양이나 건물 높이를 맞추어서 중세 모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잘 보였다. 

서쪽 성문 밖 공원에서 조망한 로텐부르크와 타우버 강
시청사(아래 사진 왼쪽 건물) 첨탑에서 내려다본 로텐부르크 전망

골짜기의 겨울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잠깐 파란 하늘이더니 또 금방 안개가 밀려왔다. 경치를 감상하고 크리스마스의 독일 전통 빵인 슈톨렌(Stollen)과 커피로 몸을 녹이는데 다시 우중충한 중세 겨울 빛깔로 바뀌었다. 추운데 열심히 돌아다닌 스스로에 대한 보상으로 정당화하며 전날부터 눈독을 들인 디저트 가게(Zuckerbäckerei, Brothaus)로 옮겨 앉았다. 로텐부르크는 한국에도 몇 년 전에 소개된 슈니발렌(Schneeballen)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영어로 Snowball이니 눈덩이라는 뜻의 과자인데, 망치로 깨서 먹는 재미 때문에 서울에서도 한동안 인기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딱 맞는 과자다. 슈니발렌 파는 가게가 많은데, 여러 가지 색깔을 입혀서 쇼윈도에 진열해 놓으면 정말 예쁘다. 막상 깨서 먹어보면 그냥 튀긴 생과자 맛이라 굳이 두 번 먹을 필요는 느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도 잠깐 인기를 끌다가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추운 날 원조(?) 가게에서 중세 분위기 내는 골목을 내다보며 먹으니 조금은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작은 도시가 참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 드물게 중세 모습이 보존되었다는 막강한 기본 바탕 위에 술고래 시장의 재미있는 일화와 중세 이야기들이 다채로운 내용을 입혔다. 케테 볼파르트와 테디베어 매장 같은 선물 가게들이 합세해서 크리스마스 시즌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슈니발렌 같은 먹거리까지 예쁨을 얹었다. 2차 대전의 폭격마저 피해 간 일화로 중세 도시의 아름다움을 인증하고 있으니, 여기가 예쁘지 않다거나 감동적이지 않다고 말하면 그 사람의 안목이 의심받는다. 그저 운 좋은 도시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오랜 기간 노력했고 계속 보존하는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도시 경관과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편리한 교통이나 편의 시설을 많이 포기하고 규제해야 한다. 이렇다 할 큰 호텔 체인이 보이지 않고, 식음료 매장이나 쇼핑 아이템도 글로벌한 브랜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동쪽의 성문 가까이 숙소로 잡았던 작은 호텔도 옛날부터 있던 주택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숙박하지 않고 낮에만 다녀가는 관광객이 많을 텐데 굳이 잡지 않고 보존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 그 덕분에 살짝 불편해도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흥미로운 하루를 보냈다. 사시사철 별 변화 없는 현대 도시와 달리, 혹 다른 계절에 오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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