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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30. 2018

한류는 가까워도 한국은 멀다

2017년 11월 28일

학기말 고사를 제외하고 모든 수업을 마친 11월 말, 리투아니아에 와서 세 번째 학기를 마치고 두 번째 겨울방학을 마주하였다. 처음에는 한국의 역사, 한국의 현대사회에 대한 수업을 영어로 준비하느라 꽤 힘들었다. 그래서 첫 해 가을과 초겨울에 걸쳐 첫 학기를 마치면서는 성탄 장식을 바라보며 종강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가 상당했었다. 학기가 반복되면서 종강이 주는 해방감은 덜해졌다. 그래도 연말연시는 왠지 모르게 기다려진다. 

인문대학 종강 다과 중

동아시아 학부가 소속되어 있는 인문대학에서 간단히 종강 파티를 했다. 오후 4시쯤 학교에서 다과를 하는데 과별로 간식거리를 마련해 와서 서로 덕담하며 즐기는 부담 없는 자리였다. 객원이라 필참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에 가보았다. 과별로 특성을 살려서 간식거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독어독문학과에서 독일식 따뜻한 와인도 준비해서 꽤 파티 같았다. 동아시아학부에서는 일본에 출장 다녀온 학부장 아우렐리우스 지카스 교수가 일본 과자와 녹차 초콜릿을 올렸다. 미리 알았더라면 한국 과자라도 좀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살짝 아쉬웠다.

강의하는 사진은 없고, 작년 3월 한국대사님의 특강을 소개하다 찍힌 사진

첫 학기말에 남북관계와 핵 문제에 대해 따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에 관심이 있는 학생 누구나 들으러 올 수 있도록 수업 외에 따로 특강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가능하면 외부의 전문가나 그 나라의 학자로 초청을 한다. 한국은 그럴 여건이 안되어서 이미 와 있는 나한테 부탁을 했었다. 수업에서는 기초적인 내용만 하기에도 벅차고 최근 이슈를 다룰 시간이 없다. 특강을 기회 삼아 남북관계와 핵문제를 개괄적이나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을 했다. 기말고사 직전이라 별로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한반도나 북한 문제를 들을 기회가 워낙 없어서 꽤 많은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나로서는 이런 문제도 강의할 기회가 생기는구나 싶어 즐겁게 했는데, 질문을 받으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기본적인 것부터 해야 하는지 다시 실감했다. 기회가 된 김에 많이 설명해주려고 최대한 간단하게 냉전기 남북관계도 설명하고, 남북 경제협력과 핵위기가 교차하던 과정과 최근의 교착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심이 있어서 공부한 적 있는 학생이라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던 것과 달리, '아직 전쟁 중이냐', '왜 나누어진 거냐' 류의 기본 중의 기본 질문이 나온다. 강의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배경 지식이 전혀 없다는 전제로 바닥부터 벽돌 쌓아 올리듯이 설명을 해야 한다. 

3월 아시안 위크 한국문화 체험 행사

동아시아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조차 한국은 아직 정말 먼 나라고 다른 세상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일본, 중국과 다르게 형성된 문화적인 배경, 서로 얽히고 쌓인 역사와 관계가 기본 지식이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서 한중일 3국은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훨씬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다. 물론 교환학생을 다녀온 학생들은 확연히 다르다. 진지하게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나 학부 고학년 일부는 아시아권 학생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들은 극히 소수이고, 대다수 학부생은 말 그대로 하얀 도화지 같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한국에서 특정 어문학과에 입학한다고 해서 꼭 그 나라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니 탓할 일도 아니다. 

3월 아시안 위크 중 한국문화원의 체험 행사는 항상 엄청난 인기다.

특히 한류의 영향으로 학부를 선택한 학생들은 샤이니와 방탄소년단이라는 렌즈를 벗고 한국을 알아보기에 시간이 꽤 걸린다. 한국에서 유럽의 소도시 일상이나 원시밀림 원주민 다큐멘터리 보듯, 호기심이 가는 먼 나라를 구경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한류 마니아, K-pop 팬이라고 해서 결코 자동으로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닌 이유다. 유럽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리투아니아도 한류는 곧 K-pop이다. 팬심이 깊어지면 그 스타들이 나오는 예능과 드라마를 시작한다. K-pop의 엄청난 '글로벌함'과 모든 TV 콘텐츠의 실시간에 가까운 자막처리 덕분에 한국을 전혀 몰라도 즐기는 데에 지장이 없다. 그래서 한국어나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에 눈길이 가는 비중은 매우 적고 시간이 더 걸린다. 한류 마니아라고 해도 사극에 나오는 역사의 배경조차 맥락을 잡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VMU '한류(Hallyu)' 학생 클럽의 주역들

물론 한류 바람은 정말이지 고맙고도 대단한 것이다. 한국학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저변을 넓힌 효과는 엄청났다. 유럽에 한류 바람이 분 것이 2000년대 후반부터인데, 리투아니아에도 극소수 있다가 대략 2008년 전후에 동방신기의 뮤직비디오로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마니아 그룹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확산 계기는 물론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강의실에서 "스스로 한류 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물으면 수줍은 손 몇 개가 올라가지만 "한류 콘텐츠를 종종 보는 사람?"을 물으면 대다수가 손을 든다. 내 K-pop 지식은 정말 수준이 낮아서 'TVXQ'가 동방신기인 줄 여기 와서 알았고, 'BTS'가 방탄소년단인 줄 얼마 전에 알았으며 엑소나 샤이니 멤버가 몇 명인지 외우는 것은 결국 포기했다. 내가 한류 콘텐츠를 잘 알았더라면 수업에서 활용하여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운 법이다. 

한류클럽의 행사 부스에서 판매한 K-pop 팬아트 작품과 한류 콘텐츠 상품

한류의 인기는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정부나 민간이나 이 복덩이를 잘 유지하고 확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한국산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에 기대는 것이니만큼 그 특성에 맞는 흥미와 매력을 계속 공급해야 하고 쉽고 즐겁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관계망이나 동영상 공유 서비스에 힘입어 순항하고 있다. 내가 여기 와 있는 이유도 다 한류 덕분에 시작한 관심이 차차 깊어져 전공자가 늘고 강의 수요가 생겨서이다. 한류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공부한다는 학생도 가끔 있기는 있다. 정치적 특수성이나 경제발전 등으로 관심을 가진 경우인데, 칭찬할 만하지만 정말 극소수다. 동아시아 학부 이백 여명 중에 한두 명만 관심이 있는 정도로는 전공이나 수업이 개설되지 않는다. 한류는 그 한두 명을 수십 명으로 늘려 놓았다. 

주폴란드 한국대사님의 강연은 미리 와서 기다린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아쉬운 점은 대학교 학부에서 한국 관련 수업을 듣거나 전공하는 수준으로 깊어진 관심에 부응하기에는 한국이 아직 영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류에 힘을 받아 빠르게 늘어나는 수요에 공급이 충분히 따라가지 못한다. 재외동포사회가 대규모로 자리 잡고 있거나 유학생이 많이 가는 나라가 아니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리투아니아가 딱 그런 경우다. 주폴란드 대사관이 리투아니아까지 겸임하는데, 2017년 봄에 한국 대사님이 처음 오셔서 개론적인 한국 공공외교 강연을 한 시간 하셨었다. 강의실이 차고 넘칠 정도로 학생들이 모였다. 한국 공공외교에 관심이 있고 말고를 떠나 한국 대사의 강연을 듣는 기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한국 관련 지식은 주로 단편적인 영문 위키피디아나 블로그다. 왜 학술 자료나 책을 읽지 않느냐는 충고는 요즘 학생들에게 먹히지도 않거니와 그런 자료나 책이 충분히 있지도 않다.

 

아시안 위크 행사 중 한국어 경연대회. 전래동화를 읽는 대회였는데 더없이 진지하다.

학기가 마칠 때마다 몇몇 학생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많이 배웠고 재미있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참 고맙다. 그동안 한류 관련 소재를 빼면 한국에 대한 지식, 정보, 이야기 공급이 얼마나 없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물론 한국에 관심 없이 단지 전공 필수여서 들어야만 했던 학생들 중에서는 내 수업에서 갑자기 너무 많은 내용을 듣느라 힘들었다는 불평도 나온다. 첫 학기를 마쳤을 때, 단 6명이었던 석사 수업 학생들에게 인사동에서 사갔던 전통문양 책갈피를 선물했다.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는데도 1945년 해방 이후의 현대 정치 사회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기에 고마워서였다. 그러자 학생들이 오히려 조금씩 돈을 모아서 선물을 건네 왔다. 한국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서 고마웠다는 과분한 인사와 함께, 리투아니아 호박으로 뚜껑을 장식한 손거울과 리투아니아 초콜릿을 예쁜 박스에 담아 주었다. 

첫 학기 종강 때 대학원생들에게 받은 손거울과 초콜릿

유럽에서 학생들이 돈 모아서 교수에게 선물하는 문화는 없다. 혹시 아시아권 국가에 교환학생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고 너무 고마웠다.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경제사정은 몇몇 부유층을 제외하면 한국 학생들보다 훨씬 열악하다. 대학원생 대부분은 낮에 일하고 저녁에 수업을 듣는다. 작은 손거울이지만 호박은 엄연히 보석에 속하고, 가격을 떠나서 이렇게 마음을 표시할 줄은 생각을 못했기에 놀랍기만 했다. 한국에 대한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들만을, 그것도 추리고 추려서 수업을 했다. 그런데도 이곳 학생들에게는 세상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이고, 여기까지 와서 알려주는 게 그리도 고맙다고 한다. 공급이 너무 적다 보니 희소가치가 올라가서 과분한 공치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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